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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세이스트] 10월 우수상 - 정찰제 내 마음

나만의 인간관계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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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은 평안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싸이월드가 성행하던 시절, 20대 초반의 풋내기 깨달음에 취해 다이어리에 적었던 문구이다. (2020.10.08)

언스플래쉬


‘만족은 평안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싸이월드가 성행하던 시절, 20대 초반의 풋내기 깨달음에 취해 다이어리에 적었던 문구이다. 만취 상태에서 적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 네 어절로 나는 꽤 놀림을 받았었는데, 이를테면 지나가다 친구를 마주치면 “여~ 만평오 오늘도 평안하신가” 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아이고 오늘도 평안합니다”라고 장단을 맞춰 한바탕 웃고 지나가곤 했다. 곱씹어 넘겨야 겨우 소화가 되는 질긴 단어들보다 얼른 입에 털어 넣기 좋은 가벼움이 익숙하던 20대 초반의 무리에게 어줍지 않게 진지한 ‘만평오’는 단연 웃음거리였고, ‘진종두’(진실은 종종 두렵다)로 새롭게 놀림거리가 된 다른 취객의 등장 전까지 꽤 회자되었다.

치기 어린 진지함이었지만 꽤 진리라고 느꼈던 탓일까? 이후에도 나에게는 일이든 사랑이든 그리고 인간관계에서든 얼마나 평안한가가 만족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인간관계에 관한 평안의 비법은 ‘부족하게도 넘치지도 않게 마음만큼 행동하기’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만큼만 좋아한다. 우러나온 마음 이상을 표현하고 나면 셈에 빠른 본능이 나를 마음대로 채권자의 지위로 격상시킨다. 상대방은 영문도 모른 채 사랑에 빚진 자가 되어 기대의 무게를 떠안게 된다. 이 채권-채무관계는 참 불안하다. 초과로 지불된 마음이 회수되지 못하면 초조함이 남아 찝찝하다.

해마다 생일이 돌아오면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채무자들이다. 굳이 다이어리에 기록해두지 않아도 지인의 생일을 알게 해주는 SNS 덕택에 채무자가 양산되기 쉬운 요즘이다. ‘알고 지낸 지가 얼만데’, ‘선물을 하지 않으면 서운해 할 사람이니까’ 등등의 이유로 없는 마음으로 축하표현과 선물을 보내고 나면, 내면의 장부에 청구권이 기록된다. 그리고 나의 생일이 돌아와 정산되지 않으면 청구권은 실망으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기표되고 끝내 쓴 뿌리가 되고 만다. 반면, 순수하게 좋아하는 이들에게 표현되었던 마음은 되돌려 받지 않아도 아쉽기는커녕 돌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모를 때가 많다. 오히려 느꼈던 애정만큼 표현하지 못하고 나면 후회가 남는다. 마음의 크기에 합당하게 쏟아놓고 나면 불순물이 없다.

그래서 싫어하는 만큼만 싫어한다. 느껴지는 마음 이상으로 ‘싫음’을 표현하고 나면 그때는 내가 채무자 된다. 그 감정이 누그러들었을 때, 초과로 누출됐던 불필요한 혐오는 미안함이 된다. 애인을 두고 한눈 팔았던 남자들이 괜히 안 사던 꽃을 사는 것처럼 뜬금없는 호의로 나만 아는 채무를 해소해 보려 하지만, 억지로 짜낸 여드름마냥 지저분한 흔적만 남을 뿐이다.

반대로 싫은 감정을 억누르지도 않는다. 인사이동이 잦은 직장 특성상 사람을 새로 만날 일도, 이별할 일도 많다. 지긋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맞이할 때 나는 굳이 ‘미운 정도 정이다’라는 구식 문구를 인용하지 않는다. 미운 놈을 보내는 축제의 장에서 신나게 스텝을 밟고 싶은데 발목에 옛 속담의 족쇄는 걸리적거린다. 연기전공자가 아닌데 ‘미운 당신이 떠나 좋지만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으니 아쉬운 척이라도 할래요’라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표현하려 미간을 어색하게 구겨보는 일도 너무나 수고스럽다. 대신 청량하게 한 마디 건넨다. ‘잘 가세요’.

정산이 제때 이루어지는 탓에, 나의 인간관계에는 없는 것들이 많다. 채권과 채무가, 기대와 실망이 없다. 언제든지 돌아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좋아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이미 크기에 맞게 다루어져 있다. 인터넷을 떠돌다가 MBTI 16개 성격 각각에 대한 한마디 표현을 보았는데, 내 타입은 ‘쿨병말기’였다. 맞는 말이라 풉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내 떠들었던 인간관계론도 결국 쿨병말기 환자의 자기만족인가 싶다. 그런데 쿨병말기면 뭐 어떤가? 깔끔한 덕분에 평안할 수 있고 늘 만족스러운 것을. 풋내기 허세글이 어느덧 열 살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같은 말을 한다. 결국 만족은 평안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유현수 퇴근하고 누워만 있는 것이 싫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결국 누워서 글을 쓰고야 마는 프로게으름뱅이.


* 나도, 에세이스트 공모전 페이지 

//www.yes24.com/campaign/00_corp/2020/0408Essay.aspx?Ccode=000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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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유현수 (나도,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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