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작가 강영숙 “혼종의 시대, 국경을 넘는다는 것”
2019년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이 만난 작가들
내가 생각하는 문학 안에서 국가나 민족이란 늘 파괴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파괴하려고 했던 국가의 이상적인 모델은 늘 그들(디아스포라 문학의 주체들)의 사유 안에서만, 그들의 상상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도 고백하고 싶다. (2019. 05. 16)
ⓒmelmel chung
한국문학번역원이 주최하는 2019년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문학축제 참가 작가 인터뷰 세 번째는 한국 소설가 강영숙이다. 강영숙은 1966년 춘천에서 태어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8월의 식사」 가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흔들리다』 , 『날마다 축제』 ,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 『아령하는 밤』 , 『회색문헌』 , 장편소설로 『리나』 , 『라이팅 클럽』 , 『슬프고 유쾌한 텔레토비 소녀』 등이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백신애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P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열여섯 소녀의 여정을 소설의 플롯으로 채택하고 있는 『리나』 는 디아스포라 여성의 서사를 새롭게 재현하고 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인터뷰는 최근 상자한 소설집 『회색문헌』 과 장편소설 『리나』 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melmel chung
최근 소설집 『회색문헌』 을 상자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설집 수록작 가운데 하나를 표제로 선정하는 우리 출판계의 관습과 달리 이 소설집에는 그 이름을 딴 수록작이 없다. 최종 단행본이 되기 이전의 자료, 공식 자료 이전의 자료, 과정을 보여주는 회의 자료,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결국 폐기하게 될 자료를 통칭해서 부르는 ‘회색문헌’을 소설집 제목으로 정한 이유가 있는지?
소설도 일종의 기록 보관 시스템, 아카이빙(archiving)의 한 형태라고 생각해서 그런 타이틀을 붙였다. 파일에, 창고에 보관했다가 폐기될 자료라고 생각하면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데뷔 후 펴낸 다섯 번째 소설집이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뜻 깊은 작업이었다.
소설을 회색문헌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어떤 면에서 그 말은 자신의 소설 쓰기 역시 언젠가는 다른 작품에 의해 폐기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응시하고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라는 생각도 든다. 담담하고 냉정하며 단단하다는 느낌이다. 오랜 기간 일과 소설 쓰기를 병행하다가 올해부터 전업 작가가 되었다고 들었는데, 전과 달라진 점이 있는지 궁금하다.
결국 시간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직장 일이 많을 때는 24시간 카페에 가 밤을 새우면서 원고를 쓰고 아침에 보낸 적도 있다. 그때는 주어진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구상했던 대로 그냥 쓰기에도 바빴다. 오히려 지금은 시간이 조금 더 주어져서인지 더 잘하고 싶어져 욕심을 내게 된다. 집착하게 된다고 할까. 오히려 잘 쉬거나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태생지가 춘천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천은 호반도시이지만 사실 군사 도시이기도 하다. 성장기에 서울로 이주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정주보다는 유목이나 국경 넘기 등 경계 넘기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춘천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사일부대와 주한 미군 등이 주둔했던 캠프 페이지(Camp Page)가 남아 있었고, 온종일 한국군 미군들이 집 앞을 지나 행군을 하던 날도 많았다. 호수와 안개가 많은 아름다운 곳이기는 했지만 군사도시였고, 아버지가 군인이었던 친구들이 많았다. 춘천에서 서울로 이주한 것은 열네 살 때였는데, 종로 광교에서 횡단보도에 서 있는 많은 사람을 봤을 때 놀랐다. 그때 처음 본 서울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커다란 배 같았다.
누구나 사는 동안 가족을 비롯해 관계 맺었던 사람들과 몇 번의 이별을 하고 나면 생이 끝나버린다. 어떤 사람에게는 국가도 그 대상에 포함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신발보다 나라를 더 자주 바꾸며 다녔다”는 브레히트의 말로 『리나』 를 소개해주신 최인석 작가의 표현에 의하면 리나는 가족은 물론 국가를 버린 반국가적인 인물이다. 실제로는 어렵지만 때로 국가를 버리고 싶은 적 있지 않나?
그 말은 이번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의 패널 발제문을 생각나게 한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 안에서 국가나 민족이란 늘 파괴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는 이야기나 “어쩌면 내가 파괴하려고 했던 국가의 이상적인 모델은 늘 그들(디아스포라 문학의 주체들)의 사유 안에서만, 그들의 상상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도 고백하고 싶다”는 대목들이 그것이다. 이 고백의 의미를 좀 더 내밀하게 듣고 싶다.
국가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상상력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란 가장 선한 것, 가장 안전한 것,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라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것들 말이다. 오히려 이런 부정적인 요소를 덜 체감하고 있는 것이 바깥에서 사는, 디아스포라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닐까.
장편 『리나』를 이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봐도 좋을까? 소설의 착상 계기가 궁금하다.
어느 날 텔레비전 뉴스에서 부모를 따라 탈북한 십 대 소녀가, 버스 안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커튼을 열고 비가 내리는 서울을 보고 있는 장면을 봤다. 저 친구들이 엄청 고생하며 왔을 텐데, 과연 우리가 저 친구들을 잘 받아줄 수 있는 나라일까,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고 쓰게 됐다. 하지만 남한에 정착하는 과정은 아주 나중에, 그들 자신이 직접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한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설정을 하게 되면서 소설이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melmel chung
『리나』 이야기를 더 해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열여섯 살 소녀 리나는 P국으로 밀입국하고자 하는 스물두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인솔자를 따라 국경을 넘는다. 작품의 배경이나 설정을 생각하면, 리나를 ‘탈북소녀’로 볼 여지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나는 어느 특수한 하나의 사례로 환원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그것은 리나의 여정이 구체적인 현실의 공간으로 적시되지 않은 결과 같기도 하다. 구체성을 포기하고 익명의 공간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탈북자들의 이동 경로 같은 글들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르뽀가 아니고 소설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지명이나 정보를 넣지 않는 것이 허구성을 강화시키는 장치가 될 것 같았다. 남한을 ‘P국’이라는 이니셜로 표현했고 리나가 8년을 돌고 돈 나라의 국가명, 지명 등을 모두 무국적으로 했다. 그러나 무국적이라는 텅 빈 기호를 채울 세부항목을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이와부치 고이치의 『아시아를 잇는 대중문화-일본, 그 초국가적 욕망』 이란 책에 보면 “무국적이란 말은 원래 신문 비평가가 1960년대에 등장한 <쉐인> 등의 미국 서부극을 패러디한 일련의 닛가츠(일활) 영화 작품을 평하면서 나온 말로, 다양한 문화 기원을 가진 요소를 섞어 융합하는 의미도 있고, 민족적ㆍ문화적 특징을 감추거나 없애는 의미도 있다.” 일본이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게임 소프트웨어를 아시아 시장에 수출하면서 일본의 문화적 특징을 제거해버린 예에서 무국적성은 후자의 의미를 갖고, 나도 작품 내에서 같은 의미로 활용했다.
몇 년 전에 UC버클리대학교에서 이 작품을 가지고 학생들과 토론할 때 학생들이 이 ‘P’라는 이니셜 안에 자신의 정체성이나 상황을 대체해 이해하는 것을 보고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또 이 작품이 영어로 번역되었을 때 서사 상 중요한 장소나 캐릭터 등 많은 기호의 알파벳이 p로 시작된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려주기도 했다.
『리나』 는 민족 정체성의 서사로 환원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사의 주인공인 리나가 밀입국 디아스포라 여성에게 주어지는 삶의 고초에도 불구하고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한 희생양의 이미지로 고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타의 디아스포라 서사와 구별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뒤늦게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순간에도 혼자의 삶을 선택하며, 장터에서 자신의 경험을 노래로 들려주고, 축제의 난장을 마음껏 즐기기도 한다. 리나가 보여주는 생명력, 그 무한한 삶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2018년 1월에 독일 베를린 한국문화원에서 낭독회가 있었다. 난민 문제가 워낙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기 때문인지 <Berliner Zeitung>에 낭독회 소개 기사가 났는데, “광기와 타락 사이에서 항상 사람들을 추동하는 것은 희망이다”라고 표현했다. ‘광기’는 리나가 떠나온 나라를 상징하는 말이었고 ‘타락’은 리나가 도착하려고 하는 ‘P’국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리나가 P국이 아닌 제3의 국경을 넘어, 자신만의 나라를 만드는 서사로 갔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어떤 힘든 상황이라도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은 희망 혹은 기대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인물의 경우 여성이든, 남성이든 자신의 정체성을 수없이 바꾸는 정신적 모험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어떤 하나의 분명한 바람이 있었다면 ‘리나’라는 캐릭터를 복잡하고 혼종적인, 어리지만 성숙한, 여자도 남자도 아닌 흔한 말이지만 주체적이고 생명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 아니 국경이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국경을 넘는 이유가 이데올로기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국경을 넘고 전보다 그것이 더 용이해졌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도 계속 바뀐다. 탈북자들은 남한을 경유해 보다 안정적인 미국이나 유럽에 가닿기 위해 또다시 국경을 넘는다. 국경을 넘는 의미가 전에 비해 다중적이고 이런 일들이 우리의 일상과 멀리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체감하고 있다.
한국문학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할 만한 어떤 움직임이 지금 이곳에서의 소설 쓰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어떤 지점이 있을까?
김석범, 이창래, 수잔 최를 비롯해 한국이라는 맥락을 지니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늘 찾아 읽었던 것 같다. 작품 안에서 그들이 한국을 언급하거나 전경화 하지 않더라도 늘 어떤 감동의 요소가 있는 것은 신기하다. 최근 완간된 김석범 선생님의 『화산도』 가 그토록 세련된 작품이었다는 것도 놀라웠다. 또 『만조의 바다 위에서』 이후 이창래의 신작은 늘 기다리게 된다. 느린 톤으로 진행되는 수잔 최의 『요주의 인물』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자주 읽는 소설이다.『The Defections』를 쓴 하프 코리언인 하나 미쉘(Hannah Michell)의 차기작도 기다려진다. 그들의 작품은 이미 세계문학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서 얘기해줄 수 있나? 소설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도 궁금하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는데 생각만큼 시원시원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장편을 쓰는 일은 뭔가 헤쳐 나올 수 없는 웅덩이에 빠진 것과 비슷하다. 몸도 더불어 긴장하고 마음도 여유가 없다. 그런데 또 이렇게 몰아붙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글쓰기이기도 하다. 나는 늘 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쓰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아무도 내 작품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직 나만 내 작품을 기다린다.
* 2019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문학축제 참가안내
//blog.naver.com/itlk/221533256112
관련태그: 강영숙 작가, 소통과 평화의 플랫폼, 국경, 파괴의 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