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속도대로
내 시간에 노련한 사람이 어디있나요
‘천천히 가도 괜찮아, 길만 알고 있다면’이라는 부암동의 벽화가 문득 떠오른다. 빨랐다가 느려졌다 하는 길에서 놓고 가야 할 것들과 지녀야 할 것들. (2019. 01. 11)
몇 차례의 연말 모임에서 나는 ‘너 꽤나 변했어. 편안해 보여’ 라는 말을 여럿 들었다. 남들이 보기에 편안해졌다는 말은 뭘까. 3년차 고비를 넘긴 회사 생활일까, 운동을 다니는 ‘저녁 있는 삶’일까, 애인과의 관계일까. 뭐든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말은, 부여잡고 있던 것들을 꽤나 놓았다는 말이기도 하여서 왠지 배 끝이 시린 기분이었다. 위태롭고도 불안한 시간들을 지나온 나였으니까.
뭐든 다 알고 잘 하고자 하는 강박이 있었다. 일도 잘 하고 싶었고, 그만큼 평판도 좋았으면 좋겠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싶었다. 누군가가 무얼 물어봤을 때 모른다고 답하는 것이 꽤나 민망했다. 고집 세고 욕심 많던, 그래서 아는 척도 가끔 하던 나였다. 내 말이 언제나 맞기를 바랐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면서도 쿨한 척도 했으니, 얼마나 재수 없었을까!
이제는 그런 강박이 피곤해져서, 또 그 노력들이 반드시 원하는 결과가 되진 않음을 알게 되어서 조금씩 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모르는 게 당연하고, 모두와 잘 지내는 게 불가능한 것이며, 날 싫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며, 내가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적절히 피하는 것도 나쁜 건 아니라는 것들을 서서히 알아가는 중이다. 갑자기 변한 것도, 내 의지로 인한 것도 아닌 저절로 알게 된 놓아야 할 것들에 대해.
(전략)
다 쓰고 씌어지고 버려질 나는 아름답고
버려진 후에도 그 후에도
몸에 집중하던 사람이 정신을 처음 마주하는 낯선 순간처럼
정신에 몰두하던 사람이 몸을 처음 이해하던 그날처럼
제2의 암흑기 이후에
몇 겹의 어둠이 옴짝달싹 못 하게 더 에워싼 후에 꽁꽁 묶인 후에
가장 밝은 것으로 나를 반짝이다가 나는 아름다워질거야
그리하여 이미 지나온 시인의 시에서
모르던 시간을 읽으면 나는 곧 후회로부터 긴 회한의 울음이 되어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황혜경,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 시집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中
수영을 다닌 지 6개월이 넘었다. 그 동안 빠지라는 살은 안 빠지고, 거대해진 어깨와 팔뚝 근육뿐인지 알았건만, 이번 달이 되면서 갑자기 체력도 수영 실력도 좋아 진 것을 갑작스레 느꼈다. 6개월 동안 나의 몸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도 조금 더 좋아지는 게 느껴지고, 속도도 많이 빨라져서 언젠가는 대회에 나가보겠다는 꿈도 생겼다. 보람이 없다고 생각하던 때에 느낀 변화라서 그런지 더 짜릿했다.
갑자기 변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수영 6개월 차에 바뀌기 시작한 내 몸을 통해 번쩍 정신이 들었다. 역치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다. 내가 버릴 것들을 알아가게 된 것처럼 역치를 낮추면서 타협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원하던 곳에 오를 때까지 끓어오르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서로가 참견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각각의 속도도, 그 목표점의 높낮이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 연말 모임 중에서는 퇴사 이후, 혹은 취업이 아닌 다른 것들을 준비 중인 친구들도 많았다. 사실 나는 퇴사라는 것이 약간 두렵기도 하다. 일 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고, 이른 출근 시간은 아직까지 버거우며, 경제적 능력을 상실한 나는 온통 걱정거리일 것이 분명해서랄까. 하지만 그런 나와 다르게 자신만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친구들은 자신의 속도에 꽤나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볼 때는 느린 시간이지만, 그것은 내 인생이지 않냐고. 내 속도 대로 가서 어딘가에 이르기만 하면 되지 않냐고.
남다른 오지랖으로 그들을 걱정하려 했던 나는 그들이 계획 중인 시간들을 들으면서 다시 정신이 들었다. ‘천천히 가도 괜찮아, 길만 알고 있다면’이라는 부암동의 벽화가 문득 떠올랐다. 뭐든 빨리 해야, 결과가 빨리 나와야 직성이 풀리던 내가 조금씩 멀리, 편안하게 보려는 사람으로 변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의 삶의 속도도 빨랐다가 느려졌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되려 조바심을 낼 필요도, 걱정 할 필요도 없다. 각자 자신의 길을 알아서 찾아가고 있을 테니까.
뜨거운 날들을 먹으며 살았다
혀가 돌돌 말리며 울먹이며
살았다
저 끝에서부터 저항의 무릎이 뜨거웠지만
시간은 저절로 뜸들었다
뜨거운 밥이
뜨거운 눈물로 치환되었다
내 몸에서
네 마음이 쏙 빠져나갔다
너를 보내고도
내가 남아서
웃는다
이사라, 『이제는 웃는다』 , 시집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中
내 속도와 관계 없이 다른 이들을 바라보려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아직까지 나와 다른 속도의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고, 나보다 빠른 사람을 보면 조바심이, 느린 사람을 보면 안도감이 들곤 한다. 그건 내 길에 대해 확신이 없어서, 어디인지 자꾸 헷갈려서 돌아보는 것일 테다. 그 길 와중에는, 차마 버리지 못한 놓아야 할 것들이 계속 방해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올해에는 내가 이루고 싶은 나의 길들을 몇 가지 꼽아보았다. 수영 대회 나가기, 관심 있던 자격증 따기, 차마 읽지 못하던 책 정량으로 읽기, 글 엮어내기 등. 길이 정해졌으니 속도야 어떻든 나는 가기만 하면 된다. 올해의 마지막에는 내가 정했던 10개의 길들이 얼마나 완주되어 있을지, 나의 속도에 만족하고 있을지 기대되는 올해가 될 것 같다. 각자의 속도대로 우리, 제 길을 찾아가고 있기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이사라 저 | 문학동네
짐작할 수 있는 감정의 경사, 다름 아닌 슬픔. 시인은 아픈가. 아니 우리 중 아프지 않은 자 그 어디에도 없지.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
관련태그: 각자의 속도, 내 시간, 편안해 보여, 버려질 나는 아름답다
가끔 쓰고 가끔 읽는 게으름을 꿈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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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시인선 105 이사라 시집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를 펴낸다. 이사라 시인의 시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따스한 등불 하나가 또 하나 켜지는 마음으로 이 시집을 환하게 반길 것이다. 언제나 어루만져주는 부드러운 손의 시가 그였던 연유다. 언제나 어루만져줘서 둥글어진 등의 안음이 그였던 까닭이다. 이번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