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코 도시락 가게의 기적 -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천재 수학자가 낸 기출 문제의 정답은 사랑이었다
그가 내일도 ‘오늘의 도시락’을 살 수 있길 바란다. (2018. 06. 20)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툭툭 힘 빠진 채로 다리를 내디디며 걷는다. ‘터덜’ 하고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배우의 긴 다리가 느린 동작으로 보이는 것 같다. 조성윤 배우가 연기한 이시가미가 무대 위에 등장했을 때 그는 늘어뜨린 어깨와 걷는 것으로 먼저 관객에게 인물을 소개한다.
내일도 그럴 수 있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남자
오전 7시 35분, 이시가미는 어김없이 집을 나선다. 노숙자 숙소가 늘어선 강변 길을 따라 걷다가 학교에 가기 전 도시락 가게 들러 오늘의 도시락 하나를 산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게 했으며, 내일도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평화로운 이시가미의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도시락 가게 점원인 야스코가 사는 옆집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 날부터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퇴근해 집에 있던 이시가미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옆집 문을 두드렸고,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사건에 개입해 해결할 것을 자처한 이시가미는 비상한 머리로 모든 경우의 수를 셈해 계획을 세운다. 모녀는 살인 사건 용의자이자 실제 범인이지만, 범인이 아니다. 수학 교사 이시가미가 학생들에게 ‘기하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함수 문제’를 내는 것처럼 용의자 이시가미 역시 '맹점을 찌르는 문제’를 만들었다. 이시가미의 문제를 푸는 사람들은 함정 안에서만 허우적거리고, 함정 밖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한다.
이시가미가 계산하지 못한 건 대학 동창이자 천재 물리학자인 유카와가 사건에 개입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유카와가 이시가미의 함정에서 눈을 돌린 것은 이시가미의 감정선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다. 누구도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계획을 실행했던 중심에는 사랑이 있었다.
무대라는 시계 위에서 초ㆍ분ㆍ시침이 된 배우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은 동명의 추리 소설이 원작이다. 2005년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발표했으며, 2006년 제134회 나오키상을 받았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 드라마, 연극 등 다양한 콘텐츠로 일본, 중국, 한국 등에서 리메이크했다.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은 2014년부터 개발을 시작해 2016년 대명문화공장의 개관 2주년 신규 콘텐츠 개발 지원 프로젝트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 사전 리딩 공연을 마치고 약 2년 동안 추가 개발 기간을 거쳐 최종본을 완성했다.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 는 원작의 커다란 줄기를 두고 뮤지컬로만 표현할 수 있는 요소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장치는 무대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무대는 1, 2층으로 나뉘어 있다. 무대 1층은 주로 등장인물의 집, 가게, 연구실 등 일상을 보내는 곳으로 활용한다. 대부분 사건이 무대 1층에서 일어나지만, 무대 2층 역시 쉬지 않는다. 불규칙한 도형으로 만든 반투명 가림막 뒤에는 음악팀의 실루엣이 보인다. 1층에서 2층으로 연결된 계단으로 올라가면 가림막 앞으로 놓인 길을 활용할 수 있다. 이시가미가 매일 걷는 출근길, 전화를 거는 공중전화 박스가 놓인 길로 쓰인다. 때로는 1층에서 극이 전개될 때, 이해를 돕기 위해 극을 설명하는 장소로도 2층을 활용한다. 1, 2층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관객에게 많은 정보를 전달한다. 마치 시곗바늘이 움직이듯이 자연스럽게 배우가 움직이고, 톱니바퀴가 돌아가듯이 전개되는 극에 조금씩 빠져든다. 보는 내내 무대 전체가 꽉 찬 느낌을 준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장치는 극의 흐름이다. 문학 작품이 영상이나 극으로 해석될 때 문학 작품만의 분위기를 담으려고 극의 전개가 모호해지거나, 이야기 일부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흐름 자체가 깨지는 경우가 있다. <용의자 X의 헌신> 은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배우의 연기, 대본, 무대, 음악 등 극 전체를 탄탄하게 하는 요소가 잘 어울려 두 시간이 금세 흐른다.
어제와 다른 내일을 선택하게 한, 사람과 사랑
결국 사랑 때문이라는 진부한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박수받는 이유는 결국 사랑 때문이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셈해 의심이 가는 모든 지점에 함정과 알리바이를 제시하는 수학 천재도 사랑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셈은 무엇도 하지 못하는 결과를 답으로 제시한다. “이시가미가 왜?” 극 중 노래 가사는 뮤지컬이 모두 끝난 뒤에 우리에게도 “이시가미가 도대체 왜 사랑에 빠졌을까?”라는 질문으로 다가온다. 그러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시가미는 구원을 받았다고 느꼈다. 거기에서 더 구체적인 이유를 따져 묻기엔 어깨를 바닥으로 늘어뜨리고 느릿하게 걷는 이시가미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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