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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남자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는 연극 <아트>
우리들의 거울!
우리는 `항상 돌봐줘야 하는 존재`인 친구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2018. 02. 14)
객석에서
오랜 친구가 2억 원짜리 그림을 샀다고 하면 어떨까? 게다가 내 눈에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판때기’로 보인다면 말이다. 연극 <아트(ART)> 가 10년 만에 대학로 무대에 돌아왔다. 하얀 판때기를 2억 원을 주고 살 만큼 예술의 가치를 볼 줄 아는 피부과 의사 세르주와 그런 세르주의 허세가 보기 싫어 비아냥거리는 항공 엔지니어 마크, 세르주도 마크도 다 이해되는 또는 이해되지 않는 문구 도매업자 사원 이반이 등장한다. 세 남자의 우정을 배경 삼아 인간 내면의 솔직한 모습을 들여다보는 <아트> . 공연을 보며 객석에서 생각했던, 또는 관객들이 생각할 법한 얘기들을 각색해 보았다.
D열 9번 : 꽤 친한 친구가 2억을 주고 그림 한 점을 샀다고 하면 어떨까?
D열 10번 : 글쎄, 여러 생각이 들겠지. 2억 원을 내고 그림 한 점을 살 만큼 그 친구가 부자였나, 그림 한 점에 2억 원을 쓸 만큼 그 친구의 예술적 취향이 남달랐나, 굳이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뭘까, 매달 생활비 걱정하는 내 인생은 뭔가... 아무래도 전체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 것 같은데(웃음)?
D열 9번 : 게다가 그림을 직접 봤더니 그냥 하얗기만 한데 친구는 찬사를 아끼지 않아. 이 그림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면 마치 예술적 식견이 뒤떨어진다는 것처럼.
D열 10번 : 비싼 명품 가방만 사는 친구가 있었는데, 언젠가 ‘너 아직도 그런 가방을 드니?’라고 말하더군. 명품 같은 거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 가치를 몰라서라고. 그런 기분일까? 그때 나도 모르게 떠오른 말이 ‘네가 언제부터?’였는데 참았어. 그렇잖아, 오래된 친구니까 역사를 뻔히 아는데(웃음).
D열 9번 : 이 작품에서 마크는 안 참고 내뱉은 거지. 세르주가 ‘아트’라고 말하는 그림더러 ‘하얀 판때기’라고!
D열 10번 : 그런데 뭘 또 그렇게까지 지적해야 하나 싶어. 어쨌든 능력이 있으니까 2억 원을 냈고, 그게 진심이든 허세든 세르주 본인이 좋다는데. 이반처럼 그냥 같이 좋다고 해주면 좋잖아.
D열 9번 : 꼴 보기 싫은 거지. 좀 전에 친구 얘기 한 것처럼 세르주의 과거를 뻔히 아니까. 마크가 기억하는 세르주는 과거 자신을 우러러보고 자신의 사상을 추종했는데, 이제는 자기보다 여러 면에서 우월한 척 하니까 알려주고 싶은 거 아닌가.
D열 10번 : 우월한 척이 아니라 우월해졌을 수도 있지. 과거와 현재는 분명히 다르잖아. 물론 세르주의 모습이 허세처럼 느껴진 걸 보면 과시하고 싶은 마음, 마크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을 거야.
D열 9번 : 사람들이 동창회에 안 나가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네가 언제부터?’와 ‘옛날의 내가 아니라고!’가 부딪히는 거지(웃음).
D열 10번 : 그럼에도 동창회가 유지되는 건 이반 같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고. 두루두루 잘 지내고, 좋은 게 좋은 거고, 아낌없이 부러워하고 적당히 뒷담화도 하고, 때로는 모두의 동네북이 되는 친구 말이야. 아마 이반은 마크와 세르주가 왜 으르렁대는지도 마지막까지 이해하지 못할 거야.
D열 9번 : 세르주가 2억 원짜리 그림을 산 것을 계기로 들어난 세 사람의 내면이지만,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이번 일이 분출구가 됐을 뿐 이미 오랫동안 보글보글 끓고 있었을 거야. 남자들의 우정, 의리는 여자들과 다르다고 하지만 세 남자도 옛날 별의별 얘기까지 다 하잖아. 우정의 뒷면에도 수많은 감정들이 달라붙어 있으니까. 게다가 상대방뿐만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모습까지 얽혀 있고.
D열 10번 : 그런 인간의 솔직한 내면을 재밌는 설정 속에 배우들의 찰진 연기로 잘 풀어내서 그런지 관객들도 굉장히 재밌게 관람하는 눈치야.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정들이라서 그런가?
D열 9번 : 사실 난 10년 전에 <아트> 를 봤는데, 물론 그때도 위트 넘치는 작품이라고 생각했어. 당시 정보석, 권해효 씨 등이 출연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 그런데 객석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작품은 아닌 걸로 기억해. 재미는 있었지만 쉽지는 않았다고. 극을 관람하는 데는 관객 입장에서도 에너지가 필요했어. 내 동행인은 결국 졸더라고. 그런데 오늘만 그런지는 몰라도 객석 분위기가 사뭇 달라서 좀 놀랐어.
D열 10번 : 지금 봐서는 그렇게 어려운 작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데. 객석 분위기도 그렇고. 10년 전이면 아무래도 더 어렸으니까, 그래, 더 순수했으니까 사람의 속내가 잘 안 읽혔던 게 아닐까. 또 이번에 좀 더 친절하게 극을 손봤을 수도 있고.
D열 9번 : 모르겠어, 그때도 쉽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재밌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리 극이 친절해졌다고 해도 박장대소하며 볼 연극은 아니지 않아?
D열 10번 : 글쎄. 관객들이 많이 웃기는 하던데 배우들의 연기가 그만큼 좋았을 수도 있고, 앞서 얘기한 것처럼 극을 좀 더 쉽게 풀어냈을 수도 있고, 또 지난 10년간 이 정도 연극은 그저 유쾌하게 관람할 정도로 관객들의 수준도 향상된 게 아닐까? 10년 전과 지금 대학로는 많이 다르잖아.
D열 9번 : 프랑스 작품이잖아. 좀 더 은은한, 섬세한 웃음이 어울리는 연극인데, 너무 큰 웃음들이 너무 자주 터져 나와서 오히려 관극에 방해가 되더라고.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대본에 깃든 재미보다 배우의 연기에 웃는 느낌이랄까.
D열 10번 : 하하하.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거 아니야? 10년 전에는 동행인은 졸 정도로 어려운 연극에서 나만 섬세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어려움 없이 재밌게 관람하니까 마크처럼 ‘네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에 심기가 불편한 거 아니냐고(웃음).
D열 9번 : 하하하. 그런데 정말 궁금한데, 작품의 진짜 재미를 알고 그렇게들 웃은 걸까? 세르주처럼 ‘연극 정도는 어려운 게 아니라 호탕하게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여가활동’이라는 허세의 발현은 아니고? 그리고 별 생각 없이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는 그대는 이반이 아닌가 싶군(웃음).
D열 10번 : 그럴 수도(웃음). 그나저나 그 세 사람은 이제 어떻게 지낼까? 그렇게 들쑤셔놨는데 예전처럼 좋은 우정을 나눌 수 있을까? 겉으론 웃지만 또 앙금이 남지 않겠어?
D열 9번 : 글쎄, 그건 또 10년쯤 더 살아봐야 알겠지(웃음). 10년 전 <아트> 를 볼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우정도, 사랑도 좋은 모습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아. 그러니까 그 우정도 이런저런 감정을 더해 이어지겠지. 그들의 나이에 맞게.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