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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얼마나 써야 하나
춘추전국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원고 분량
전자책, 특히 장르 소설에서는 글자수로 원고량을 말한다. 15만 자가 한 권 분량이 되는 식이다. 외국에서는 단어 수로 원고 분량을 세는 것과 유사하다. 일견 가장 명쾌해 보이는 이 단위에도 허점이 있었다. (2018. 02. 13)
언스플래쉬
단위는 사고를 지배한다. 말이라는 건 같은 의미를 전제할 때 그 효용성이 있다. 토론을 하기 전에 단어의 정의부터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다. 단위는 그 중에서도 숫자를 쓰기 위해 합의 해야 하는 개념이다.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 숫자인데, 단위가 다르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갑오개혁 때 미터법이 도입된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 국제 단위인 SI 단위만 사용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자꾸 평, 근, 마 등 전통적 단위가 사용되는 이유는 익숙해진 단위는 이미 하나의 이미지를 이루기 때문이다. 105평방미터라고 하는 것과 32평이라고 할 때 후자가 더 직관적으로 다가온다. 면적을 말할 때 작은 넓이는 ‘축구장’, 큰 넓이는 ‘여의도’를 비공식적 단위처럼 쓰는 것도 어느 정도 규모인지 머릿속에 바로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일 거다. 비슷한 것으로 더러움을 측정할 때 쓰이는 ‘변기’라는 단위도 있다.
그러나 지역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는 단위는 거래에서 크고 작은 마찰을 가져온다. 채소 한 근과 고기 한 근은 그 무게가 다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시장에서 나물 한 근이 왜 400g이냐고 항의할 만하다. 게다가 되, 말, 돈 등의 단위는 측정하기도 애매해 지불한 가격만큼의 상품을 받지 못하는 일도 많다.
샌드위치 브랜드인 ‘서브웨이’의 빵 사이즈가 다르다며 소송을 제기해 배상을 받은 사건이 외국에서 있었다. 발 길이 정도를 의미하는 풋롱(footlong)은 12인치를 의미하는데 풋롱 사이즈 샌드위치가 11인치 정도로 조금 작아 해당 소송이 인용되었다. 만약 샌드위치 사이즈 이름이 풋롱이 아니라 빅롱이나 롱롱 따위의 지어낸 이름이었다면 샌드위치가 좀 작아 보여도 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을 거다. 그래서일까 스타벅스의 톨, 벤티 등의 컵 사이즈처럼 자신만의 단위를 사용하는 프랜차이즈들이 많은데, 단위를 만든 기준은 자신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비단 대형 매장만이 아니라 재래시장에서도 자신만의 단위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한 근에 얼마’라고 적어두는 대신에 ‘한 바구니 얼마’라고 써두는 식이다. 한 바구니가 얼마만큼인지는 주인 마음이다. 이것을 보아도 단위를 결정한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권력이다. 진시황이 도량형 통일을 한 것은 비단 통일 제국의 거래 편리성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지금 단위에 관해서 춘추전국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은 원고 분량이다. 전통적으로 출판계에서는 200자 원고지를 기준으로 글의 양을 재어 왔다. 장편 소설이면 1000매, 단편 소설이라면 70매 하는 식이다. 원고지에 글자를 손수 적는 일은 90년대 이후로 거의 사라졌음에도 원고지 매수로 글의 분량을 말하던 관행은 꽤 오래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등단한 작가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책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출판 현장에서 간간히 새로운 단위가 사용되었다. 바로 아래아한글 프로그램 기준으로 몇 장이냐 하는 것이다. 원고지로 350매라고 해도 “아래아한글로 몇 장이에요?” 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파일로 원고를 주고 받는 상황에서 프로그램 기준으로 분량을 말하는 것이 서로 더 편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종이 크기와 줄간격, 글자 크기 등 기본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원고 분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널리 통용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덕분에 공모전 등 원고 분량을 명시해야 하는 경우에는 종이 크기 A4, 줄간격 160%, 글자 크기 11포인트 등으로 지정한 길고 긴 분량 표기가 사용된다.
원고지와 A4 만이 아니다. 원고 분량에 byte 단위도 사용된다. 이력서처럼 웹으로 입력하는 글은 byte로 분량을 요구한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몇 자정도 써야 몇 byte가 되는지 지식인에 질문하며, 원고량을 byte로 계산해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전자책, 특히 장르 소설에서는 글자수로 원고량을 말한다. 15만 자가 한 권 분량이 되는 식이다. 외국에서는 단어 수로 원고 분량을 세는 것과 유사하다. 일견 가장 명쾌해 보이는 이 단위에도 허점이 있었다. 200자 원고지나 아래아한글, byte의 경우에는 당연히 띄어쓰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글자수를 셀 때 이 띄어 쓴 부분을 셀 것인지 아닌지에 따라 그 수가 달라진다. 결국 '공백포함 15만 자, 공백미포함 10만 자' 등의 새로운 표현이 생겼다. 줄여서 공포 15만 자, 공미포 10만 자 하는 식으로 부른다.
원고 단위에 도량형 통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도리 없이 원고지, A4, byte, 글자수 네 가지를 모두 사용할 수 밖에 없을 듯하다. 동갑의 기준만도 연 나이와 만 나이, 빠른 년생 등 세 가지나 있는걸 뭐.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라는 변명 아래 책과 전자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작년부터 알코올 알러지를 앓고 있는데 개가 똥 알러지 같은 소리라는 핀잔만 듣고 있습니다. 고양이 4마리, 개 1마리와 살며 책에 관한 온갖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