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허남웅의 영화경(景)
<코코> 삶과 죽음이 하나되는 대축제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라는 첨단의 기술력으로 관객의 눈을 현혹하면서도 가족애와 우정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며 마음마저 적셔왔다. (2018. 01. 04.)
영화 <코코>의 한 장면
할머니가 다른 세상으로 가신 건 정확히 10년 전이다. 할머니의 죽음이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내가 경험한 가장 화려한 장례식이어서다. 꽃상여를 직접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초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결혼 이후 평생을 뒷바라지로 고생하셨다. 그 세대의 남자 대부분이 그렇듯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손자인 나는 당연하게도 그게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때는 할머니의 시신이 담긴 상여를 장식한 화려한 꽃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고 있자니 개인적인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에서도 손자와 할머니의 관계가 등장한다. 열두 살 소년 미구엘(앤서니 곤잘레스 목소리 출연)은 가족이 대대로 신발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돕고 있다. 신발 장인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미구엘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엘 마리아치 El Mariachi’를 꿈꾼다. 그래서 기타라도 잡으려 하면 핏대부터 세우는 할머니가 음악과 얽힌 이 집안의 저주를 음악(?)처럼 읊어댄다. 이놈의 자식아 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그러니까, 고조할아버지!)가 음악 한다고 나갔다가 아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서 고조 할머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다시 한번 기타에 손댔다가는 손모가지를 잘라버릴 줄 알아!
이에 발끈! 하기는커녕 고조할아버지가 뮤지션이었다면 나 역시 음악에 재능이 있어, 믿어 의심치 않는 미구엘은 이참에 음악 경연 대회에 나가려고 결심한다. 그랬다가 이를 눈치챈 할머니가 기타를 부수는 바람에 다른 수를 생각해낸다. 멕시코의 전설적인 뮤지션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벤자민 브랫)의 봉안당에 침입해 전시해 놓은 기타를 훔치는 것. 그날은 마침 죽은 자가 하루 동안 산 자의 세계로 돌아온다는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 Dia de Muertos’이다. 그래서일까, 기타에 몰래 손을 대는 순간, 미구엘은 산 자의 몸으로 죽은 자와 대면하게 된다.
‘죽은 자의 날’은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멕시코의 대표적인 기념일이다. <코코> 이전 죽은 자의 날을 인상 깊은 배경으로 활용한 영화는 <007 스펙터>(2015)이었다. 제임스 본드(다니엘 크레이그)가 멕시코로 은신한 테러범을 잡겠다며 해골 분장과 장신구와 모형으로 무장한 대규모 인파 속을 동분서주하는 영화의 오프닝은 압도적인 볼거리 그 이상이었다. 살아있는(?) 해골들이 대낮의 광장을 가득 채운 것도 그렇거니와 죽음을 축제로 즐긴다는 의식은 적어도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죽음은 끝이고, 슬픔이고, 어둠이고, 부정적인 그 무엇이 아니었던가.
영화 <코코>의 한 장면
미구엘이 향하는 죽은 자들의 세상은 길부터가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중국에서나 가능할 법한 스케일로 금잔화를 잔뜩 모아 만든 아치형의 다리는 황홀경의 환각을 제공한다. 그 앞에 펼쳐진 도시 단위로 놀이공원을 조성한 것 같은 풍경은 산 자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쏙 빼앗아갈 정도로 근사하다. 그렇더라도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는 금잔화 다리만큼의 경계가 있는 법. 죽은 자의 세상에 산 자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단 하루뿐이라 미구엘은 이승에 나가 기타를 쳐도 좋다는 조상의 축복을 받아야만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 반면 조상의 입장에서 손주의 방문이 반가워도 죽음(?)보다 싫은 게 음악인지라 미구엘이 엘 마리아치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축복을 내리기 난감하다.
이때 미구엘의 머릿속에서 번쩍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음악이 좋아 가문을 등진 고조할아버지라면 자신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해 생전 만나본 적 없는 그를 찾아 나선다. 이 대목에서 그동안 픽사의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보아왔던 팬이라면 기대하게 되는 이야기의 흐름이 있다. 미구엘의 결정을 만류할 것이 뻔한 고조 할머니가 이승에서 헤어졌던 고조 할아버지를 죽은 자의 세상에서 만나 그간의 사정을 듣고 극적으로 화해에 이르는 픽사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 말이다.
픽사는 서로 어울려 보이지 않거나 반목하는 개념 또는 대상을 통섭하는 데 특출한 재능으로 주목받아왔다.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라는 첨단의 기술력으로 관객의 눈을 현혹하면서도 가족애와 우정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며 마음마저 적셔왔다.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카우보이 장난감과 미래형의 우주인 장난감이 우정을 나눴고(<토이 스토리> 시리즈), 시속 300km를 넘나드는 경주용 자동차가 느리게 사는 삶을 찬양했으며(<카> 시리즈) 아내와 사별한 백인 할아버지와 부모의 사랑이 절실한 손자뻘의 아시아인이 대안 가족을 이뤘다(<업>). 그리고 <코코> 에서는 대척점에 서 있을 것만 같은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서 만난다.
이의 특징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화합’이다. 픽사 애니메이션의 가치는 화합에 있다.<코코> 에서는 삶과 죽음이 화합한다. 영화가 주는 위안이다.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서두에서 언급한 나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3년을 더 사시다가 장례식을 치르셨다. 할머니 때와 다르게 가족들은 크게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원망의 감정이 더 컸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도 할머니 때처럼 꽃상여를 타셨고 그 옆 무덤에 나란히 묻히셨다. 그때 누가 한숨 비슷한 걸 내쉬면서 그랬다. 저쪽에서는 서로 보살피면서 사세요. 이어서 누가 또 말했다. 할아버지가 할머니 많이 도와줘야 해요. 그런 의미일 게다. 한국에서는 매년 죽은 가족을, 조상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멕시코에서는 죽은 자의 날을 따로 정해 기념하는 것 말이다.
<코코> 의 주제곡은 <기억해 줘 Remember Me>다. 이 노래 가사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기억해 줘 지금 떠나가지만/ 기억해 줘 제발 혼자 울지마/ 몸은 저 멀리 있어도 내 맘은 니 곁에/ 매일 밤마다 와서 조용히 노래해줄게’ 죽은 자는 기억을 부르고 산 자는 망각을 경계한다. 죽은 자의 ‘기억해 줘’ 외침에 산 자는 ‘잊지 않겠다’고 답하는 게 죽은 자의 날이고 제사다. 내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꽃상여는 떠난 자와 남은 자를 이어주는 금잔화 꽃길이었고 무엇보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화합을 저승에서는 꼭 이뤄주기를 바라는 약속의 다리였다. <코코> 는 이를 축제로 노래하고 나는 새해의 다짐으로 마음속 깊이 새긴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