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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에 놀러 갔다
영화 <패터슨>, <조용한 열정>
이틀간 연이어 시인의 집에 놀러 갔다. 영화 <패터슨>과 <조용한 열정>을 보았던 것이다. 뉴저지 주 패터슨네는 막 퇴근한 패터슨과 독특한 문양의 커튼을 살짝 열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커피와 파이를 나누고 가만히 하루를 이야기한 느낌이었다. (2017. 12. 28.)
영화 <패터슨>의 한 장면
우리 집 침실에는 시집들이 꽂혀 있다. 시집과 한 공간에서 자고 깨어나는 생활이 지속되면 조금이나마 ‘시적인 삶’에 가까워질까 싶어서 마련한 책장이었다. 시적인 삶! 주어진 나날의 과업을 완수하며 익숙해진 습관과 무감각 때문에 삶의 여린 아름다움, 새로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직동 조은 시인네, 해방촌의 황인숙 시인네를 자주 들락거리던 때가 있었다. 내게는 시인의 집에 대한 특별한 향수가 있다. 일상이 지나간 막막한 자리에서 시의 씨앗이 싹트는 공간. 아무리 평범해 보여도 나는 시적인 자국, 독특한 냄새를 맡으려고 두리번거리곤 했다.
이틀간 연이어 시인의 집에 놀러 갔다. 영화 <패터슨>과 <조용한 열정>을 보았던 것이다. 뉴저지 주 패터슨네는 막 퇴근한 패터슨과 독특한 문양의 커튼을 살짝 열고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커피와 파이를 나누고 가만히 하루를 이야기한 느낌이었다. 버스를 운전하며 보았던 만화경 같은 거리며 아무도 해하지 않던 승객들의 소소한 잡담들을 공유하면서 무얼 새롭게 알게 되었는지 속삭인 뒤, 저녁 산책을 기다리는 불도그 마빈의 눈치를 보며 아쉬운 듯 헤어질 때 그 평화로움 같은 것. 시 쓰는 패터슨은 예술가적 고집이나 광기가 전혀 없었다. 그에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반짝이는 시가 될 수 있고 어떤 사람도 시심의 대상이 되는 듯 보였다. 시인 패터슨이 세속의 패터슨을 정화한다고나 할까.
영화 <조용한 열정>의 한 장면
패터슨이 길가에서 만난 시 쓰는 소녀와 에밀리 디킨슨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조용한 열정>의 에밀리 디킨슨네에 놀러 갔다.
현재 박물관이 되어 관광객을 맞기까지 할 정도로 잘 재현되었다는 1800년대 매사추세츠 주의 시인 에밀리네 이층집은 상류층 집안의 품격이 있었다. 변호사이며 연방 의원이기도 한 아버지의 막강한 권력 아래 세상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폐쇄된 집이 아니었기에 세상의 소식이 흘러들어왔다 나갔다. 어머니는 병약한 편이었으나 자애로웠고 가족끼리 화목했다. 그들은 종교와 문학, 노예제도와 전쟁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했다.
당대의 미혼 여성들의 주된 생활인 교회와 산책, 무도회와 음악회, 바느질 등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에밀리는 어떤 억압에도 복종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실천한다. “영혼은 제 것이에요”라는 선언으로 종교적 억압에서 일찍이 벗어난 그녀였다. ‘신에게 구원받기도 원하지 않고 속죄할 마음이 느껴지질 않는다’는 이유로 2학기 만에 기숙학교에서 집으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정신적 지지자였던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잠시 사랑을 느꼈던 목사도 친구도 멀리 떠나자 마침내 에밀리는 스스로 유폐한다. 집 밖으로 나서지 않고 홀로 매일 한 편씩 시를 쓰면서 살아가는 생활를 자처한다. 은둔자로서 에밀리는 영원, 고독, 죽음을 사색하는 지적이고 간결한 시들을 썼다.
55세에 죽기까지 2000편의 시를 남겼던 시인은 살아서 7편 정도밖에 발표할 수 없었다. 당대엔 그 시조차도 독특한 기호와 운율의 파격으로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채.
에밀리네에서 나는 모든 삶의 우위에 시를 놓아둔, 시밖에 몰랐고 시에 모든 생애를 내걸었던 시인의 결기에 오한이 일었다. 당시 치료약이 없던 신장염으로 경련이 일어난 뒤 시로써 냉정하게 자신을 다독이는 시인, 삶 전체가 시였던 너무 놀라운 존재를 그저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패터슨>과 <조용한 열정>의 화면에는 시가 자막처럼 흐른다. 번역 자막의 삽입으로 편집이 엉성한 시집처럼 느껴졌다. 그 아쉬움을 시집 <고독은 잴 수 없는 것>으로 풀었다.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전문).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배우 신시아 닉슨이 투영되었다. 열정적인 연기에 음악은 찰스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숙연하고 황홀했다.
다시 시인의 집에 놀러 가고 싶다. 평화롭든 경이롭든, 시의 손님을 어루만지는 그 손길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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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