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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에 대한 오해, 재판이란 무엇인가? (2)
『사회, 법정에 서다』 연재
법학에 대한 오해, 재판이란 무엇인가? (1) 에서 이어진 내용입니다. (2017.10.26)
두 번째로 박일진은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할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부담하지 않습니다. 민법 제753조는 미성년자가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 그 행위의 책임을 분별할 지능이 없을 때 배상의 책임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은 일반적으로 책임 능력이 없다고 봅니다. 법원이 박일진의 책임 능력을 부정하는 것은 박일진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김철수의 부모를 보호하기 위해서죠. 박일진의 책임 능력이 부정되면, 박일진의 행위로 인한 책임은 박일진의 감독 의무자, 즉 박일진의 부모가 대신해서 부담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은 재산이 없습니다. 그래서 박일진에게 손해배상을 명하는 판결이 선고되더라도, 김철수의 부모는 실질적인 배상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죠. 민법 제755조는 미성년자의 책임 능력이 부정되는 경우, 이를 감독할 부모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합니다. 법원은 배상 능력이 없는 미성년자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가 구제를 못 받는 결과를 막기 위해, 가능한 한 책임 능력을 갖추는 연령을 올려 가해자의 책임 능력을 부정하고 그 감독자인 부모에게 배상책임을 부담시킵니다. 결국 박일진의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은 모두 박일진의 부모가 부담하게 됩니다.
최이진은 어떨까요? 최이진은 사실은 김철수를 괴롭힌 사실이 없고, 오히려 박일진의 폭행을 소극적이나마 막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김철수는 박일진이 무서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이지, 최이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죠. 하지만 김철수가 이 세상에 없는 이상 그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줄 사람은 없습니다.
명쾌한 판사는 최이진의 주장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박일진이 거짓말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명쾌한 판사는 같은 반 친구인 이영희를 증인으로 불러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이영희는 박일진과 최이진은 반에서 단짝 친구인데, 박일진, 최이진, 김철수가 함께 화장실로 갔다가 돌아올 때면 김철수의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고, 돌아올 때 박일진과 최이진이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명쾌한 판사는 최이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박일진의 부모님과 최이진의 부모님이 각각 김철수의 부모님에게 5억 원을 배상하라고 선고했어요. 박일진의 부모님은 항소를 포기했지만, 최이진의 부모님은 최이진의 말을 믿고 항소했죠. 하지만 항소심에서도 항소 기각 판결이 선고되었고,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상고 기각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 사례3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법과 정의를 상징하는 서구적인 이미지의 정의의 여신을 한국적인 느낌으로 재형상화한 것이다. 한 손에는 저울을 높이 들고 또 다른 손에는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판결문에 “박일진과 최이진은 함께 화장실에서 김철수를 폭행하는 등 장기간 괴롭혔고, 이로 인해 김철수가 사망한 사실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박일진과 최이진의 부모는 김철수의 부모에게 각각 5억 원을 배상할 의무가 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최이진의 부모님은 ‘맞아. 최이진이 김철수를 때렸을 거야. 하나밖에 없는 집을 팔고,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노숙 생활을 하게 되더라도 5억 원을 지급해야지’라고 생각할까요? 최이진 역시 ‘판결문에서 내가 때렸다고 하니 때린 거야’라고 생각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최이진은 끝까지 자신은 때리지 않았다고 주장할 거예요. 김철수의 부모님은 최이진을 끝까지 거짓말하는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할 거고요. 이 상황을 두고 분쟁이 해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재판을 통해 분쟁이 해결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확정판결은 강제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정의의 여신인 ‘디케’가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거예요(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습니다). 칼은 판결이 확정되면 강제집행을 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최이진의 부모가 판결 내용에 승복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김철수의 부모는 확정된 판결문을 가지고 최이진 부모의 재산을 강제집행할 수 있습니다.
최이진 부모가 소유한 집이 있다면, 최이진과 가족들을 그 집에서 쫓아내고 경매에 붙여 매각 대금을 받을 수 있죠. 나아가 최이진 부모의 소중한 물건들, 예를 들어 대형 텔레비전, 자동차 등을 빼앗은 뒤 경매에 붙여 매각 대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최이진의 부모가 아무리 판결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판결이 잘못된 경우라도 강제집행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재판으로 인해 분쟁이 해결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둘째, 기판력 때문입니다. 기판력은 확정된 재판의 판단 내용이 다시 소송의 대상이 되어도, 이미 그 내용이 당사자와 다른 법원을 구속해 앞선 재판 내용에 모순되는 판단이나 주장을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최이진의 부모는 이미 확정판결을 받았으므로, 그들이 김철수의 부모를 상대로 5억 원을 줄 의무가 없다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법원은 기존의 판결에 구속되어 최이진의 부모에게 패소 판결을 선고하게 됩니다. 심지어 이 사건을 맡은 판사가 이전 판결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기존 판결과 다른 판결을 할 수 없습니다.
분쟁 해결, 그리고 재심의 기준
최이진의 가족은 살던 집에서 쫓겨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최이진은 다른 학교로 강제 전학 조치되었고, 최이진의 부모는 평생 모은 재산으로 장만한 집을 빼앗겼죠. 최이진은 자기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지만, 설사 일부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 세상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학교에서 김철수의 일기가 발견되었다는 전화였죠.
그 일기에는 최이진이 선생님께서 오신다는 거짓말로 자신을 보호해주고 있다는 내용과 오로지 박일진 때문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최이진은 자신의 무고함을 밝힐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습니다. 최이진의 부모는 이전 확정판결에 대해 재심의 소를 제기했습니다. - 사례4
‘재심’이란 이미 확정된 판결에 대해 사건을 재심리해서 판결의 취소나 변경을 요청하는 불복 신청을 의미합니다. 최이진의 부모는 김철수의 일기장을 증거로 삼아 구제받을 수 있을까요? 최이진의 부모가 다시 김철수를 상대로 소를 제기하여, 이전 소송에서 확정된 법률관계에 대해 다툴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할까요?
먼저 김철수의 사건을 넓은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재판은 세금으로 유지되는 제도입니다. 재판을 하는 데는 인적?물적 한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죠. 진실을 밝히겠다고 언제까지 재판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판사가 많으면 더 충실한 심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판사 1명이 1개월에 1건씩만 사건을 진행하면 당연히 충실한 심리가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2013년 기준, 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636만 건으로, 본안 사건(본안 사건-주로 가압류나 가처분, 약식 사건 등을 제외한 민사ㆍ가사ㆍ행정ㆍ특허ㆍ형사 사건을 일컫는다)만 138만 건이었습니다. 판사 1인당 1본안 사건을 기준으로 해도 1년에 약 505건의 사건을 처리해야 하죠. 물론 판사를 많이 뽑는 등 사법부의 인적?물적 자원을 늘리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하려면 반드시 세금이 투입되어야 하므로 다른 곳, 예를 들어 학교를 짓거나 무상 보육에 필요한 예산 등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사법부의 업무 부담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찰, 소방관 등도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사법부에만 무작정 예산을 많이 주라고 요청하기도 어렵죠. 그리고 사건을 충실하게 오래 심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큰 비용이 따릅니다. 어떤 사건에 어느 정도의 예산을 투입할 것인지는 아주 어려운 문제예요.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 사건을 오랫동안, 여러 번 심리하는 것도 당사자에게 좋은 일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이혼 사건에서 누가 잘못했는지 명백히 가리기 위해 심리가 20~30년 동안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세요. 29세에 결혼해서 30세에 이혼 청구를 했는데, 60세가 되어서야 법원에서 이혼하라는 판결이 선고된다면 당사자에게 너무 큰 고통입니다. 비록 판결이 결론적으로 옳다고 해도 말이죠.
다시 심리하는 것은 오래 심리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영희가 김갑돌이 바람을 피웠다며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이혼 판결을 받았는데, 10년 뒤 김갑돌이 바람을 피우지 않은 증거가 있다며 재심을 청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아가 법원이 기존의 판결은 잘못되었다며 이혼 판결을 취소하면? 새로운 가정이 풍비박산날 수도 있고, 당사자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더 이상 그 사건에 대해 다툴 수 없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법은 판결이 확정되면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다투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설사 판결이 진실에 어긋나고 잘못되었다고 해도 말이죠. 실제로 앞의 <사례 4>에서 본 사유만으로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 재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정의에 어긋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례에 등장한 소송에서, 최이진 때문에 살기 힘들다는 내용이 기재된 김철수의 유서가 존재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유서는 김철수가 박일진, 최이진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다고 믿은 김철수의 부모가 위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때도 최이진이 재심을 청구하지 못할까요?
민사소송법은 법이 정한 특정 사유가 있을 경우에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판결의 증거가 된 서류가 위조되었을 경우, 증인이 위증을 했을 경우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나오면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사유가 되죠. 반면 형사소송법은 재심사유를 더 넓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형사소송법은 민사소송법과 달리 실체적 진실 발견이 주된 목적입니다. 민사소송에서는 분쟁의 종결이 진실의 발견 못지않게 중요한 가치이지만, 형사소송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형사소송법은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의 무죄를 증명할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었을 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결론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판결, 소송 절차가 더욱 중요하죠. 잘못된 판결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시 심리하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기판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최이진뿐 아니라 최이진의 자녀들이 대를 이어서 소송을 이어갈 수도 있어요. 이 같은 결과는 절대 바람직하지 않죠. 당연히 어떤 경우에도 확정된 판결을 다시 심리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옳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외적인 사유를 규정할 필요가 있죠. 문제는 예외를 넓힐지 좁힐지, 나아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유가 있을 때 이미 확정된 판결을 부정하고 다시 심리를 허용해 줄지 여부입니다.
이제 ‘재판은 분쟁을 해결한다’는 의미가 이해되셨죠? 이번 기회를 통해 재판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사회, 법정에 서다허승 저 | 궁리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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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사회, 법정에 서다, 허승 판사, 법학,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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