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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묘약

『이지원 피디의 누구나 한번쯤 스페인』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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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으로 공사 중인 바르셀로나의 여름은 점점 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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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이탈리아의 명(名)바리톤 레나토 부르손의 풍성한 저음이
오페라 리골레토의 <사랑의 묘약>을 노래하기 시작한다.


개가 낮게 그르릉거리나 싶더니
어디선가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


조금씩 들리던 소리가
점차 규칙적으로 나더니 점점 더 빨라진다.


성악가의 아리아는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옆방의 소리도 클라이맥스로 향한다.


탄성. 나지막한 대화 소리 잠깐. 그리고 욕실로 향하는 발소리.

 

이사 온 첫날, 페루식 가정식을 대접해줬던 친절한 대붓 꽁지 에스키엘의 방에서 셔츠 한 장만 걸친 초콜릿색 여인이 나왔다. 뒤이어 반라 상태로 등장한 에스키엘. 나를 보고 놀라지도 않고 싱긋 웃으며 “헤이!” 하고선 쿨하게 여자를 따라 욕실로 직행했다. 그의 방엔 여자가 데려온 개 한 마리만이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엎드려 있었다.


에스키엘.


구릿빛 피부에 치렁치렁 흑단 같은 머리.
일어나자마자 오페라를 들으며
낭만적인 유화를 그리러 나갔다가
매일 밤 다른 여자와 들어오는
천하의 사랑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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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좋은데. 묵직한 중저음 보이스만큼 진중한 성격에 깔끔한 매너, 상대에 대한 배려까지 다 갖췄는데.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매일같이 등장 인물이 바뀌는 에로무비를 찍으니 옆방 세입자로서 애로사항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천장은 높아서 공명도 잘 되는 집에 벽은 또 왜 그렇게 종잇장처럼 얇은지. 어쩌다 한 번이면 그러려니 할 텐데 거의 밤마다 잠을 재우질 않으니 다음 날 학교를 가야 하는 내겐 웃지 못할 고문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셰어하우스의 또 다른 매력(?)을 여실히 체험했던 집이었다.


새벽 4시, 또다시 울려 퍼지는 오페라. 어느덧 나는, 덩달아 잠 못 이루는 슬픈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있었다….


건물 안쪽 뜰에선 드릴로 바닥을 부수는 공사가 한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1층에 커다란 레스토랑을 개축하는 공사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집 주인 이반은 일언반구 얘기해주지 않았었다. 지적을 하자 그제야 곧 끝날 거라고 얼버무리는데 딱 봐도 석 달은 끌 공사였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살다 보니 집 상태가 심각했다. 아틀리에처럼 쓰면서 청소를 거의 하지 않아 먼지가 수북한 데다 축축한 매트리스에선 베드버그도 들끓는 것 같았다. 다 치워 놓을 테니 걱정 말라던 약속도 공염불이었다.


바르셀로나의 한여름은 찜통처럼 뜨거운데, 공사판 먼지와 소음을 피해 창문을 닫자니 쪄서 죽을 것 같았고 창문을 열었더니 이번엔 모기가 득실득실 꼬였다.


낮엔 드릴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
밤엔 벽 너머 아리아에 트라우마.
내 사연을 듣고 데비가 깔깔대며 문자를 보내왔다.


“Out of the frying pan and into the fire.”


“프라이팬에서 뛰쳐나가더니 아예 불구덩이로 떨어졌네?ㅋㅋ”


밤낮으로 공사 중인 바르셀로나의 여름은
점점 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지원 피디의 누구나 한번쯤 스페인이지원 저 | 중앙북스(books)
일반 관광객이 아닌 학생이자 생활자의 신분으로 낯설고 매력적인 스페인의 여러 도시를 포함해 인근 나라의 도시들을 날카로운 피디의 눈과 낭만적 가슴으로 때론 담백하게, 때론 치열하게 탐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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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이지원(PD)

예능 피디, 작사가, 작가. 지금껏 6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언론정보학과를 거쳐 2000년 SBS 예능국 피디로 입사했다. <유재석의 진실게임> <이효리의 체인지> <김정은의 초콜릿> <하하몽쇼> <정글의 법칙> <도시의 법칙> 등 수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했다. 다비치, 앤씨아 등의 작사가로도 활동했으며, 저서로 『이 PD의 뮤지컬 쇼쇼쇼』 등이 있다. facebook,instagram ID:@ez1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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