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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성가족 성당의 비밀
『이지원 피디의 누구나 한번쯤 스페인』 연재
건축 비용은 순전히 기부금만으로 충당해 왔대. 그래서 오래 걸린 거겠지? 너무 더딘 거 아니냔 질문에 가우디는 또 이렇게 말했대. “내 고객은 급하지 않으세요.” 이 아저씨, 멘트가 좋은 게 예능감 있는 분인데? (2017.09.18)
10년 안에 공사가 끝날 거라고?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스페인어로 ‘성스러운 가족’이라는 뜻이야. 줄여서 성가족 성당. 이 성당엔 ‘탄생’, ‘수난’, ‘영광’이라고 이름 붙은 총 3개의 파사드, 쉽게 말해 문이 있어. 예수님이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돌아가셨고 어떻게 승천했는지에 대한 인생 풀 스토리, 한마디로 다큐멘터리 인간극장 예수편인 거지. 지금까지 지어진 건 동쪽의 탄생과 서쪽의 수난 둘뿐이고, 남쪽의 영광 파사드는 아직 건축 중이야.
뾰족하게 솟은 거대 죽순탑은 모두 18개야. 8개밖에 못 본 것 같다고? 그럴 수밖에. 아직 다 못 지었거든. 12사도와 4복음서 저자(마태, 마가, 누가, 요한), 성모 마리아, 그리고 중앙의 예수탑까지 다 세우고 나면 정말 엄청날 거야. 완공될 예수탑의 높이가 170m인 건 알지? 171m인 서쪽의 몬주익 언덕보다 딱 1m 낮게 설계한 거라잖아. “인간의 창조물이 신의 창조물보다 높을 순 없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가우디의 굳은 의지였다고.
아참, 그러고 보니 가우디 얘기를 제대로 안 했네? 뭐,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대충은 알잖아.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년에 태어나서 1926년에 죽었고. 구엘 공원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까지 여행객 십중팔구는 이 사람 때문에 바르셀로나를 찾는다는. 중요한 건, 이분이 엄청난 자연주의자라는 점이야. 쭉쭉 뻗은 나무들, 가지마다 매달린 벌집, 빨갛게 탐스러운 산딸기, 빙글빙글 소라 모양 나선 계단까지 성당 안은 무슨 밀림 속 같아. 도처에 나비랑 새가 날아다니고, 기둥 밑엔 거북이가 깔려 있질 않나, 어떤 건 살 잘 발라먹은 멧돼지 등뼈처럼 보이는 게 <정글의 법칙>을 찍어도 되겠더라고.
“창조는 신이 하고 인간은 오직 발견하는 겁니다.”라고 말했던 가우디는 진짜 자연을 사랑했나 봐.
건축 비용은 순전히 기부금만으로 충당해 왔대. 그래서 오래 걸린 거겠지? 너무 더딘 거 아니냔 질문에 가우디는 또 이렇게 말했대. “내 고객은 급하지 않으세요.” 이 아저씨, 멘트가 좋은 게 예능감 있는 분인데?
세월아 네월아 하는 것 같지만 정부에선 2026년에 완공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어. 가우디가 죽은 지 딱 100년째 되는 해거든. 앞으로 채 10년도 안 남은 건데 과연 가능할까? 요샌 입장료 수입도 건축에 투입된다고 하니 사람들이 많이 찾는 만큼 더 빨리 지어질지도 모르지.
모두 다 가우디 작품일까?
영화 <다빈치코드>를 보면 로버트 랭던 교수가 푸는 크립텍스란 암호가 나오지. A부터 Z까지 알파벳 다섯 글자로 만든 비밀 금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에도 이런 추리소설 같은 퍼즐이 숨어 있어.
기둥에 묶여 채찍질을 당하는 그리스도의 조각이 있는 수난 파사드에 가면 빙고게임처럼 숫자가 가득한 네모난 표를 발견하게 될 거야. 루빅스 큐브 같기도 하고 마방진처럼도 생겼지. 무작위로 적힌 숫자들 같지만 설마 그렇겠어?
가로 첫줄의 숫자들을 한번 더해볼까?
1 14 14 4=33
이번엔 세로로 첫줄을 더해볼까?
1 11 8 13=33
그렇다면 대각선은?
1 7 10 15=33
어떻게 숫자 4개를 더해도 그 합은 항상 33이 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의 나이를 뜻하지.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쳐. 근데 미치는 건 이렇게 33을 만드는 조합이 무려 스물여섯 가지가 나온단 거야! 말만 들어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그렇담 하나 더.
숫자들을 자세히 보면 유독 10과 14만 두 번씩 나와. 왜일까? 크리스천이라면 알 텐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조롱하는 의미로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라는 뜻의 라틴어 ‘INRI’라는 팻말을 같이 달았어. 이 I. N. R. I라는 네 철자의 알파벳 순서를 더하면 48이 나오거든? 근데 마방진 안에서 두 번씩 반복되는 숫자 10 10 14 14을 더해도 똑같이 48이 나오게 만든 거야. 즉, 동시에 두 가지 다른 상징을 한 틀 안에 숨겨놓은 거지. 정말 대단하지 않아? 나만 재밌는 거야?
중요한 건 이걸 만든 사람이 가우디가 아니라 조셉 마리아 수비락스(Josep Maria Subirachs)라는 이 동네 출신의 다른 조각가라는 거야(인터넷엔 다들 ‘수비라치’라고 하던데 까딸루냐 현지 친구들한테 물어봤더니 저렇게 발음하더라고). 이름에도 어쩜 예수님 아빠랑 엄마가 다 들어가 있는 게 왠지 수상하지?
이 사람, 작품 세계도 아주 독특해. 수난 파사드 옆에 수의에 찍힌 그리스도의 얼굴을 오목거울처럼 조각한 부조가 있는데 보는 사람에 따라 시선이 180도로 따라다녀. 이 아저씨의 독특한 작품은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있어.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에 가면 <하늘 기둥>이라는 거대한 돌덩이가 있거든?
88올림픽 때 이 아저씨가 갖다 놓은 작품이야.
그럼 왜 가우디가 아니라 수비락스가 맡게 됐을까? 사실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꾸준히 만들어져온 게 아니야. 스페인 내전 때처럼 공사가 중단된 시기도 있었고, 심지어 계속 짓지 말자는 의견도 많았어. 철근 콘크리트를 쓰면서까지 가우디의 오리지널 디자인과 다른 성당을 꼭 완성시킬 필요가 있냐는 거였지.
2000년 전 밀로의 비너스가 두 팔이 떨어진 채 발굴됐다고 해서 마네킹 팔을 갖다 붙이는 거랑 같은 얘기라며 찬반 의견이 팽팽히 대립하던 끝에 1987년 재시공의 책임을 맡게 된 사람이 수비락스였던 거야. 백년 세월의 때가 묻은 가우디의 탄생 파사드와 직선이 강조된 수비락스의 수난 파사드가 느낌이 영 다른 건 당연한 거지.
관련태그: 성가족 성당, 사그라다 파밀리아, 스페인, 가우디
예능 피디, 작사가, 작가. 지금껏 60개국 이상을 여행했다.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언론정보학과를 거쳐 2000년 SBS 예능국 피디로 입사했다. <유재석의 진실게임> <이효리의 체인지> <김정은의 초콜릿> <하하몽쇼> <정글의 법칙> <도시의 법칙> 등 수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기획, 연출했다. 다비치, 앤씨아 등의 작사가로도 활동했으며, 저서로 『이 PD의 뮤지컬 쇼쇼쇼』 등이 있다. facebook,instagram ID:@ez1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