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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는 점점 우리의 예상과 짐작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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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은 대대로 감투라면 몸서리를 치는 편이다. 그건 마누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는 저주와도 같은 집안 내력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물리치고만 것이다. 마누라는 대뜸 말했다. (201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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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2학기 학급회장이 됐다. 요즘에는 ‘반장’이라는 말 대신 ‘회장’이라는 말을 쓰던데, 아무튼 애는 공정한 선거를 통해 무려 과반수의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다. 평소에 애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억울함을 호소할 때가 많았다. 친구들이 맨날 자기만 술래를 시킨다며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적도 더러 있었다. 그런데 눈물은 대체 왜 콧물과 함께 흐르는 걸까. 애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코로 눈물을 흘리는 건지 눈으로 콧물을 흘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알 수 없는 끈적한 범벅을 급한 마음에 맨손으로 부리나케 닦아주곤 했다. 그랬던 애가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닌데 학급회장 선거에 나섰고, 심지어 당선까지 됐다니. 애도 꽤 어리둥절했던 모양이다. 모처럼 용기를 내 학급회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지긴 했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고 한다. “남녀차별을 없애겠다”가 자신의 주요 공약이었다나 뭐라나.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참고로 애는 지난 대선에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었다. 물론 애는 페미니스트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


어쨌든 애는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룬 셈이다. 외할아버지는 한때 기필코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바꾸겠노라 분연히 정치판에 뛰어들었으나...(중략)...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인천의 오성극장 앞에서 찐만두를 팔기 시작했고...(중략)...줄을 잘못 서 공천에서 탈락한 외할버지에게는 환멸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안을 통틀어 선출직에 당선된 사례가 애가 처음은 아니다. 첫 번째 당선자는 약 27년 전의 나였다. 당시의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나는 내가 반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나는 일찌감치 나의 운명을 예감했었다. 일생을 똥걸레(당시에는 하찮은 존재들을 ‘똥걸레’라고 불렀다.)로 살 팔자였는데, 그런 내가 반장까지 됐던 건 뜻밖의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담임선생님의 선거개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담임선생님은 칠레의 쿠데타를 몰래 거들었던 미국의 CIA처럼, 혹은 지지난 대선에서 댓글로 여론을 조작했던 국정원처럼 반장선거에 개입했고, 내가 자신의 꼭두각시가 되길 바랐다. 담임선생님이 굳이 나를 유력한 반장 후보로 지목했던 까닭은, 같은 반 친구들 중에서 배치고사 성적이 가장 우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똥걸레의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의 음모로 반장이 되긴 했지만, 반장이라면 응당 했어야 할 일들에는 젬병이었다. 가령 수업시간에 떠드는 친구들을 단속하거나 농땡이를 피우는 청소 당번들을 담임선생님께 일러바치거나 교실 안의 갈등을 중재하는 일들은 내 깜냥 밖이었다. 또 어머니는 내가 반장이 된 기념으로 교실에 새 커튼을 달아주거나 부레옥잠 화분을 사온 적도 없었다. 말하자면 나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반장이었고, 어머니는 그 무능한 반장의 무너진 이미지를 수습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결국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나는 탄핵됐다. ‘탄핵’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나는 왜관중학교 사상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학급회의)를 통해 임기 중에 탄핵된 반장이었다. 지난봄, 오랜 기다림 끝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드디어 파면됐을 무렵 생일을 맞은 아이처럼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좀 짠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공부를 잘해서 팔자에 없던 반장까지 해봤다는 얘기는 아닌데, 혹시 재수없었다면 죄송합니다.

 

이처럼 우리 집안은 대대로 감투라면 몸서리를 치는 편이다. 그건 마누라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는 저주와도 같은 집안 내력을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물리치고만 것이다. 마누라는 대뜸 말했다.

 

“내 자식이 아닌 것 같애.”

 

나는 마누라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마누라와 나는 애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한 만큼 애를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는 우리가 뻔히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혹은 우리가 눈을 깜빡이는 그 잠깐 동안에도 쉬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커가고 있었다. 몇 달 전 학교폭력 사건에 휘말렸을 때도, 또 이번에 학급회장이 되려고 친구들 앞에 나선 것도, 모두 예상 밖의 일들이다. 애는 점점 우리의 예상과 짐작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언젠가는 애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던 날들이 그리울 지도 모르겠다.

 

애는 임기가 고작 6개월짜리 학급회장이지만 앞으로 친구들의 모범이 되겠다고 했다.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했다. 친구들이 자기만 술래를 시키더라도 삐치지 않겠다고 했다. 숙제도 빼먹지 않겠다고 했고, 용돈도 아껴 쓰겠다고 했다. 개똥이(가명)가 욕을 하루에 열 번씩 쓸 때도 따라 하지 않고 최대한 참아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친구들의 모범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애는 학급회장이 된 이튿날부터 지각을 했고, 오늘도 지각을 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아무리 전지전능한 자리라고 해도 세상에는 억지로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아이를 향한 부모의 기대나 바람이 그 아이에게는 종종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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