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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되고, 나는 왜 안 되는데?
아무도 죽지 않는 싱거운 결말
나는 사실 마누라의 만화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마누라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도 한몫 했겠지만,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일종의 무의식이 작동한다고 해야 할까. (2017.08.09)
마누라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만화를 한 편 연재 중이다. 본격 픽업 스릴러 <비 오는 날>이라고, 말 그대로 비 오는 날 애를 데리러 가는 내용이다. 애는 미국에 사는 처형 집 근처 여름캠프에 참여 중이고, 마누라는 애를 데리러 가는 길에 폭우를 만난다. 그런데 흠뻑 젖은 마누라 앞에 웬 트럭이 멈춰서고, 약간 험악하게 생긴 미국 남자가 마누라에게 목적지까지 태워주겠다고 하는데...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마누라의 페이스북(//facebook.com/aramsong81)을 참고하길 바란다.
나는 사실 마누라의 만화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마누라의 긴장감 넘치는 연출도 한몫 했겠지만,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일종의 무의식이 작동한다고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은 마누라가 그 트럭을 타지 않길 바랐다. 모두 마누라의 안전을 걱정했던 셈이다. 만약 마누라가 그 트럭을 타고 잘못됐다면, 그 얘기를 만화로 그릴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하긴, 나도 마누라의 만화를 보자마자 서둘러 마누라에게 메시지부터 보냈다. 다행히 별일은 없었고, 약간 험악하게 생긴 미국 남자는 오히려 친절하게 마누라를 목적지까지 태워줬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고, 그나저나 스포일러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람들과 나의 이 무의식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걸까.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 약자이므로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물리적 반작용인 걸까. 아니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공포영화들로 인한 우스꽝스러운 피해망상인 걸까.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단돈 79만 원으로 5년 동안 세계일주를 했던 권용인 씨와 페이스북 친구가 됐을 때였다. 나는 마누라에게 권용인 씨의 도전정신을 추켜세웠고, 마누라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남자니까 가능했겠지.”
마누라는 권용인 씨의 도전정신을 얕잡아 본 게 아니었다. 여자들이 권용인 씨처럼 ‘혼자’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도 세계는 여자들에게 그다지 안전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누군가는 마누라의 볼멘소리를 피해망상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2008년에 피파 바카라는 이탈리아 여성은 성선설을 몸소 증명하겠다며 유럽에서 중동까지 히치하이킹으로 무전여행을 떠났지만,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피파 바카는 여행을 떠난 지 3주만에 터키의 한 수풀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누군가 피파 바카를 강간한 뒤 살해했다고 한다. 물론 그 누군가는 낯선 남성이었을 테고.
여자들은 피파 바카처럼 비단 낯선 남성에게 강간을 당하거나 목숨을 위협받는 것만도 아니다. 로라 베이츠의 『일상 속의 성차별』(안진이 옮김)이라는 책에 의하면, 영국에서는 주당 평균 2명이 넘는 여성이 현재의 남자 친구, 남편이나 전 남자 친구, 전 남편에게 살해당한다고 한다.(콜먼과 오스본의 연구, 2010 / 영국 보건부, 2005) 또한 영국에서는 해마다 8만 5천 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한다고 한다.(영국 법무부 통계청, 2013) 『일상 속의 성차별』은 로라 베이츠라는 영국 여성이 자신을 둘러싼 일상 속의 무수한 성차별을 다른 여성도 겪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프로젝트였다.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여러 사례를 수집했는데, 삽시간에 전세계의 수많은 여성이 그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로라 베이츠는 그 여러 사례를 책으로 엮었고, 말하자면 『일상 속의 성차별』은 성차별에 관한 한 여성의 끈질긴 기록이자 동시에 여러 여성의 생존기다. 로라 베이츠에 의하면, 일상적인 성차별의 순간들을 기록하려고 시작했던 프로젝트는 시간이 갈수록 심각한 성범죄에 대한 증언이 잇따랐다고 한다. 요컨대 일상 속의 성차별은 이른바 여성혐오 범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실은 멀리 영국까지 갈 일도 아니다. 지난 6일에는 강남역에서 한 여성의 죽음을 애도하며 여성혐오 범죄를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났지만, 여성을 표적 삼는 강력 범죄와 데이트 폭력은 국내에서도 끊이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여성혐오 범죄의 원인과 대책에 관해 여러 논의가 오갔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우리가 분주하게 여성혐오 범죄의 원인을 찾고 대책을 세우는 동안 어떤 여성은 어두운 골목에서 마주친 낯선 남성에게, 혹은 자신의 남자 친구나 남편에게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 따위의 주장으로 성대결을 부추길 생각은 없다. 다만 여자들은 왜 안심하지 못하는 걸까. 웬만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은 여자를 강간하거나 죽이는 미친놈이 아니라며 억울해하는데 말이다. 여자들은 왜 권용인 씨처럼 무모해 보이는 세계일주를 꿈꾸기 어렵고, 친구들과 밤늦게 어울리면 부모님으로부터 어김없이 잔소리를 듣고, 술에 잔뜩 취한 날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는 마음 놓고 곯아떨어질 수 없는 걸까. 여자들은 왜 나처럼 일상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는 걸까.
“나에게 강간을 당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사회에 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강간을 당하더라도 별다른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그게 제일 나쁘다.”
로라 베이츠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여성의 말이다. 나는 이 여성의 좌절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여성이 아닌 나는, 어쩌면 <니모를 찾아서>라는 애니메이션에서 다른 물고기들을 잡아먹지 않기로 했지만 본성을 가까스로 참고 있는 상어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여성혐오 범죄를 두려워하는 여자들에게 아니, 최소한 마누라에게, 내가 때로는 굶주린 상어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상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길은 말이 아닌 행동뿐이라는 얘기다. 여성혐오 범죄를 멈추라는 여자들에게 나는 다른 물고기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소신 있는 상어라며 구태여 반박을 하거나 트집을 잡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한편 2012년에 로라 베이츠가 시작한 <일상 속의 성차별 프로젝트>는 지금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 프로젝트를 통해 한국의 여자들도 국경을 너머 전세계의 여자들과 연대할 수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 프로젝트가 계속되는 한, 지구상의 어디든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얘기일 테니까. 물론 내가 알기로 여자들은 여성을 각별히 위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마누라가 종종 하는 말을 빌리자면, 대부분의 여자들이 유사 이래 오랜 세월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건 오로지 이것뿐이다.
“너(남자)는 되고, 나(여자)는 왜 안 되는데?”
부디 마누라의 말을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마누라의 말은, 남자가 이따금 아무 여자를 죽인다고 해서 여자도 아무 남자를 죽이자는 얘기가 아니다. 마누라는 남자든 여자든 아무도 죽지 않는 싱거운 결말밖에 모른다. 여자도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는 얘기고, 거듭 말하지만 스포일러는 죄송합니다.
참, <일상 속의 성차별 프로젝트>는 아래의 주소를 통해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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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노>에 이런 대사가 나와요. “자기 생각을 일단 글로 쓰는 놈이야.” 영화 속 형사들이 발견한 살인범의 결정적 단서였는데, 제 얘긴 줄 알았지 뭡니까. 생각을 멈추지 못해 거의 중독 수준으로 글쓰기에 열중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주로 술을 먹습니다. 틈틈이 애랑 놀고 집안일도 합니다. 마누라와 사소한 일로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가끔 만화도 만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