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힘
굉음을 내며 깨져가는 세상을 책으로 읽을 수 있을까
책읽기는 책에 쓰여진 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 쓰여진 것을 통해 세상을 읽는 것 (2017.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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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책에 대해 회의(懷疑)한다. 회의하는 그 순간조차도 책을 팔고 있지만. 책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서는 한 점 의심을 품어본 적 없다. 내 의심이 향하는 곳은 책을 읽고 난 후의 before-after다. 이 많은 책들을 읽어낸 후 나는 어디로 얼마나 나아가게 될까, 세상은 보다 명료한 모습으로 내 눈에 비칠까 라는 의문.
인생과 세상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큰 지도를 떠올린다. 지도의 일부는 밝고, 대부분은 어둡다. 하루를 살아내고 책을 한 권 읽어가면서 어두운 부분들이 조금씩 밝게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읽은 책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만큼 지도가 차츰차츰 밝아질 거 같진 않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한다. 세상은 개개인의 인식이 닿는 곳 너머에서 일을 일으키고, 인식을 하려 책을 읽는 동안 세상은 시야 밖에서 또 새로운 일을 일으키고 있다. 내 지도의 어둠은 줄어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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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이란 소설을 읽고 있는데, 이제 막 시작한 터라 책에 대해 말을 하긴 이르지만, 이런 문장이 나와서 메모해두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게 1936년 1월 28일 아침 아르한겔스크 기차역, 바로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이 대답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어떤 날짜에 어떤 장소에서 시작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러 장소에서, 여러 시간에, 당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다른 나라들에서,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 줄리언 반스, 『시대의 소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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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달여 동안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있었다. 미국은 파리협정 이행중단을 선언했고, G20 정상회담에서도 혼자만의 길을 갔다. 유럽은 나토(NATO)가 아닌 EU차원의 군사협력 강화에 합의했다. 난민들의 관문인 이탈리아가 한계에 달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입장차도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 IS는 중국인도 겨냥하기 시작했고, 이란에서도 첫 테러를 일으켰다. 서구 중심으로 체계화되었던 질서는 이제 이제 주변부뿐 아니라 중심부에서도 깨지는 소리가 난다. 한 시대의 소음, 이라기 보다 굉음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이런 일들을 인식하고 싶어 책을 펼친다. 어쨌든 이런 일들은 이제 세상에 드러났으므로 누군가가 기사를 쓰고, 논문을 쓰고, 책을 쓰고, 내가 읽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여러 장소에서, 여러 시간에, 다른 나라와 다른 이들의 마음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일들, 언제가 하나의 사건으로 모습을 드러낼 일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건의 발생을 바라보고 꽁무니만 좇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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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출판사 대표님의 페이스북에서 발견한 책이 일본의 사회학자 오사와 마사치의 『책의 힘』이다.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 자기 삶의 전부라고 말하는 저자는 ‘생각하는 책읽기’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사회과학, 문학, 자연과학 분야의 명저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어가며, 독창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사고의 전개 과정을 차근차근 보여주기 때문에, 예시가 아주 많은 가이드북을 읽는 느낌이 든다. 독서의 효용을 높이는데 아주 구체적인 도움을 준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책읽기는 책에 쓰여진 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에 쓰여진 것을 통해 세상을 읽는 것이란 점을 새삼 일깨워 준다. 인간은 제한된 시간과 미약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저자의 책읽기를 보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이라 해서 ‘사고할 수 없는 일’이라 말하는 것은 핑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굉음을 내며 깨져가는 세상을 책으로 읽어갈 수 있겠다는 희망이 독서욕에 다시 불을 지핀다.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