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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독한 사랑쟁이들
주말에 소파에 누워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읽었다.
내 주변에는 <지독한 사랑>의 주인공들처럼 참 지독한 사랑쟁이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들은 사랑에 잘도 빠졌고 한 번 사랑을 시작하면 온 넋을 사랑에만 갖다 바쳤다.
영화 <지독한 사랑>을 처음 본 게 언제였는지는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그 무렵 밤마다 비디오데크에 철커덕 테이프를 밀어넣고 영화를 보았다. 곁에 누가 있었던가.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볼륨을 잔뜩 낮추었어도 대사를 다 따라 할 수도 있을 만큼 영화를 자주 보았던 터라 아무 상관없었다. 몇 년이 지나 나는 폐업 정리 중인 비디오 가게에서 <지독한 사랑> 테이프를 샀다. 그 후 비디오플레이어가 고장 나고, 더는 비디오플레이어 따위 팔지 않는 시절이 오고서야 나는 테이프를 버렸다. 아마 십 년도 더 지난 일이겠지만 다시 <지독한 사랑>을 본다 해도 절반쯤은 대사를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고 말고.
내 주변에는 <지독한 사랑>의 주인공들처럼 참 지독한 사랑쟁이들이 많고도 많았다. 그들은 사랑에 잘도 빠졌고 한 번 사랑을 시작하면 온 넋을 사랑에만 갖다 바쳤다.
L은 한 남자와 네 번이나 청첩장을 찍었다. 파혼을 한 번씩 할 때마다 그들은 서로를 죽일 듯이 비난하고 원망했지만 다시 사랑에 빠질 때엔 처음보다 더 깊고 깊었다. 이십대 초반에 연애를 시작했던 그들은 마흔 살이 넘어서야 네 번째 청첩장을 제대로 돌렸고 결혼을 했다.
S도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했다. 그녀가 한쪽 귀에만 구멍을 다섯 개나 뚫어 귀고리를 줄줄이 달고 나타났을 때 남자는 은색 귀고리 하나하나 입을 맞추며 그녀의 용기를 치하했다. 물론 남자의 몸무게가 90킬로그램을 돌파했을 때 S도 그의 두툼한 배에 뺨을 대며 (그것도 무려 사람들로 붐비는 낙지볶음집에서!) 폭신하기 짝이 없는 베개 같다며 좋아했으니 누가 더 깊은 사랑쟁이인가는 도저히 평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결혼 3주 만에 잠깐 위기를 겪기도 했다. S는 꽤나 심각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좀 지네 집에 가줬음 좋겠어. 왜 자꾸 우리 집에 오는 거지?” 결혼을 하면서 남자는 S가 살던 집으로 들어왔다. 오래 혼자 살아온 S는 아무리 사랑한들 3주 이상 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뭉개는 그가 버거워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전 결혼 10주년 파티를 했다. 여전한 사랑쟁이들이다.
Y는 날씬하고 예뻤다. 하지만 술만 마시면 라면을 네 개씩 끓여먹는 버릇이 있었다. Y를 사랑했던 남자는 Y가 민망해 할까봐 라면을 똑같이 먹는 습관을 들였다. 물론 네 개까지는 먹지 못했고 가장 많이 먹은 날이 세 개였다. 사랑쟁이들의 엔딩이 결혼일 리는 없다. 결혼까지 가 닿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사랑을 폄하할 순 없다. 그건 몹시 촌스러운 생각이다. Y와 남자는 헤어졌지만 간간이 마주칠 때면 서로의 어깨를 꼭 만져주곤 한다.
H는 호주 멜버른을 여행하다 맨발로 도시를 걷던 남자를 만났다. H는 서울에서 일하던 디자이너였고 남자는 반경 3킬로미터 이내에 아무도 살지 않는, 그야말로 호주 깡촌의 농장에서 홀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개는 두 마리 있다고 들었다. 사실 나는 H가 서울로 돌아오면 금방 남자를 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이 얼마나 지독한 사랑쟁이인지 파악하지 못한 나의 오해였다. H는 회사를 그만두었고 호주의 깡촌으로 떠나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소고기와 맥주와 소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H는 베지테리언 남자와 함께 여태 그곳에서 살고 있다. 소고기 대신 당근튀김과 아보카도를 깨물어 먹으면서 말이다.
주말에 소파에 누워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카르멘』을 읽었다. 머리에 아카시아 꽃을 꽂고 그것도 모자라 입술 끝에 아카시아 꽃을 문 여자 카르멘의 이야기. 입에 물었던 아카시아 꽃을 멀쩡한 청년 돈 호세의 가슴팍에 던지자마자 그는 아무도 못 말릴 사랑쟁이로 돌변을 한다. 내가 아는 L과 Y, H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그는 정신없이 카르멘에게 빠져들어 그만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빨간 드레스에 구멍이 숭숭 난 실크양말을 신은 카르멘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사랑쟁이지만 그녀는 돈 호세와는 살짝 달랐다. 돈 호세도 사랑하고 가르시아도 사랑하고 루카스도 사랑했지만 그녀가 가장 사랑한 건 역시나 보헤미안 여인답게 ‘자유’였기 때문이었다. 『카르멘』의 첫 장에는 그리스 시인 팔라다스의 시구가 인용되어 있다. ‘모든 여자는 쓸개즙처럼 쓰다. 하지만 달콤한 순간이 둘 있으니 하나는 침대에 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죽었을 때이다.’ 연애소설의 시작치고는 생뚱맞다 싶지만 책을 덮고 난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유를 사랑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사랑한 남자였으니 결말은 파탄일 수밖에.
그동안 사랑 따위 좀 맹숭맹숭했던 나는 이 사랑쟁이들에 대한 기억으로 꽤나 벅찬 며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책장을 다시 훑는다. 더 진한 연애소설 어디 없을까. 에너지 충만하게 채워줄 그런 사랑쟁이들의 이야기 어디 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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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프로스페르 메르메> 저/<변광배> 역6,750원(10% + 1%)
소설보다는 비제의 오페라로 더 잘 알려진 『카르멘』. 음악 분야는 물론이고 수많은 예술 분야, 가령 영화, 발레, 연극, 인형극, 만화, 샹송, 그림 등과 같은 분야에서 그 내용이 변용되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재창조되면서 유럽을 대표하는 하나의 ‘신화’로 자리 잡은 작품이다. 제1장에서는 화자가 1830년 스페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