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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쓰릴 미>, 신입생 피아니스트 이범재
〈라흐마니노프〉에 이어 〈쓰릴 미〉로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범재
"연습하고 연주할 때마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계속 보이더라고요. 처음에 대본을 봤을 때는 무척 우울했는데, 어느 순간 두 인물에 공감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뮤지컬 <쓰릴 미>, <인터뷰>, <더맨인더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머더 포투>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두 명에서 많게는 네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이들 무대에는 또 한 명의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죠. 바로 피아니스트인데요. 여느 뮤지컬과 달리 단 한 대의 피아노로 극을 이끌어가는 이들 작품에서 피아니스트는 극의 몰입도와 완성도를 결정짓는, 그야말로 연주자 이상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공연을 예매할 때 피아니스트가 누구인지까지 확인하는 관객들이 많아졌다면 무대에서 그들이 얼마나 주목받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요즘 그는 배우 못지않은 관심을 받으며 무대에 서고 있습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초연과 재연에 이어 <쓰릴 미> 10주년 공연까지 참여하게 된 피아니스트 이범재 씨인데요. 새로 투입될 배우들과 <쓰릴 미> 연습을 끝내고 나온 이범재 씨를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직접 만나봤습니다.
“피아니스트도 연습시간은 배우들과 비슷해요. 개인적인 연습 뒤에 드라마 들어가면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야 하니까요. 이번에는 제가 복이 터졌죠(웃음). 보통 많아야 트리플 캐스팅 정도인데 <쓰릴 미>는 크로스 페어까지 하면 7팀이거든요. 그래서 매일매일 공연이 새로워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셨습니다. 보통 피아노를 전공했다고 하면 클래식을 생각하게 되는데, 어떻게 뮤지컬에 참여하게 됐나요?
“제가 피아노를 좀 늦게 시작해서 제대하니까 27살이더라고요. 좀 더 대중적이고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뮤지컬은 4년 전에 변희석 감독님 조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인연을 맺었는데,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종합예술이잖아요.”
<쓰릴 미>를 예전에 관람한 적이 있나요? 쉬운 작품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여러 면에서 무척 힘든 작품이잖아요.
“작품은 못 봤는데 워낙 얘기를 많이 들어서 마치 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공연하면서도 낯설지는 않았는데, 솔직히 아직 작품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연습하고 연주할 때마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계속 보이더라고요. 처음에 대본을 봤을 때는 무척 우울했는데, 어느 순간 두 인물에 공감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겉으로는 동성애, 살인 등의 설정이 있지만, 그 안에 있는 두 인물을 보면 그럴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연주를 할수록 감정 등을 더 잘 맞춰가는 것 같아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서 관객들에게 배우 못지않은 사랑을 받으셨잖아요. 특히 초연 때부터 참여했으니까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고 얘기할 수 있는데, <쓰릴 미>는 10주년에, 그 어느 작품보다 피아니스트의 역할이 커서 부담이 많이 됐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뮤지컬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건 <라흐마니노프>가 처음인데 공연 끝나고 박수 쳐주실 때 밀도가 다르더라고요. 무척 감사했죠. <쓰릴 미>는 한 달 정도 됐는데 <라흐마니노프> 공연과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회 차도 많지 않아서 아직 시험 보는 기분이에요.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니스트가 애드리브를 할 수 있는 틈이 있었는데, <쓰릴 미>는 틀이 확실하고, 감히 제가 바꿔칠 수 있는 부분도 없거든요. 게다가 10주년이라서 이미 보셨던 관객도 많고, 관객들도 저보다 선배인 셈이죠. 저 빼고는 배우, 제작진 모두 이미 해보셨던 분들이라 저 혼자 신입생이에요. 그래서 ‘내 해석이 안 맞으면 어떡하지?’ 겁을 많이 먹었어요.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닌데(웃음).”
그러게요, <쓰릴 미>의 경우 관객들이 무서울 정도로 분석을 하시거든요. 혹 겁먹었던 일이 현실로 드러난, 전작과는 다른 분위기를 느끼셨는지요(웃음)?
“아직 이렇다 할 실수는 하지 않았는데, 요즘 땀이 너무 많아져서 걱정이에요. 2월 초부터 체질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힘들어서 그런지 평소에도 땀이 너무 나는 거예요. 음악감독님이 놀라실 정도예요. 연주하면서도 잘 미끄러지니까, 제가 미스 터치는 잘 안 내는 편인데 틀릴 때가 있어서 관객 분들도 지적을 하시는 것 같고. 방법이 수술밖에 없다는데 그럼 사흘은 연주를 못한다고 해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어요.”
뮤지컬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이 클래식 무대와는 많이 다를 텐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요?
“일단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요(웃음). 물론 피아노 솔로나 다른 악기와 협연할 때도 힘든 점이 많지만 뮤지컬은 작품 자체는 물론이고 그날그날 배우들의 감정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특히 <쓰릴 미>처럼 피아노 한 대로 갈 경우 제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극이 무너지니까 그 점이 가장 부담스럽죠. 아티스트로서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보지는 않았는데, 뮤지컬에서는 같이 호흡해야 하니까 인내심도 배우게 됐어요. <라흐마니노프> 초연 때는 원 캐스트라서 44회를 연달아 연주했는데, 힘의 분배도 중요하더라고요. 피아노도 몸을 쓰는 악기이고, 미세한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에 체력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소리가 달라지거든요. 공연이 있을 때는 쓸데없는 데 에너지를 쏟지 않으려고 해요.”
각 페어의 성향을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계실 텐데, 지금까지 만난 페어는 어떤가요?
“페어마다 스타일이 너무 달라요. 모두 형인데, 일단 정상윤-에녹 페어는 불 같아요. 훅훅 오고가죠. 최재웅-김무열 페어는 굉장히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됐어요. 이창용-송원근 페어는 그냥 제 친구들 같고요. 페어마다 성향이 다른 만큼 피아노 한 대로 그 심리를 따라가는 묘미와 쾌감이 있고, 힘들기는 하지만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해요.”
배우만큼 피아니스트의 성향도 많이 다른가요?
“확연히 다르긴 해요. 연주자마다 특성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오)성민 씨는 굉장히 날렵하다면 저는 좀 더 무게감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어딘가에서 연주할 때 피아니스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 악기로 해요. 그런데 피아니스트는 주어진 악기로 연주해야 하죠. 그게 가장 힘든데, 한 피아노에서 두 명이 번갈아 연주한다는 게 쉽지는 않아요. 요즘 제가 땀이 많이 나니까 성민이가 연주하기 전에 ‘범재가 건반에 기름칠을 했다’고 닦느라 바쁘대요(웃음). 성민이 연주에서는 노련함이 많이 보여요. 제가 <라흐마니노프> 때 새 피아니스트를 데려왔더니 현장에서 사람들이 ‘새 손가락’이라고 했거든요. ‘그럼 나는 헌 손가락인가?’ 했는데(웃음), 지금은 제가 ‘새 손가락’이겠죠. 저도 빨리 익혀서 더 노련하게 치고 싶어요.”
<쓰릴 미> 배우들을 만나면 꼭 물어보는 질문인데요. 굳이 비교하자면 이범재 씨는 ‘그’와 ‘나’ 중에 어느 쪽에 가깝나요(웃음)? 성격은 밝아 보이는데요.
“평소에는 조용히, 고요하게,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해요. 오히려 우울한 감성도 있는 편이고요. 좀 억울한 게 저는 ‘나’ 성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그’로 봐요. 저는 부드러운 칼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연애할 때는 다 퍼주는 편이에요. 뒤통수치지는 않고요(웃음).”
<라흐마니노프>부터 쉬지 않고 달려오신 데다 <쓰릴 미> 10주년 공연에 참여하고 있는 만큼 어깨가 상당히 무거울 텐데, 마지막으로 각오 한 말씀 들어 볼까요?
“상반기를 열심히 달리고 있죠. 아직 신입생인 만큼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되 잘 하고 싶어요. 오래 활동하신 분들의 조언을 많이 듣는데, 사실 뮤지컬 안에서 연주자로 살아남는다는 게 힘들거든요. 하지만 관객 분들의 큰 박수와 격려 때문에 더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언젠가는 음악감독을 하고 싶어요. 또 궁극적으로는 창작활동을 하고 싶기 때문에 제 앨범 작업도 하고 있고, 다음 달부터 매달 한 곡씩 피아노곡도 발표할 계획이에요. 최종 목표는 음악감독이지만, 아티스로서도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갔으면 좋겠어요.”
<쓰릴 미>는 3인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피아니스트가 작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거나 배우들의 심리를 따라가지 못하면 극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니까요. 그래서 배우 누구나 <쓰릴 미>의 ‘그’와 ‘나’가 될 수 없듯이, 피아니스트로서 모두가 <쓰릴 미>무대 위에서 인정받는 것도 아닌 것이겠죠.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편의 공연을 만들지만, 전혀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던 피아니스트가 작품을 이해하고 배우들과 호흡하며 연주한다는 건 또 다른 ‘연기’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라흐마니노프>에 이어 <쓰릴 미>로 다시 한 번 주목받고 있는 피아니스트 이범재 씨는 어떤가요? 그의 바람처럼 지혜롭게 잘 헤쳐 나가, 그 어렵다는 <쓰릴 미> 무대에서도 ‘연기력’을 입증 받았으면 좋겠네요.
관련태그: 이범재, 쓰릴 미, 라흐마니노프, 피아니스트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