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택용의 책과 마주치다
거짓말 같은 시절
<월간 채널예스> 2월호
두꺼운 책에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었고 그것들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까. 모두에게 아까운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 날마다 촛불이 거리를 밝히던 어느 날 광화문 광장 옆 커피숍. 24시간 문을 여는 곳이었기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항의하며 광장에 텐트를 치고 살던 우리들이 한밤중 화장실을 이용하러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물론 화장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광장의 추위를 피하러 가기도 하고 회의를 하러 모이기도 하고 밀린 마감을 해결하러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던 곳이었다.
이날도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심판을 얼마나 빠르게 혹은 더디게 진행할지 두서없는 잡담을 하다가 광장으로 돌아가려고 자리를 뜨던 중이었다. 거짓말처럼 헌법학 책 두 권이 놓인 자리를 발견하고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헌법이라야 평소에는 띄엄띄엄 알고 있었고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촛불집회 때는 제1조의 내용만 주로 입에 오르내렸다면, 이번 탄핵정국은 헌법 곳곳의 조항들을 접하게 만들었다. 가장 그리고 새삼 다가오는 조항은 5년마다 새 대통령의 목소리로 듣게 되는 제69조 대통령의 취임 선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선서 내용에 무엇 하나 소홀하지 않았던 것이 없었구나. 헌법을 공부하러 온 두 학생은 69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200자 원고지 120장도 안 되는 헌법 전문을 1,500여 쪽으로 풀어놓은 두꺼운 책에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얻었고 그것들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까. 모두에게 아까운 시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배운 뒤 불성실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관뒀다. 사진이 가장 쉽겠거니 지레짐작하고 덤볐다가 여태껏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개인 사진집으로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1,895일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와 고공농성과 한뎃잠을 찍은 《외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