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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고 아득한 유년의 풍경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단편 「뉴욕제과점」은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다운 유년의 소설인지. 작가가 나고 자란 김천과 뉴욕제과점의 그립고 아득한 풍경들. 내가 부러워한 것이 김연수의 유년인지 김연수의 소설인지 헛갈릴 만큼 나는 그 책을 아껴 아껴 읽었다
H언니는 내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나이는 나보다 세 살이나 많지만 우리는 십년지기 친구로 더할 나위 없이 가깝게 지내왔다. H언니가 없었다면 아마 내 산문집은 그냥 저냥 재미없는 책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나 K시로 이사를 갈까 봐.”
내가 말했을 때 H언니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거긴 너무 멀어. 양재동 낙지집도 못 가고 강남역 유니클로도 못 가.”
아니라고, 지하철역이 바로 앞이라서 강남역까지 한 시간도 안 걸린다고 내가 말했지만 언니는 잘 믿지 않았다. 진짜라니까! 언니는 콧방귀만 뀌었다. 집을 보러 K시에 가겠다고 하자 H언니가 나들이 삼아 따라나섰다.
40대가 되면 시골 저 깊숙한 곳에다 주택을 짓고 살 거라던 내 바람은, 아기를 키우게 되면서 모조리 취소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걸어서 바래다줄 수 있는 어린이집이었고 여차하면 아기를 안고 뛸 수 있는 소아과도 곁에 있어야 했다. 도로를 건너지 않고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다면야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러니 단지 안에 어린이집이 네 곳이나 있고 초등학교도 있는 K시의 그 아파트는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층간 소음의 가해자가 되고 싶진 않으니 필로티가 있는 2층이 필요했고 또 해가 잘 들어오는 남향집이어야 했다. 물론 그런 집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뚱해졌지만 H언니의 눈이 반짝였다.
“나 여기 마음에 들어.”
“왜?”
“어린이집도 있고 학교도 있잖아.”
“결혼도 안 했고 애도 없는 사람이 왜 이래?”
“몰라. 그런데 마음에 들어.”
H언니는 나보다 먼저 K시의 아파트를 계약했다. 그리고 곧 나도 뒤따랐다. 어쩌다 보니 옆동이었다. 우리는 그만 신이 났다.
“이제 쓰레빠 질질 끌고 둘이서 동네 투다리도 갈 수 있는 거지?”
“우리 집 창문으로 보면 언니네 집이 다 보여.”
“늘그막에 니네 딸 크는 거나 보면서 살아야겠네.”
“응, 우리 딸이 언니한테 효도할지도 몰라.”
“그럴 리가.”
친구와 옆 동에 산다는 건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일지도 모른다. 토요일이면 멸치국수를 끓여 H언니를 불러낼 수도 있고,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언니와 덜컥 마주칠 수도 있고, 깜박 잊고 보일러를 안 끄고 출근을 한 언니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보일러 좀 끄고 오라 시킬 수도 있고, 목욕도 같이 갈 수 있고, 인터넷 TV로 영화를 보다가 우리 집 거실에서 그냥 쓰러져 잠들어도 되고, 무엇보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내 딸은 아마 “H이모!”를 수만 번은 부르며 자랄 것이다. 그건 정말 다행이다. 언니는 아마 내 딸을 번쩍번쩍 잘도 업어줄 것이다.
나는 유년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 실린 단편 「뉴욕제과점」은 얼마나 유려하고 아름다운 유년의 소설인지. 작가가 나고 자란 김천과 뉴욕제과점의 그립고 아득한 풍경들. 내가 부러워한 것이 김연수의 유년인지 김연수의 소설인지 헛갈릴 만큼 나는 그 책을 아껴 아껴 읽었다. “엄마! 그 K시, H이모랑 거기 살 때 난 진짜 행복했어.” 나중에 아이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H언니도 아마 나만큼 기뻐하겠지.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김연수 저 | 문학동네
수록된 아홉 편의 소설의 배경이 ‘80년대 김천’이라는 점 때문에 김연수의 자전적 내용을 담은 소설집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자전소설’이라는 테마로 쓰인 「뉴욕제과점」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작품들은 모두 “자연인 김연수의 개성과 사상을 완전히 배제하고 작가로서 만들어낸 이야기로만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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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생.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어디로 갈까요』와 장편소설 『티타티타』, 그리고 산문집 『우리에겐 일요일이 필요해』를 출간했으며 번역한 책으로 『빨강 머리 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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