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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표절 시비가 일어난 이유

스에츠쿠 유키로부터 시작된 표절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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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읽고 나니 엉뚱하게도 이런 게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표절 작가로 낙인찍힌 스에츠쿠 유키는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지난번에 ‘『슬램덩크』, 영광의 시절은 언제인가요?’라는 제목으로 이야기하다가 지면관계상… 이 아니라 너무 길어지니까 한 걸음 더 들어간 내용은 2주 뒤에 이어나가겠다고 쓴 바 있다. 그 2주 사이에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에 관한 자료를 슬렁슬렁 찾다보니 흥미로운 대목이 눈에 띄었다. 상당히 유명한 에피소드여서 어지간한 팬들이라면 기억하실 텐데 바로 『슬램덩크』 표절사건이다. 나도 어느 사이트에서 『슬램덩크』의 특정 장면과 NBA 스틸사진을 나란히 놓고, 이를테면 “강백호가 등장한 표지사진은 토론토 랩터스의 가드 제일런 로즈와 똑같다”는 식으로 써놓은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저작권자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 사진을 그대로 베껴서 그린 것은 표절이 맞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정작 사진을 찍은 작가들의 문제제기가 없어서 팬들끼리 설왕설래하다가 적당히 마무리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나도 이미 아는 내용이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에 관한 소문도 꽤 많이 들었다. 하지만 ‘왜 표절시비가 일어났나’에 관해서는 까맣게 몰랐다.


당시 <국민일보-쿠키뉴스>(2005년 11월 13일)에 보도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만화 『에덴의 꽃』이 『슬램덩크』는 물론 『리얼』, 『연애의 자유』, 『바스타드』 등을 표절했다는 일본 독자들의 제보가 이어짐. (2) 여러 작가들 가운데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나서서 이를 문제 삼기 시작함. (3) 『에덴의 꽃』의 작가 스에츠쿠 유키도 마침내 표절을 인정. (4) 해당 출판사인 고단샤에서는 『에덴의 꽃』을 절판하고 단행본을 회수했으며 즉각 사과문을 올림. (5) 그러자 『에덴의 꽃』을 아끼던 팬들은 스에츠쿠 유키가 앞으로 만화를 더 이상 그릴 수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여 『슬램덩크』도 표절작이라는 자료를 제시함. (6) 이들이 내세운 자료에 따라 『슬램덩크』 속 유명한 장면들이 NBA의 스틸 사진을 그대로 베꼈음이 드러남…이라는 것이 대충의 경과인데 기사를 읽고 나니 엉뚱하게도 이런 게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표절 작가로 낙인찍힌 스에츠쿠 유키는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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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일수 박물관의 기념품점에 있는 『치하야후루』 홍보물

 

이 대목에서 약간 감탄했다. 스에츠쿠 유키는 얼마간 자숙의 시간을 보냈지만 재기하기 힘들 거라는 주위의 예상을 깨고 성공적으로 복귀한 것이다. 손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자신을 내친 고단샤를 통해서 말이다. 복귀작의 제목은 『치하야후루』인데 ‘이 만화가 대단하다’와 ‘일본만화대상’에서 모두 넘버원을 차지할 만큼 탄탄한 내용을 바탕으로 “순정만화계의 슬램덩크”라는 평가를 받으며 누적판매 부수도 1,000만 부를 넘겼다고 한다. 애니메이션도 인기를 끌었지만 영화로 만들어질 때도 화제였고. 이쯤 되니 들여다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해서 곧장 주문하여 받자마자 읽어 보았다. 시리즈가 길어서 살짝 맛만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또 한 번 잡으니 뒷권을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순정만화 같기도 하고 학원만화 같기도 하고 스포츠만화 같기도 하지만 뒤로 갈수록 순정만화도 아니고 학원만화도 아니고 스포츠만화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하기는 애매한데 그도 그럴 것이 『치하야후루』의 소재가 ‘백인일수 경기 카루타’이기 때문이다. 백인일수, 카르타, 라고 말해봤자 그게 뭔지 모르는 형제자매님들이 많으실 테니 차근차근 설명해 보겠다. 한번 들어보시라.

 

백인일수(百人一首)란 중세 일본에서 100명의 가인(시인)이 지은 뛰어난 와카(일본 고유의 정형시)를 연대순으로 한 수씩 엄선한 작품집이다. 무인이자 시인이기도 했던 이의 교토 별장인 오구라 산장의 장지문을 장식하기 위해 고른 것이라서 정식 명칭은 ‘오구라 백인일수(小倉百人一首)’지만 줄여서 ‘백인일수’라 부른다. 작품집으로서의 백인일수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까닭은 ‘카루타’라는 카드게임 덕분이다. 경기의 흐름이나 패의 위치를 기억해야 한다는 점에서 굳이 비교하면 ‘신경쇠약’이라 불리던 게임과 흡사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지역색이 짙고 방식이 특이해서 다른 나라로의 보급은 미미한 편이다. 일본 내에서도 한국의 고스톱처럼 ‘툭하면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게임’은 아닌 듯하다. 동호인은 백만 명 정도고 주로 설날에 가족들과 즐긴다는데 나 같은 외국인이 구경하기 쉬운 건 공식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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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낭독자가 읽는 카드, 오른쪽이 선수가 쳐내는 카드

 

공식 경기에서는 백인일수가 적힌 카드 100장 중에서 50장만 사용한다. 선수는 각자 25장씩 나눠 가지고 그걸 3단으로 늘어놓는데 자신의 패인 25장의 배치는 스스로 정할 수 있다. 나눠 가진 패가 정렬되면 15분가량 어느 위치에 어떤 패가 놓여 있는지 암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때 자신의 패를 잡기 편한 위치에 놓으면 경기에 유리하다. 당구에서 초구를 칠 때 당점의 위치와 스트로크의 세기를 기억해 두는 것과 비슷하달까. 경기가 시작되면 낭독자가 와카의 앞 구절(상구)이 적힌 카드(에는 위 사진에서 보듯 작자의 초상과 이름이 적혀 있다)를 읽는다. 낭독자가 읽는 상구에 어울리는 뒷 구절(하구)이 적힌 카드를 상대보다 ‘먼저 쳐내서’ 자기 진영의 카드를 먼저 없애는 것이 핵심이다. 이 ‘먼저 쳐낸다’는 것은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02:30~02:50)을 보는 편이 이해가 빠르겠다.

 

 

어떤가. 나도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는 ‘뭐야, 스모 자세로 임해야 하는 카드게임인가’ 하고 웃었는데 『치하야후루』를 읽고 맥락을 이해한 뒤에 다시 봤더니 ‘그래서 다다미 위의 격투기 운운 하는 얘기가 나왔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카루타는, 100편의 와카를 외워야 하는 기억력, 그냥 외우기만 해서는 안 되고 상구의 몇 글자만 듣고도 하구가 무엇인지 알아채야 하는 집중력,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서너 시간 동안 경기를 치러야 하는 지구력, 그 와중에 격투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액션으로 상대보다 먼저 패를 쳐내야 하는 순발력이 두루 요구되는 게임이라 하겠다. 이렇게 적어놓으니 복잡해 보이는데 앞에서도 얘기했듯 『치하야후루』를 읽다보면 규칙은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이 만화가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복잡해 보이는 시합을 유머러스한 설명으로 풀어나가는 전개방식 덕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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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구라 백인일수 박물관 시루레덴

 

참고로 교토 아라시야마에는 일본 유일의 백인일수 박물관인 시구레덴(時雨殿)이 있다. 2006년 초에 교토 시의 제안을 받은 닌텐도에서 거액을 투자하여, 카루타라는 전통적인 게임을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엔터테인먼트 시설에서 체험하게 한다는 취지로 만들었는데, 나는 카루타니 백인일수니 하는 걸 전혀 모른 채 방문했고 『치하야후루』라는 만화는 구경조차 한 바 없어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와야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지금 생각하면 이만저만 후회스러운 게 아니다. 교토에 들를 때 한 번쯤 다시 가볼 작정이다. 색다른 만화책이 필요하다는 형제자매님들께서는 한 질 장만하여 읽어보셔도 좋겠다. 설날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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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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