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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롬, 따듯하면서도 도도한 클라리넷
클라리네티스트·인천시립교향악단 수석 이새롬
바흐·모차르트·베토벤처럼 익숙한 음악을 갖고 소통하기보단 연주자가 잘 준비하고 연습해서 청중에게 새로운 음악과 그 세계를 보여주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좋은 소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연주가의 의무라고 생각하거든요.
소리를 들으면 클라리넷이 아니라 ‘꿀’라리넷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풍부하고 윤기 어린 소리를 품은 악기. 하지만 때로는 날카로운 소리를 자신의 콧대를 세우는 도도함도 보여준다. 모차르트가 작곡한 협주곡 중 느린 2악장이 삽입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를 통해 대중에게 유명세를 떨친 클라리넷. 2012년부터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단원’으로, 해마다 선보이는 독주회의 ‘주인공’으로 무대에 오르는 이새롬을 만나 보았다.
클라리넷을 전공하게 된 계기와 궁금합니다. 어머니가 음악 교사이셨다는 점도 연관이 있을 것 같은데요.
세 자매 중 막내예요. 언니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취미 삼아 하고 있을 때, 저는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친구네 놀러 갔는데 텔레비전 옆에 클라리넷이 진열되어 있었어요. ‘이거 뭐야? 어떻게 하는 거야?’라며 친구한테 물어보기도 했고요, 엄마한테 클라리넷 본 걸 얘기하며 악기를 갖고 싶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음악 선생님이셔서 쉽게 이해하셨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레슨을 받았는데 남들보다 소리를 잘 낸다고 칭찬을 들었죠. 생애 첫 악기가 제 전공이 된 거예요.
부소니(1866~1924)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엘지’. 2016년 이새롬의 독주회 중.
감수성 예민한 고교 시절에 ‘클래식의 수도’라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유학을 갔는데, 당시 어떤 감정이 들었나요?
예원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 2학년 때 유학을 갔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열리는 캠프에 참가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알프레트 프린츠(1930~2014) 선생님, 훗날 은사가 되는 요한 힌들러 교수님을 만났어요. 당장에라도 빈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그 때 만난 교수님들의 허락을 받고 유학을 갔어요. 우리나라에선 음대 교수와 입시 전에 만나는 것이 입시 비리로 오해받기도 하는데, 유럽에선 선생과 학생이 미리 만나서 서로를 파악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요. 저도 프린츠 선생님과 만난 이후, 선생님께서 먼저 제안을 하셔서 빈으로의 유학을 택했던 거고요. 음… 입학이 확정된 후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기내에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KV622가 나오더라고요. 입학하기로 한 빈 국립음대의 입시 곡이었거든요. ‘아! 여기서 이 곡이 나오다니!’ 저 혼자 의미 부여하고… 집 떠나면 고생인 것도 모르고 기대에 한껏 부풀었던 때였죠.(웃음) (* 모차르트 곡명 뒤에 붙는 ‘KV’은 쾨헬 번호라고 읽는다. 1862년 루트비히 폰 쾨헬(Ludwig von Kochel)에 의해 작성된 모차르트의 작품목록의 약자로 K. 또는 KV로 쓴다. 클라리넷 협주곡 KV622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622번째 작품이며, ‘쾨헬 번호 622’로 읽는다. 쾨헬의 목록은 모차르트의 작품을 간단히 지칭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인천시립교향악단(예술감독ㆍ상임 지휘자 정치용)은 언제 입단했나요?
2012년이었으니, 27살 때였죠. 빈 국립음대에서 공부한 후, 스위스 바젤 국립음대를 졸업하고 2011년 말에 귀국했어요. 이듬해 1월에 귀국독주회를 했고, 그해 7월에 오디션을 쳤죠. 입단 후 수습 기간을 마치고 10월부터 수석으로 활동했습니다.
올해로 창단 50주년을 맞은 인천시립교향악단 모습
인천시향 입단 오디션 때를 추억한다면?
스메타나(1824~1884)의 오페라 ‘팔려간 신부’ 중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부분과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교향곡 2번 3악장 등이 시험 곡목이었어요. 입단은 일상과 음악 환경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오디션 당시에는 백지장에 스케치 하듯 마음 비우고 했죠. 사실 유럽에서도 악단 오디션을 본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자리를 잡게 될까?” “앞으로 유럽에서 살아볼까?” 등 생각이 복잡했어요. 그런데 몇 번의 실패 후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인천시향 오디션 땐 아예 마음을 비웠죠.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 중 3악장(아다지오). 아이빈드 옌센(지휘), 네덜란드 라디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제가 이새롬 씨를 처음 본 게 2012년 인천시향의 <금난새, 말러를 노래하다> 공연이었어요. 말러(1860~1911)의 교향곡 1번을 연주했는데, 1악장에서 클라리넷이 뻐꾸기 소리를 표현한 대목을 들으면서 강한 인상을 받았었어요.
아! 그 대목! 클라리네티스트들끼리 ‘뻐꾸기 날린다’고 해요.(웃음) 입단 후 첫 공연이라 군기도 바짝 들었고, 격려와 질타를 받으며 준비했죠. 당시에는 학교에서 배우고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배운 대로만 하자’라는 신조였는데, 지금은 오케스트라 안에서 저만의 스타일을 찾고 있어요.
클라리네티스트로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곡, 그리고 연습과 연주 때마다 클라리넷을 관두게 하고 싶은 곡이 있다면?
일단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KV622를 꼽겠어요. 모차르트가 작곡한 클라리넷 협주곡은 이 곡뿐이기 때문에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요. 다른 목관악기들에 비해 따뜻한 클라리넷만의 음색을 잘 담은 곡이라고 할까요. 특히 느린 2악장을 제일 좋아해요. 도입부는 몇 개의 음으로만 구성되었는데, 연주자에게 감성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복잡하지 않으면서 감동을 주는 매력?
좀 다른 얘기인데요, 프로코피예프가 작곡한 ‘피터와 늑대’를 연주할 적이 있어요. 당시의 지휘자는 금난새 선생님이었는데, 연주전에 늘 재밌는 해설을 곁들이셨죠. 고양이가 나무로 올라가는 대목을 클라리넷이 묘사하는 것이었는데, 저에게 마치 고양이처럼 자리에서 슬금슬금 걸어 나오는 연기를 하면서 연주해보라고 했어요. 하긴 했는데, 아… 제가 연주 외엔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였습니다.(웃음)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삽입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KV622 중 2악장(아다지오).
클라리넷은 독주곡도 많지만, 오케스트라 속에서 그 매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곡도 많잖아요.
100명이 끌고 가던 음악을 한 사람의 몫으로 끌고 가야 하는 순간이 있죠. 세 곡을 꼽고 싶은데, 첫 번째는 베버(1786~1826)가 작곡한 오페라 ‘마탄의 사수’의 서곡이에요. 클라리넷 솔로가 나오기 전에 호른이 웅장한 소리를 내는데, 해가 떠오르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에요. 이 대목을 클라리넷 독주가 힘 있게 뚫고 나옵니다. 두 번째는 거슈인(1898~1937)의 ‘랩소디 인 블루’에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피아노 협주곡인데, 첫 부분을 클라리넷이 장식하죠. 음들을 미끄러지듯이 연결하는 ‘글리산도’라는 주법으로 강한 인상을 줍니다. 세 번째는 브람스(1833~1897)의 교향곡 4번 중 2악장입니다. 앞서 얘기한 ‘랩소디 인 블루’는 ‘뻥!’하고 터뜨리는 힘이 필요하다면, 브람스의 곡은 절제가 필요해요. 오보에나 플루트의 작은 소리와 합을 맞추는 게 참 어려운 곡이지만, 연주할 때마다 인간의 고요한 내면을 건드린다는 느낌이 들어요.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 크리스티안 텔레만(지휘)ㆍ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오케스트라), 랑랑(피아노)
클라리넷은 리드를 떨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입니다. 개인적으로 ‘클라리넷에게 리드는 심장과도 같다’라는 표현을 쓸 만큼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클라리네티스트는 마음에 드는 리드를 구하거나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잖아요.
리드는 여러 장을 구매해서 하나하나 다 불어 봐요. 좋은 소리를 내는 리드를 찾기 위해서죠. 그런데 첫 만남의 느낌만을 믿어서는 안 돼요. 처음에는 마음에 들었지만 온도ㆍ습도 같은 주위 환경에 변하거든요. 전날에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오늘은 원하는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 거죠(“애인과 똑같네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맞아요!”라며 맞장구를 친다). 마음에 드는 리드를 만나기까지 1주일 동안의 시험 기간을 가져요. 정말 늘 관심을 가져야 해요.
클라리넷은 공기로 리드를 떨어 소리를 낸다
클라리넷에 리드를 부착하는 과정
2012년부터 매년 독주회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레퍼토리를 보면 20세기에 작곡된 현대음악의 비중이 적지 않아요. 작곡가 알반 베르크(1885~1935), 윤이상(1917~1995), 말콤 아널드(1921~2006), 티베리우 올라(1928~2002), 다니엘 슈나이더(1961~), 외르그 비트만(1973~) 등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연주자들의 고민은 관객과의 ‘소통’인데요, 난해하고 어려운 현대음악은 연주자의 음악세계를 넓히는 데에는 참 좋겠지만, ‘소통’에 있어서 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바흐ㆍ모차르트ㆍ베토벤처럼 익숙한 음악을 갖고 소통하기보단 연주자가 잘 준비하고 연습해서 청중에게 새로운 음악과 그 세계를 보여주고, 관심을 갖게 하는 게 좋은 소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연주가의 의무라고 생각하거든요. 2014년 독주회 때 청중의 피드백이 궁금해서 스스로 설문지를 작성해서 배포해봤어요. 어떤 곡이 기대됐는지, 독주회는 몇 번 오는지 등등의 질문을 담았고, 다음 연주회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했죠. 어느 초등학생은 루마니아의 티베리우 올라(1928~2002)가 작곡한 무반주곡이 재밌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곡도 현대음악인데, 낯설고 생소하지만 전달이 잘 되면 청중 역시 즐기면서 들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슈나이더(1961~)의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곡. 2016년 이새롬의 독주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무엇인가요?
2014년의 인천시향 공연이에요. 원래는 해외 클라리네티스트가 협연하기로 했는데, 개인 사정으로 협연이 힘들다고 1주일 전에 통보를 해왔어요. 새로운 협연자를 물색하던 중 그 기회가 저에게도 왔어요. 무조건 할 수 있다고 했죠. 그러고선 1주일 동안 정말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연습을 했어요. 베버의 클라리넷 협주곡 2번이었는데요, 제겐 무척이나 좋은 기회였어요. 사실 클래식계에서 무대에 설 기회는 우연히, 갑자기 찾아오는 경우가 많아요. 대타가 스타가 되는 거죠. 그때의 일을 계기로 늘 준비가 된 연주자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재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서 예배를 드릴 때 그 옆에서 조용히 연주를 했어요. 무대에서의 연주도 큰 즐거움이지만, 이런 계기로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한 일이죠.
이새롬 씨가 느끼는 인천시향만의 특징과 분위기, 자랑거리가 있다면?
올해가 창단 50주년이에요. 지역 오케스트라 치고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2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단원들이 있어요. 선배 단원들이 만든 기반을 바탕으로, 20~30대의 후배 단원들이 아이디어와 의견을 내죠. 50년 동안 만든 전통과 변화와의 균형을 맞추기는 그 어느 악단에게나 힘든 것이지만, 인천시향은 그것을 위해 늘 노력합니다.
9월 이후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가까운 계획으론 9월 23일과 10월 28일에 인천시향의 정기연주회(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와 여러 기획공연이 있고요, 10월 20일 한양대 백남음악관에서 프랑스 작곡가 필리프 위렐(1955~)의 ‘…a mesure(…에 따라서)’를 연주해요. 내년 2월엔 서울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목관 5중주 창단 공연을 가져요. 저를 포함해 인천시향의 플루트ㆍ오보에ㆍ바순 수석들로 결성된 5중주단인데요, 이름은 아직 못 정했어요. 인천시향은 아파트, 학교 등으로 ‘찾아가는 연주회’를 매번 하는데 그 때마다 덩치가 큰 오케스트라가 움직이기는 힘들어서 단원들로 구성된 작은 앙상블이 연주를 하곤 해요. 이런 과정 속에서 멤버들 간의 호흡이 잘 맞아서 창단하기도 한 거죠. 함께 생활하는 단원끼리 만든 것이기에, 선배들은 ‘애증’의 관계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러한 끈끈함이 음악에 가져다주는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이새롬 씨가 자신을 돌아보며 새롭게 느낀 점이 있나요?
연주와 감동, 이 두 개가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해요.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곧 좋은 사람일 테고, 좋은 사람이 곧 좋은 연주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올해 봄에 결혼도 했고, 인천시향의 연주회와 독주와 앙상블 활동이 많아지면서 앞으로 제 삶의 화두는 ‘균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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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평론가로 음악 듣고, 글 쓰고, 음악가들을 만나며 책상과 객석을 오고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고,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 월간 <객석>을 중심으로 취재 및 집필 활동을, KBS 1FM에서 방송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