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 참! 내가 널 많이 사랑하는가 보다
파리의 거리로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
문 앞에서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외출 때마다 먼저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 물고 식구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파리가 아름다웠던 건 그 여자와 함께 했기 때문이지. 아무렴!
파리의 몸종
파리에서 구한 집은 볼로뉴 숲이 멀지 않은 16구 ‘부촌富村’에 있었다. 집 앞에 나서면 그야말로 유럽풍 고급 빌라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트렌치코트를 입고 낙엽 가득한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 틈에 서 있으면 파리지엥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런 파리를 가리켜 그 여자는 영혼의 도시라 했다.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아쉬운 점이라면 그 우아한 풍경 뒤 하녀가 살았을 법한 방을 개조한 원룸이 우리 숙소인 정도랄까? 하지만 그나마도 방을 나와 화려한 입구와 로비를 지나 건물 밖으로 나오면 하녀의 방이 아니라 저 빌라에 살다 나온 듯한 착각이 들어 견딜 만 했다.
어제 정한 외출 시간은 아직 30분이나 남았지만 벌써 문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보니 그녀는 영혼의 도시를 향해 좀 더 빨리 나가고 싶은가 보다. 호통에 놀라 급하게 필요한 것들은 챙기고 있는 나를 보면서 문 앞에서 한숨만 쉬고 있다. 시간에 맞춰 나가면 서로 편할 텐데 자기 기분이 내키는 순간 외출 준비를 하고 ‘나가자’를 외치는 그 여자가 징글징글하다.
지갑 하나가 외출에 필요한 전부인 그 여자와 달리 난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샤워를 해야 하고, 외출복을 골라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진기를 챙겨야 하고 볕이 좋은 공원에 앉을 수 있으니 담요도 하나 챙겨야 한다. 읽을 거리도 하나 들어야 하며 무엇보다 스마트폰은 잊으면 안 된다. 밖에서 스마트폰 전원이 떨어지면 난감하니 외장배터리나 전원케이블을 챙겨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알차게 집어넣을 수 있는 가방도 골라야 한다. 언제 비 올지 모르니 우산도 하나 챙겨 넣으면 더 좋고.
나도 그 여자처럼 지갑 하나 들고 단출하게 길을 나서고 싶다. 하지만 파리가 마음에 들어 공원에서 블랭킷을 깔고 우아하게 책을 읽고 싶었던 것도 그 여자이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줄 지어 서 있는 파리의 풍경을 사진기에 담고 싶었던 것도 그녀다. 그 여자가 즉흥적으로 동선을 바꾸는 탓에 길을 잃을까 걱정돼서 늘 스마트폰의 지도가 켜져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온종일 그 짐을 메고 걸어도 어깨가 견딜 수 있는 가방을 선택하고 싶었을 뿐이다.
지친 하루를 마무리하고 숙소로 돌아간다. 고급 빌라의 우아한 현관으로 들어선 뒤 호사스러운 로비를 지나 하녀의 방에 들어가 몸을 뉘인다. 남들 보기엔 빌라의 겉모습처럼 화려하겠지만 결국 그 여자의 몸종과 다를 바 없는 신세이다. 파리지엥은 무슨! 딱 이 방과 같은 처지인 거지. 그래도 같이 여행하는 걸 보면 허 참! 내가 널 많이 사랑하는가 보다.
목적 없이 걷고 또 걸어도 싫증나거나 지루하지 않는 파리의 풍경.
시간이 부족한 남자
어떤 도시는 도착하자마자 종이 한 장을 부욱 찢어 비뚤비뚤 칸을 만들고 날짜를 새겨 넣어 스케줄 표를 만든다. 빼곡하게 자리 잡은 스케줄 표에 휴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파리, 런던, 뉴욕. 딱 이 세 도시가 그랬다.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곳. 여자들의 입술 색깔, 틴에이저의 운동화, 남자들의 스카프를 훔쳐보며 패션 감각을 키울 수 있는 곳. 디자인, 건축, 패션, 공연 등 굳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수준 높은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 그중 최고의 도시는 파리였다.
파리를 향한 애끓는 나의 연정을 모른 척하는 남자가 야속하다. 시간을 초로 나눠가며 다음 행동을 계획하는 여자와 달리 시간을 늘릴 수 있는 대로 늘려가며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자, 바로 그 남자이다.
남자는 외출 준비를 하는데 여자보다 곱절의 시간이 걸린다. 여자는 이를 닦고 머리를 질끈 동여매면 끝이지만 남자는 외출하기 전에 꼭 샤워를 해야 하고 신부의 쪽 머리처럼 왁스를 발라가며 머리를 매만져야 한다. 두 사람의 시간차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화장실에 동시에 들어가도 늦게 나오는 건 언제나 남자 쪽이다.
뭐든 나보다 두 배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남자는 길을 나서기 전 챙겨야 할 게 너무 많다. 비 소식이 없는 화창한 날에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며 안절부절못하는 건 애교 수준이다. 전기 코드, 가스 밸브 등 위험요소를 집에 남겨두고 온 것 같다며 집으로 방향을 튼 적도 여러 번이다.
내일 입을 옷과 짐을 챙겨 두고 잠드는 나와 달리 남자는 길을 나서는 순간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다. 현관문을 잠그고 100m쯤 걸어 나온 뒤에도 ‘오늘 이 옷에는 운동화가 에러인 것 같다’며 바꿔 신겠다고 집으로 돌아간다. 어디 운동화뿐인가! 가방, 안경, 선글라스 등 맘에 안 드는 아이템이 있다면 ‘컴백홈’. 남자의 기준에서 챙겨야 할 것들은 대체로 이렇다. 자신의 룩(LOOK)에서 벗어난 것들과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만약에 사건들을 대비하는 아이템. 나라면 차라리 준비 시간을 단축하고 나중에 벌어질 일들을 감수하겠다.
문 앞에서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외출 때마다 먼저 밖으로 나가 담배 한 대 물고 식구를 기다리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담뱃불을 끄고, 자동차 시동을 켜 놓고 그것도 모자라 먼지떨이로 차를 닦아낼 때까지도 함흥차사인 가족들이 얼마나 짜증 났을까? 식당에서 가족과 함께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제서야 이해가 되는 걸 보면 이 남자를 통해 나도 아버지가 되어가나 보다. 응?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