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에든버러, 축제를 대하는 두 가지 마음
축제의 도시에서 공연을 즐기기까지
몇십 년 산 어머니들이 남편 숨 쉬는 것만 봐도 짜증이 난다는데 나 역시 이 남자가 꼴 보기 싫을 때가 있다.
고색창연한 에든버러 성 광장에서 펼쳐지는 전 세계 군악 퍼레이드, ‘로열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
과잉근심, 축제를 대하는 두 가지 마음
할 수만 있다면 매년 여름에는 에든버러에 가고 싶다. 8월, 한 달 내내 펼쳐지는 축제는 시민 모두가 생업을 잠시 내려놓고 전 세계 관객을 맞이하러 나온 스텝이라는 인상을 받을 만큼 열성적이고 활력이 넘친다. 그리고 시내의 모든 상점은 극장 혹은 무대로 변신한다. 산발적으로 주최자만 바뀌어서 펼쳐지는 비슷비슷한 축제와는 달리 시민과 시의 ‘몰입’으로 만들어진 8월의 에든버러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운이 좋게도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 숙소의 가격도 비행기 표도 천정부지로 솟는 축제의 한 가운데 말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쉽지만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것은 모두 이룰 수 있다는 낙관적인 마음에 초를 치는 그 남자가 문제라면 문제였다.
몇십 년 산 어머니들이 남편 숨 쉬는 것만 봐도 짜증이 난다는데 나 역시 이 남자가 꼴 보기 싫을 때가 있다. 공연 따위에 돈을 쓸 수 없다며 한사코 결제를 미루는 통에 내 속은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살면서 아무 때나 끼어드는 감정이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지만 일단 이런 기분이 들 때면 그러니까 누군가의 ‘동의’를 얻어야 실행할 수 있는 일들이 생길 때마다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낫겠구나’ 싶어진다. 짧은 순간 강하게 지배하는 이 마음은 공연을 보러 갈 때가 정점이다.
남자는 페스티벌을 즐길 줄 모르는 놈이다. 야외 공연을 볼라치면 뜨거운 태양에서는 그늘을 찾아달라고 조르고, 락 페스티벌에 가서는 귀가 아프다고 징징대고, 서 있기 싫다며 캠핑용 의자를 사 달라고 한다. 페스티벌에 가기 싫은 수백 가지의 짜증을 다발로 풀어 놓는 바람에 나 역시 이번만큼은 포기하려고 다짐하나 이 남자의 다음 행동 때문에 그리 할 수가 없다.
‘술독에 빠져 산다’는 표현처럼 남자는 페스티벌을 다녀온 후에는 그 여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취해 산다. 에든버러에서 화려한 카바레 쇼를 보고 와서는 호주에서 날라 온 공연 팀의 투어 일정을 따라 다니느라 바빴다. 여장남자의 끈적하고 야릇한 퍼포먼스를 보고는 신세계를 마주한 것처럼 설레였다. 어디 이뿐인가! 룰라팔루자에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라는 인생 밴드를 만난 후에는 여행 내내 그들의 음악을 따라 부르는 남자의 못난 성대를 참아내야 했다.
경험하지 않은 상태에서 찾아오는 ‘걱정’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을 남자는 상대에게 일일이 쏟아낸다. 정말이지 그의 세심한 성격 마냥 사소한 걱정까지도 하나하나 쏟아낸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축제의 가장 적극적인 관객으로 변모한다. 그러고는 다시 페스티벌 예약을 하려고 하면 축제에 빠져든 흥 많은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이 세상 이보다 아내를 더 괴롭힐 수 없는 ‘과잉 근심’의 사람이 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에든버러의 날씨처럼 변덕을 부리는 남자의 마음은 언제쯤 ‘일관성’을 띄려나?
과거 왕족의 통행로였던 ‘에든버러 로얄마일’은 8월에는 공연자와 관객을 위한 길로 바뀐다.
손 작은 남자
그녀가 한 달 내내 열리는 공연 축제를 보러 8월의 에든버러에 가야 한다고 했을 때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했다. 전세계 공연예술의 성대한 축제인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도시 전체를 연극 무대로 바꿔 버리는 한여름의 난장 '프린지 페스티벌' 그리고 전세계 군악대의 퍼레이드 '로얄 에든버러 밀리터리 타투’까지. 8월의 에든버러는 세계 최대의 공연이 열리는 축제의 도시이자 여행자의 지갑을 털어가는 곳이다.
늘 돈이 문제다. 물질로 소유할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가치인 ‘경험’에 지불하기에는 내 손은 너무 작다. 프린지 페스티벌 티켓은 싸게 구한다 해도 장당 1만 원이고 매년 22만명이 찾는다는 밀리터리 타투 퍼레이드는 싼 좌석도 10만 원씩이나 하니 한 달 내내 하루 두세 개의 공연을 보려면 기백만 원은 가져야 할 테다. 하지만 그 여자의 지론은 ‘돈이라는 것은 있다 가도 없고, 없다 가도 있는 것’이라 통장 잔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나의 선택의 기준에는 늘 ‘가격 대비 성능비’, 즉 가성비가 맨 앞에 놓인다. ‘가격에 합당한 품질’을 찾기보단 '무조건 저렴한 상품’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서 그런가? 보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은 없고 그저 SNS에 한 줄 올라가고 내가 그것을 보았구나 하는 정도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해야 하는가를 늘 자문한다. 공연비만도 아까운데 살인적이라 할 만큼 높은 영국의 물가를 어찌 견딜 것이며 축제가 열린다고 덩달아 2배가량 오르는 숙소비는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녀의 머리를 열어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선택의 기준인 가성비에 대해 알고는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국 예술과 문화를 즐기는 전세계인들이 몰려드는 도시에 도착하고 말았다. 도시 전체가 공연장으로 변모한 풍경을 상상조차 못 했는데 에든버러가 그러했다. 그 풍경에 압도되어 잠깐 고개를 돌리고 있으면 그녀는 이미 공연을 예매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투쟁은 고작 투덜거리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툴툴거리다 가도 공연장에 들어서면 관중을 압도하는 독특한 공연 앞에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최선을 다해 즐기는 나를 보고 그녀는 꼴 보기 싫다고 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그녀가 새삼 고맙다. 세상 그 어떤 물건이 울고 웃다가 충격에 빠뜨렸다가 감탄하게 만드는가? 이전까지 공연을 위해 돈을 쓰는 게 아까웠던 것은 내가 해보지 않고서 내린 결론이고 에든버러에서 나는 모든 가치 기준이던 ‘가성비’가 늘 옳은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공연장을 나서면 또다시 돈이 아까워지는 것을 보면 손 작은 나는 변하기 쉽지 않은가 보다. 내 손으로는 예매하기 힘드니 그 여자 옆에서 잔소리나 하면서 다음 공연을 쫓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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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