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
여행은 도피이자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
여행은 도피이자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이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도피하고 탈출하려는 대상과 여행을 통해 탐색하고 추구하려는 대상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방학을 맞아 인생의 첫 여행을 준비하는 대학생, 서로의 휴가 날짜를 맞추고 각자의 회사에다 “우리는 이번 여행을 꼭 같이 갈 거예요. 우리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다녀와서 더 열심히 일할게요. 그러니까 나 좀 잡지 마요!”라고 말하는 커플, 자식이 효도의 일환으로 보내주는 태국 마사지 여행을 기다리는 장년 여성, 아시아 명산 트레킹 계획을 짜는 산악회 회원들까지. 이들은 왜 여행을 떠나려 할까?
방랑과 모험 사이, 여행의 2가지 심리학적 동기
메릴랜드 대학의 이소 아홀라는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유래한 접근-회피 동기 개념을 이용해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날까”라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여행 동기 연구에 오랜 기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인간은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하려는 ‘접근 동기’에 따라 행동에 나서기도 하지만, 무언가를 피하고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는 ‘회피 동기’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상을 받고 칭찬을 듣기 위해 공부를 하지만, 수학에서 30점을 받았을 때 돌아올 무시무시한 벌을 피하기 위해서도 공부를 한다.
대부분의 경우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는 배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오직 칭찬을 듣기 위해서만 공부를 하거나 오직 벌을 피하기 위해서만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는 언제나 동시에 나타나서 일정한 비율로 조합된다. 세상 모든 일에는 A를 얻는 것과 B를 회피하는 측면이 전부 있기 때문이다.
이소 아홀라는 여행도 이와 똑같다고 말한다. 여행은 무엇인가를 피하려는 회피 활동인 동시에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는 접근 활동이다. 여행은 도피이자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이다. 따라서 여행을 통해 도피하고 탈출하려는 대상과 여행을 통해 탐색하고 추구하려는 대상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한 장면. “여행은 도피이자 탐색이며 탈출이자 추구이다”
일상의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은 여행을 통해 짜릿함과 재미를 찾아 나선다. 삶의 스트레스를 벗어나려 하는 사람은 여행을 통해 일과 가사에서 해방되어 편안함과 휴식을 얻기를 바란다. 한국 사람들과 한국 문화에서 탈출하고 싶은 사람은 여행을 통해 이국 타향의 문화에 취하려 한다. 의무적이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은 여행을 통해 진솔하고 깊은 인간관계를 만들려 한다. 결론적으로 여행은 우리가 회피하려 하는 일상의 어떤 것들과 정반대에 위치해 있는 경험에 접근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는 모든 잠재적 여행자의 마음속에 공존하며 여행을 부추긴다. 그렇지만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가 각기 어느 정도 비중으로 조합되느냐 하는 것도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두 동기의 조합 양상이 여행의 양상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여행의 양상은 여행자의 성격과 가치, 여행자가 수집한 정보, 여행지의 이미지, 타인의 영향, 여행 기술, 돈, 시간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되는데, 접근 동기와 회피 동기의 비율도 여기에 고유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회피 동기가 매우 높은 대신 접근 동기가 불명확할 경우에는 ‘방랑자’가 탄생할 수 있다. 방랑자 유형의 여행은 우리가 현재 속한 사회공동체에 대해 큰 불만과 실망감을 안고 있되 여행을 통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지는 정확히 모를 때 나타난다. 방랑자를 만드는 것은 진정성과 순수한 가치를 상실한 사회이고, 이 사회 속의 개인이 경험하는 아노미 상태이다. 방랑자의 여행은 길고 힘겹게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성공적인 방랑이란 여행이 끝날 무렵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간관계 네트워크, 새로운 삶의 목적, 새로운 지식 등을 얻어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물론 진정으로 이런 변화를 겪는 여행자는 별로 많지 않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탄생시킨 카잔차키스의 방랑적 여행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 위의 방랑자>(1818년경)
방랑자의 대명사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다. 카잔차키스는 유구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인 데다가 어린 시절부터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인 학살 등을 목격하며 자라나 타민족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의 현실에 뿌리 깊은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렇지만 카잔차키스를 방랑자로 만든 것은 식민 지배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1912년 독립전쟁에 참가하여 그리스 독립의 밀알이 되기까지의 카잔차키스는 오히려 목표 의식이 뚜렷하고 성실한 유학파 지식인에 가까웠다. 그의 진정한 고민은 독립 이후에 시작되었다. 오랜 기간 그리스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문화의 모태이자 서구 문명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해왔고, 그리스인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호메로스 등 창조적인 천재들의 후손으로 여겨져왔다. 더구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기까지 했으니 더할 나위 없는 희망과 유토피아적 분위기에 들떠도 좋을 터였다. 그런데 그리스는 왜 여전히 이토록 전근대적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카잔차키스는 과거의 화려했던 시절과 오랜 문화적 전통이 그리스 공동체의 발전을 담보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 전통문화에 깃든 인습에 주목했고, 긴 세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스 공동체의 자생적 발전 역량이 무너진 것에 안타까워했다. 한마디로 카잔차키스는 독립 후 그리스의 모습에 눈앞이 캄캄해져버렸다. 그리스의 미래와 그리스 민중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인 조르바> 영화 스틸컷.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쓰여 있다
결국 카잔차키스는 10여 년 동안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시베리아를 방랑하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답과 구원을 찾아다녔다. 카잔차키스가 당대 그리스 문화에 대해 품고 있던 문제의식과 그가 탐색해본 다양한 대안과 해답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비롯한 그의 여러 작품에 잘 담겨 있다.
여행의 심리학 김명철 저 | 어크로스
심리학과 여행학을 결합하고 여기에 자신의 여행 경험을 더한 이 독특하고도 기발한 여행안내서. 역마살의 정체에서부터 자신이 어떤 여행자 스타일인지, 여행에서 경험한 부정적인 정서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행복감을 오래 지속하는 법에 이르기까지 심리학자로서 여행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담았다.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와 심리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심리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타칭 ‘웃기는 심리학자’로 통하며, 도합 1년 5개월 12개국을 여행한 베테랑 여행가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를 ‘경험추구 여행자’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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