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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천명이다

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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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오십이 되었다. 지천명(知天命)이다. 그런데 내가 알아야 하는 하늘의 명령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 경거망동하면 안 될 것 같고, 화를 내거나 부딪치기 보다는 대범하게 포용하고 젊잖게 기다리라는 것 같기도 하다.

노비 문장(안 이후 로소 보이는 문장)

 

미국의 철학자 니컬러스 머리는 말했다. “‘30세에 죽었으나 60세에 묻혔다’ 라고 묘비에 써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은 인생의 첫 30년은 삶을 사는 데 쓰이고, 이후 40년은 삶을 이해하는 데 쓰여야 한다고 믿었다. 쇼펜하우어는 숫자를 역전시켜서 말했다. “인생의 첫 40년이 텍스트라면 나머지 30년은 그것에 대한 주석이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지음/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143쪽

 

작년에 오십이 되었다. 지천명(知天命)이다. 그런데 내가 알아야 하는 하늘의 명령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뭔가 경거망동하면 안 될 것 같고, 화를 내거나 부딪치기 보다는 대범하게 포용하고 젊잖게 기다리라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마흔 불혹(不惑)에도 나는 숱하게 흔들렸으니 2500년 전 공자의 분류법을 오늘에 대입한다는 것이 가당키야 하겠냐마는,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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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회장님은 돈이 아주 많다고 했다. 빌딩도 여러 채고 부동산도 엄청나다고 했다. 욕심도 없어서 이제는 본인이 재미있는 일만 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어떤 프로젝트를 도모 중인데 내가 자문을 해주면 좋겠다고 선배는 말했다. 내용은 몰라도 사람 만나는 것도 재산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며칠 후 회장님 사무실로 갔다.

 

선배가 부른 또 다른 사람들과 회장이 부른 두어 명까지 대략 열 명 정도가 어색하게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정작 회장은 한 시간 정도 늦게 나타났다. 60대의 왜소했지만 활기찬 모습이었다. 가장 상좌에 앉은 회장은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하라고 했다. 이후 두어시간 동안 회장은 자기 직원들에게 하듯 거의 혼자 말하고 혼자 소리쳤다.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거침없이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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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계속 이 프로가 생각났다.

 

거침없는 것은 사업뿐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여자 중에 누가 가장 영계인지를, 누가 처녀인지를 물었고 낄낄 웃었다. 그 단어는 수 차례 반복되었다. 나에게는 대뜸, 돈 잘 버냐고 물었다. 지난달 매출이 얼마이며, 대차대조표의 차변과 대변을 말해보라고 했다. 여성에 대한 성적 표현은 노골적으로 위험했고 사람 각자에 대한 직접적 질문은 공개적으로 무례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순간적이고 즉각적이어서 어느 누구도 마땅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나 역시, 이건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를 소개한 선배의 얼굴을 떠올리며, 설마설마 하며 머리 복잡한 염소처럼 얌전히 앉아있었다.


회의는 불편한 분위기에서 끝났고 회장은 밥을 사겠다고 했다. 여전히 해맑게 식당에서 자리 배치까지 하는 선배를 보니 먼저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기가 막힌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회장 옆에는 회의 때 서로 첫 인사를 나눈 두 명의 여자가 좌우로 앉았고 회장의 손은 그 중 한 여자의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반바지를 입고 있던 그녀는, 이러지 마시라며, 이것은 2천만 원짜리 처벌이라며 방석으로 다리를 가렸다. 그 옆에서 나는 전전긍긍했다. 회의장에서는 참았지만 이것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지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어디를 만지냐고 했다가 회장이 나에게, 당신 다리를 만지는 것도 아닌데 왜 난리야? 이러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사람들을 보니 다들 태연하게 수다를 떨고 회장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데 나 혼자 또 왜 이러나 싶기도 해서 고작 한다는 것이 성희롱 장면을 찍거나 음성 증거물이라도 녹취를 하려고 테이블 밑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식사를 마친 여자는 먼저 일어섰고 술이 거나하게 오른 회장은 다른 여자의 손을 꼭 잡고 술을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함께 동행했던 여자 선생에게, 왜 그 자리의 여자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항의하거나 저항하지 않는지를 묻자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권력 관계에서 상위에 있는 사람이 공공의 자리에서 성희롱을 할 때, 많은 여자들이 현장에서는 그저 당황하다가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모욕감과 수치심을 강하게 느낀다고 말했다. 그 말이 이해가 됐다. 낮에 회의 석상에서 나도 느닷없이 다가오는 쓰나미를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었으니까.


그날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또 다른 나는 잘 참았다고 속삭였다. 거기서 또 성질 부려서 네가 좋은 게 뭐가 있느냐, 이제 진짜 나이를 제대로 먹었구나, 선배를 봐서라도 잘한 것이다….


그러나 곧 다른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그 양반에게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런 수작질을 다 보고 참고 있느냐, 그 사람이 돈이 아무리 많다고 너에게 초코파이 하나 사준 적 없는데 뭐에 기가 눌려서 가만히 있었느냐, 뭐하나 떡고물이라도 떨어질 것을 생각해서 그런 거라면 결국 그런 택도 없는 기대감이 저런 괴물을 자꾸 만들어내는 것 아니냐, 게다가 너도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식당에서 밥이 네 목구멍으로 넘어가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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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출근하면서 그냥 다 잊자고 했지만 ‘방관’ ‘미안함’ 같은 단어들이 계속 명치끝을 콕콕 눌렀다. 결국 어제 받았던 명함을 꺼내 여자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식당에서 제 마음이 참 좋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웃으며, 선생님이 계속 불편해하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어요. 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다 아는 나이이고, 그런 것을 강력하게 항의하려면 얼마든 할 수 있는 강단도 자신에게 있지만, 그런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리드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말라고 하며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내 미안함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도 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오지랖을 떤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녀가 괜찮은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회장이 식당에서 했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한 내 분노는 여전히 유효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당신 같은 사람이 사는 밥을 내가 먹을 이유는 없다라고 했어야 옳았다. 손님을 불러놓고 이런 식의 회의와 성추행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짓이라고 그 유희의 판을 깨는 대응을 했어야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 회장의 품성의 문제도, 그 노인에게 성희롱을 당한 여자들의 태도 문제도 아닌 바로 내 삶의 자세 문제였던 것이다.

 

데이비드 실즈의 에세이,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옮긴이의 말을 따른다면 이 책은 파괴적 논픽션이다. 그러나 이 말이 귀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 부자(父子) 관계와 스포츠와 위인들의 명언들과 몸의 과학과 통계 등으로 풀어낸 책이다. 내용이 특별하기 보다는 구성 자체가 독특한 책이다. 잘 지은 밥과 좋은 고추장과 신선한 야채와 화려한 고명을 아주 절묘하게 배합한 멋진 비빔밥 한 그릇을 먹는 맛이라고 할까? 특히 공자, 셰익스피어, 오스카 와일드, 우디 앨렌과 무명의 택시 운전사까지 등장시키며 그들의 경구를 속도감 있게 정리해내는 방식은 압권이다.

 

노비문장도 그 중에 하나다.

 

“30세에 죽었으나 60세에 묻혔다”는 니컬러스 머리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고대 페르시아 사람들이나 쇼펜 하우어가 말한 대로, 나이가 들면 더 깊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살았으되 죽은 삶이다. 한마디로 나이가 벼슬이 아니며 돈이 만능이 아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제목만으로도 지천명 이후의 삶에 던지는 죽비로서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이 기회에 나에게 하달된 하늘의 명령을 내 방식으로 정리하려 한다. 이것도 흥, 저것도 흥이 아니라 , 설령 그것이 내 밥벌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껍데기에 눈이 멀어 사람들 두고 찧고 까부는 좀비들에게는, 그 현장과 면전에서 “ 즐 처노샘!” 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메갈이 뭔지, 영란씨가 뭔지 복잡해서 잘 모르는 중늙은이가 그나마 세상의 상식을 믿는 젊은이와 약자에게 해줄 수 있는 방어이자 하늘의 명령이라고, 나는 결론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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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용인(<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저자, 노매드 대표이사)

<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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