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둘만의 낙원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노래

레이먼드 카버의 「깃털들」과 <파리, 텍사스> OST의 ‘Cancion Mixteca’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대성당』에 실린 다른 단편 ‘칸막이 객실’은 레이먼드 카버의 이런 생각을 직접 드러낸다. 그렇다면 소설 속 잭이, 그리고 소설 밖 레이먼드가 잃어버린 낙원은 어떤 모습일까? 그에 대해서는 트래비스가 손에 잡힐 듯 묘사한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고통을 담은 노래와 함께.

  • | 11

크기변환_L.jpg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의 첫 단편 「깃털들」은 직장 동료인 버드의 초대를 받은 잭이 아내인 프랜과 함께 그의 시골집까지 찾아가면서 시작한다. 그때까지 잭과 프랜은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러울 것이 없는 부부의 삶 앞에 끔찍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공작 한 마리가 내려앉는다. 


“하느님.” 프랜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녀는 내 무릎 위로 손을 뻗었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또 말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새는 그 괴기하고도 구슬픈 울음소리를 한번 더 냈다. “메이오, 메이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깊은 밤, 생전 처음 그런 소리를 듣게 됐다면, 아마도 나는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고, 혹은 야생의, 위험한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18쪽) 


이 장면에서 잭과 프랜은 공작을 보며 ‘하느님(God)’이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중얼거린다. 한국어로는 ‘저런’, ‘빌어먹을’ 따위로 번역될 감탄사지만, 그들이 ‘God’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집안으로 들어가 왜 그런 이상한 새를 키우게 됐는지 사연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리라. 하지만 그 전에 부부가 봐야만 하는 불쾌한 장면은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데이지 몇 송이가 꽂힌 가느다란 빨간색 꽃병 옆의 석고 치형이다. 



낙원의 새 앞에서 읊조리는 네 번의 ‘하느님’ 


그 흉측한 물건에는 입술도, 턱도 없었고 다만 두터운 노란색 잇몸처럼 보이는 것 안에 석고 치아만 박혀 있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건 버드의 아내인 올라가 치아 교정을 받기 전의 치형을 석고로 본뜬 것이다. 올라는 그 치형과 교정한 치형을 비교할 수 있도록 입을 벌리는데, 거기에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선 올라는 소녀시절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언젠가 한 번은 공작을 키우리라 결심했다고 말한다. 이에 버드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에는 내가 찾아나섰습니다.” 버드가 말했다. “옆 카운티의 어떤 녀석이 공작들을 기른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 사람은 공작이 낙원의 새라고 말하더군요. 우리는 그 낙원의 새에 백 달러를 지불했지요.” 그는 이마를 툭 쳤다. “전지전능한 하느님, 왜 제게 이토록 사치스런 취미를 가진 마누라를 주셨습니까.”(32쪽) 


공작은 ‘극락조과(Birds of Paradise)’가 아닌 꿩과인데도 이 장면에서 버드는 그렇게 말한다. 공작을 ‘낙원(Paradise)’와 연결시켜서 본 건 잭과 프랜도 마찬가지다. 공작을 보자마자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네 번의 ‘하느님(God)’은 공작이 암시하는 낙원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낙원이라는 단어는 ‘원죄’와 ‘추방’으로 이어진다. 여기까지의 이미지들을 차례로 머릿속에 떠올린 잭과 프랜 앞에 올라가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장담하건대, 그렇게 못생긴 아기는 여태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못 생겼는지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내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병이 있다거나 기형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못생겼을 뿐이었다. 엄청나게 큰 붉은 얼굴에 툭 튀어나온 눈, 널따란 이마와 비대한 입술. 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고 살찐 턱은 서너 겹에 달했다. 턱의 주름은 귀밑까지 이어졌고 두 귀는 민둥머리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손목도 온통 살투성이였다. 팔과 손가락에도 피둥피둥 살이 붙어 있었다. 못생겼다는 말조차 녀석에게는 영예로울 정도였다.(34쪽) 



예전의 두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이 소설만 놓고 보면, 여기서 왜 이렇게 못생긴 아기가 등장하는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아기를 보고 돌아와서는 잭과 프랜이 계획에도 없는 아이를 가지고, 그 뒤로는 두 사람의 삶에 변화가 생긴다. 잭은 그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굳이 말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설명한다.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날 법한 변화였지, 자신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하자면 그들은 원치 않은 변화였다는 뜻이다. 잭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의 OST에는 사운드트랙을 그대로 옮겨놓은 부분이 있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자신을 떠난 아내를 찾은 트래비스가 환락가 유리창 너머의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을 그대로 수록한 「I Knew These People」이다. 이 장면에서 트래비스는 제인을 만났을 때,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또 그녀는 트래비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얘기한다. 


「깃털들」에서 버드가 자신들을 집에 초대했다는 잭의 말을 들었을 때 “왜 우리에게 다른 사람이 필요해?”라고 되묻는듯한 표정을 지은 프랜처럼, 둘이 함께 있으면 다른 건 하나도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고 트래비스는 말한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이야기를 듣던 제인은 트래비스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의 두 남녀가 트레일러에서 살았다는 말을 듣고는 유리벽 너머에 앉은 남자가 전 남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어느 밤, 어느 밤에 그녀가 그에게 얘기해. 임신했다고. 임신한 지 3,4개월이 됐다고. 그런데도 그는 전혀 몰랐던 거지.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게 달라졌어. 그는 술을 끊고, 안정된 직장을 구해. 자기 아이를 가졌으니까 이제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래서 그녀를 위해 멋진 가정을 꾸리는데 진력을 다하겠다, 그랬던 거야. 그런데 웃긴 일이 벌어져. 처음에는 눈치도 못 챘지. 그녀가 변하고 있다는 걸. 아기가 태어난 바로 그 날부터 그녀는 모든 일에 짜증을 내기 시작해. 모든 게 다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아기마저도 그녀에게는 부당한 뭔가가 되는 거지. 그는 모든 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그녀에게 알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써. 그녀를 위해 물건들을 구입하고, 매주 외식을 하고. 하지만 그 무엇에도 그녀는 만족하지 않지. 그렇게 2년 정도, 그는 처음 만났을 때의 두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어. 그리고 마침내 알게 되지. 예전의 두 사람으로 돌아가는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걸.(트래비스의 대사 중) 


이 부분에서 어떤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도 아주 오래 전에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드는 노래. 마치 그렇게 만나기로 예정된 것처럼 두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듯이. 기시감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건 기청감이라고 해야만 할까?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이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렸다. ‘Cancion Mixteca’, 즉 ‘미슈테카의 노래’란 뜻으로 멕시코 서민음악인 란체라 중에서도 유명한 이 노래는 멕시코 와하카 출신의 작곡가 호세 로페즈 알라베스가 멕시코시티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만들었다. 



우린 또 얼마나 멀리 왔는지! 


이 노래와 대사를 통해 「깃털들」 역시 사랑하는 두 남녀가 낙원에서 추방된 이유가 아이의 탄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대성당』에 실린 다른 단편 칸막이 객실은 레이먼드 카버의 이런 생각을 직접 드러낸다. 그렇다면 소설 속 잭이, 그리고 소설 밖 레이먼드가 잃어버린 낙원은 어떤 모습일까? 그에 대해서는 트래비스가 손에 잡힐 듯 묘사한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고통을 담은 노래와 함께. 


어떤 사람들을 알아, 어떤 두 사람을. 둘은 서로 사랑했지. 여자는 아주 어렸는데, 아마 열일곱, 아니면 열여덟이었고 남자는 그보다는 꽤 많았지. 그 사람은 덥수룩한데다가 봉두난발. 반면에 여자는 정말 예뻤단 말이야, 진짜로. 둘이 있으면 모든 게 모험 같은 걸로 바뀌었어. 그녀가 그걸 좋아했지. 동네 가게에 가는 평범한 일도 완전 신나는 일이 되어버렸던 거야. 둘은 우스꽝스러운 것을 보면 언제나 웃음을 터뜨렸지. 그 남자는 그녀를 웃게 하는 일이 좋았어. 둘은 다른 건 하나도 신경쓰지 않았어. 왜냐하면 그들이 원한 건 둘이 함께 있는 것 뿐이었으니까. 둘은 항상 함께 있었고, 그는…, 그 남자는 그녀를 죽을 만큼 사랑했어. (트래비스의 대사 중) 


나 태어난 곳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크나큰 그리움이 밀려와 마음이 먹먹하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외롭고 서러운 내 신세여, 

감정이 북받쳐 울고만 싶다네, 죽고만 싶다네. (「Cancion Mixteca」의 가사 중) 


살아가는 한, 그리고 사랑하는 한, 우리는 고향을 영영 잃어버린 실향민의 처지를 피할 길이 없다. 누구나 나이가 들 테고, 어떤 사랑이든 끝이 날 테니까. 다들 그런 일이란 다른 사람들에게나 일어날 법한 것이지 자신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믿겠지만, 결국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 구원의 실마리가 있다.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11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 저/<김연수> 역12,150원(10% + 5%)

소설가 김연수의 번역으로 만나는 카버 문학의 정수! “의심의 여지 없이 레이먼드 카버는 나의 가장 소중한 문학적 스승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문학적 동반자였다.” _무라카미 하루키 ‘헤밍웨이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소설가’ ‘리얼리즘의 대가’ ‘미국의 체호프’ 등으로 불리며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가로..

  • 카트
  • 리스트
  • 바로구매

오늘의 책

트럼프의 귀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거머쥔 트럼프.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 트럼프 2기 정부의 명암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박종훈 저자의 신간이다. 강경한 슈퍼 트럼프의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 그 전략을 제시한다.

이래도 안 읽으실 건가요

텍스트 힙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독서가 우리 삶에 필요해서다. 일본 뇌과학계 권위자가 뇌과학으로 입증하는 독서 예찬론. 책을 읽으면 뇌가 깨어난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상승하며 즐겁기까지 하다. 책의 장르는 상관 없다.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소설

출간 즉시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관련 영상을 제작하려 하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떠난 크루즈 여행 중 숨겨진 진실과 사라진 작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밝혀진다.

우리 아이 영어 공부, 이렇게만 하세요!

영어교육 전문가이자 유튜브 <교집합 스튜디오> 멘토 권태형 소장의 첫 영어 자녀 교육서. 다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 영어 교육의 현실과 아이들의 다양한 학습 성향에 맞는 영어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부모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과 실천 방안을 담았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