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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정해진 길은 없다
『중쇄를 찍자』를 읽고
코코로는 ‘난 뭘하고 싶은 걸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평소 좋아하던 만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출판사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쿄토칸이란 대형 출판사에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사치스러운 질문이 된 “꿈이 뭐예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뭐 하나가 되려면 처음부터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최근 대학 입시 대세는 ‘학술부 종합전형’(이하 학종)이다. 전과 달리 내신, 수능, 논술만 준비하면 되는 게 아니라, ‘비교과 활동’까지 추가되었다. ‘학종’에 비판적인 학부모나 학생들은 일찍부터 일관되게 자기가 갈 학과에 맞춰서 동아리, 교내 경시대회, 학술 논문 등 활동을 해야만 자기소개서를 알차게 채울 수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각 대학의 입시담당자들이 그러지 않다고 아무리 부정을 해도 ‘미리미리 잘 갖춰진 준비를 해야 좋을 것’이라는 믿음의 단단함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는다. 학종이 뭔들.
여하튼 이런 식으로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가 그린 로드맵에 따라 차근차근 준비를 단단히 하면서 살아왔다. 결국 영어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사립초등학교, 국제중학교, 특목고나 자사고를 거쳐 명문 대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성공을 했다고 치자. 자, 고생 끝 행복 시작일까?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도 스펙을 만들어 철저한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 대2병도 생겼다고 한다. 결국 취업에 성공한다고 해도,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기업에 입사한 대졸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은 27.7%로 2년 전 25.2%보다 2.5%포인트 올랐다. 49.1%가 ‘조직ㆍ직무 적응 실패’ 때문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왔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일 아닐까?
이와 관련한 뉴스를 읽다 보면 “내가 이런 일 하러 들어온 게 아닌데”, “조직 문화에 적응하기가 어려워요”라고 말하고, 상급 관리자들은 “과거에 비해서 적응을 잘 못하는 새내기 직원이 많다.”고 한다. 개인이 오버 스펙을 쌓으면서 기업 자체가 신입직원 급에게 바라는 역량을 초과한 상태로 입사를 하니, 일과 자신의 역량 사이의 미스매치가 벌어진 것, 자기가 그렸던 일과 실제 하는 일 사이의 괴리가 크다는 것, 더 나아가 기업의 조직문화의 경직성과 관료화가 과거에 비해 더욱 심화된 것이 청년세대의 삶의 기본 가치관과 충돌을 더욱 하게 된 것 등이 복합적인 원인이다.
이 모든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지만 사실은 사회적 환경의 큰 변화가 더 큰 원인이다. 좋은 자리는 뻔한 숫자인데 모두가 그것을 원하니 그 자리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은 심화된다. 그러니, 갈수록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니 일을 시작하기 전에 벌써 지친다. 막상 들어가서는 쓸모가 없는 기능이 많이 탑재되어있을 뿐이라 몸과 마음만 무거워진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낭비가 이만저만 아니다. 그렇다고 사회 탓만 하기엔 인생이 짧다.
이런 압력이 워낙 강한데도 불구하고, “꿈이 뭐예요?”라고 묻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질문이 되는 이 시기에 꿈을 찾아 10여 년 동안 한 길로 걸어온 길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도 늘어난다.
2015년 『구글보다 요리였어』라는 책을 낸 안주원 씨는 십 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뒤, 명문 코넬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구글 코리아에 입사를 한다. 그러나, 26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회사를 과감히 그만두고 미국의 조리 프로그램에서 요리를 공부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인턴을 한다. 양식을 배웠는데, 여기서 한식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서울의 정식당에서 일했고, 출간을 할 때에는 경리단길의 한국술집에서 주방장을 하기 시작했다. 궁금한 김에 개인적으로 경리단길의 그 술집에 가보기도 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그녀가 미국 최고의 대학을 나와 구글코리아를 박차고 요리사가 된 경력에 집중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낭비도 저런 낭비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좋은 대학을 나와서 최고의 직장을 다녔으니 요리도 잘 할 것이라 기대한 것 자체가 넌센스이기도 하였고. 이런 시가 있다.
나는 영훈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 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화제가 되었던 「여덟 살의 꿈」이라는 제목의 시의 현실판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쨌거나 막상 좋아하는 길을 찾았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싶기는 했다. 물론 안주원 씨도 어릴 때부터 요리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가다 보니, 매번 새로운 욕망이 생기고, 그때마다 최선을 다하여 그것을 찾아가다 보니 지금 그 자리에 서있게 된 것이었겠지. 그러나, 그런 행동이 모두의 롤모델이 될 필요는 없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일
한길로만 죽 가도 막상 가보면 만족이 안되고,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결국 전혀 다른 길로 간 것은 참으로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아 안쓰럽다. 뭐가 정답이지?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런 마음에 약간의 생각의 실마리를 주는 만화책이 있다. 마츠다 나오코의 『중쇄를 찍자』다.
이 만화의 주인공 쿠로사와 코코로는 일본체육대학 여자유도부 선수였다. 어릴 때부터 줄곧 운동만 했고, 금메달을 따기 위한 노력만을 하면서 살아왔다. 올림픽을 노릴 정도의 우수한 선수였다. 그러나 부상으로 그 목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때 코코로는 ‘난 뭘하고 싶은 걸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평소 좋아하던 만화를 만드는 일을 하는 출판사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에 쿄토칸이란 대형 출판사에 지원을 하게 된 것이다. 코코로는 무사히 취업에 성공을 하고, <주간 바이브스>라는 잡지사로 발령을 받아서 초보 편집자로 만화가와 관계를 맺어나가고, 선배들로부터 일을 배우는 좌충우돌이 만화 속에 펼쳐진다. 쿠로사와 코코로는 새끼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체력 하나는 끝내주고, 무엇이든 먼저 물어보고 배우려고 하고, 근성 있게 좌절하지 않고 낙관적인 태도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 나간다. 처음에는 “’운동선수 출신’이 뭘 하겠어?”라고 삐딱한 호기심으로 보던 선배나 만화가도 쿠로사와 코코로를 자기도 모르게 응원을 하게 되었다. 더 좋은 만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만화가의 고민과 기획을 함께 하며 2인3각으로 험한 길을 같이 가는 편집자, 그리고 회사 내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팔 수 있을지 고민하는 영업자와 편집자 사이의 갈등, 서점의 직원들이 좋아하는 만화를 팔기 위해 하는 노력 등이 다양한 에피소드로 그려진다.
이 만화에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단연 쿠로사와 코코로다. 유도선수로 10여년을 살았고 올림픽이 눈앞에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금메달을 노릴 수 없고, 선수생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부상을 입은 상황을 곱씹고, 세상을 원망하고, 자신의 불행을 저주할 것이다. 운동만 하던 사람이라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비록 대학생이지만 체육대학을 나왔으니 취업을 할 수 도 없다. 좌절의 나날을 보내다 자칫 폐인이 되기 쉬운 상황이다.
하지만 코코로는 달랐다. 자신이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무식하게 통째로 외워서 어려운 필기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하고 면접까지도 의외성을 보이면 패스한다. 그녀가 해온 운동도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근성과 체력을, 또한 지고 난 다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완벽하게 체화되어 있고, 오랜 선수생활을 하면서 체득한 협동과 응원의 힘을 믿는 것이 의외로 출판사와 그녀가 담당한 만화가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었다.
이 만화는 아직 3권밖에 한국에서 출간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드라마로 방영이 되었다. 쿠로키 하루가 주인공을 맡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오다기리 조가 이오키베 부편집장으로 등장하는데, 만화의 활력 이상의 즐거움을 주니, 기회가 되면 한 번 시청을 해보시기를 권한다.
이 만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이렇다. 인생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뭘 하겠다고 정해놓고 목표를 찍고 거기서부터 일직선으로 자를 대고 줄을 그은 다음 그 길만 가서 가장 빠른 시간에 목표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 거의 없지 않을까? 인생이란 변수로 가득 찬 지뢰밭 비슷한 것이란 생각을 많이 한다. 쿠로사와 코코로가 유도선수에서 한 명의 멋진 편집자가 될 수 있었고, 거기에 그녀의 유도선수 생활이 좋은 밑거름이 되었듯이, 처음 내가 바라면서 노력한 길로 가지 못할 수 있고, 막상 가보면 그게 아니라서 실망할 수 있고, 또 돌아갈 수도 있고 멈춰서야 하는 날도 있을 수 있다.
경리단에서 요리사를 하는 안주원 씨도 생각해보면 지금 이 자리를 찾을 때까지 진짜 멀고 길게 돌아온 셈 아닌가? 그렇다고 실망은 할 수 있지만 좌절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냥 거기서 그대로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 게 원래 인생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돌아간다고 해도 다 돌아가는 과정에 경험한 것들이 내 인생의 다음 과정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인생은 목적 없는 여행과 같아서, 누가 누가 먼저가나, 누가 더 효율적으로 가나의 경쟁이 되어선 안 된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여기서 한 번 내려볼까’라는 마음이 들면 훌쩍 내려서 둘러보기도 하고, 또 기차가 고장으로 멈춰서거나 실수로 잘못 탔다면 그것도 여행의 일부로 여기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런 마음의 태도를 갖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중쇄를 찍자! 마츠다 나오코 글,그림/주원일 역 | 애니북스
그토록 그리던 만화편집부에 배치된 그녀는 부푼 꿈을 안고 첫 출근을 한다. 그러나 예상밖으로 만화편집부는 책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눈물, 인생이 걸려 있는 격전지였다. 그 치열한 현장에서 그녀의 뜨거운 업무열전이 지금 시작된다!
관련태그: 중쇄를 찍자, 구글보다 요리였어, 꿈, 목표, 인생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읽는 것을 좋아했다. 덕분에 지금은 독서가인지 애장가인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정신과 의사. 건국대 의대에서 치료하고, 가르치고, 글을 쓰며 지내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도시심리학', '소통과 공감'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