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색깔로 살라
『자신만의 하늘을 가져라』 나무에게 배우는 자존감의 지혜
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얼굴을 뜻하는 한자 ‘상相’은 ‘눈으로 나무를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나무를 만나면서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나무를 통해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삶은 농촌의 산천과 초등학교 운동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경상남도에서도 오지 중에 오지인 창녕군 고암면의 땅과 하늘과 나무를 학창 시절 내내 온몸으로 만나며 살았습니다. 고향 산천은 내가 하는 모든 공부의 바탕입니다.
고향에서의 경험은 나보다 서른두 살이나 많은 아버지의 경험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내 기억 속에 부모님의 사랑스런 손짓이나 따뜻한 칭찬 같은 것은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계속된 논밭일과 부모님이 자주 다툰 기억들뿐입니다. 하지만 평생 농사일을 한 부모님 밑에서 자란 덕에 보리와 밀을 구별할 줄 알고, 소와 경운기로 논밭을 갈 줄 알며, 두부를 만들 줄 알고, 일상에서 먹는 음식의 재료를 알고 있습니다.
공자는 늘 아들과 제자들에게 『시경』을 강조했습니다. 『시경』을 모르면 말을 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다양한 사물을 익히는 데 그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농촌에서 자란 덕에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대학 시절까지도 산에 가서 소에게 풀을 먹이고, 들에 가서 풀을 베는 일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소와 사람이 먹는 식물을 구분할 줄 압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아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여름에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기기도 했고, 신작로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피리를 불기도 했습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나는 나무를 만난 뒤로 경험을 충분히 살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일상의 경험을 학문의 영역으로 확장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무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내 삶 속에 언제나 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절박한 순간에 나무를 찾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찾듯이 말입니다.
나는 나무에게 길을 물었습니다. 나무는 내가 늘 만나는 존재였고,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무는 인간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절박한 순간에 나무에게 길을 물었던 것은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돈이 들지 않으니까요. 누구든 돈 한 푼 들이지 않아도 한 발짝만 움직이면 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만날 수 있고,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얼굴을 뜻하는 한자 ‘상相’은 ‘눈으로 나무를 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내가 나무를 만나면서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나무를 통해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의미 아닐까요. 나무를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작은 키와 못생긴 얼굴,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부모와 형제를 원망했습니다. 지방대학이라는 출신과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는 스승을 탓했으며,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분노했습니다. 나의 처지를 변명하고, 남 탓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바뀌는 것은 없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자존하지 않은 채 남에게 이끌려 살았던 것입니다. 나무를 만나기 전까지 나의 삶은 『장자』에 나오는 ‘한단지보邯鄲之步’ 이야기와 닮아 있습니다. 전국 시대 연나라 출신의 한 젊은이가 조나라의 서울인 한단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배우다가 자신이 연나라 때 걷던 걸음걸이조차 잊어버려 엉금엉금 기어서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남 흉내만 내다가 본래 자신의 본성마저 잃어버린 셈이죠.
나는 나무를 만난 이후로 자존할 수 있었습니다. 자존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자존하는 사람은 자신의 못난 부분까지 온전히 받아들여 그 자체를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않죠. 사람은 저마다 결이 있습니다. 나무의 결처럼 사람도 자신의 결대로 살아가야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흔히 소크라테스가 못생겼다고 하지만, 과연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추남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까요? 만약 소크라테스가 추남이라는 말에 얽매였다면 결코 위대한 철학자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타고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 사람이었습니다. 나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수용한 뒤에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생은 남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 ‘추격의 삶’입니다. 이런 삶은 쉽게 지칩니다. 그러나 자신의 걸음과 결을 따라 걷는 ‘선도先導의 삶’은 즐겁습니다. 나는 나무를 만나 ‘추격의 삶’에서 ‘선도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무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다른 존재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과 비교한다면 ‘추격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선도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무처럼 사는 것이죠. 나무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지금부터 나무를 만나고 자존감을 되찾은 나의 경험을 이야기할까 합니다.
자신만의 하늘을 가져라강판권 저 | 샘터
나무가 좋아 ‘나무인간’이 된 ‘쥐똥나무’ 강판권. 자괴감에 빠져 힘든 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나무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그가 나무에게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자존감이다. 그가 본 나무는 결코 다른 나무와 비교하지 않으며 홀로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나무의 삶처럼 인간도 자신의 결대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지혜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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