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은 출발점 위치를 결정하는 잣대다
구글 최고 엘리트 출신 한국인 청년의 비즈니스 모험기 ③
좋은 머리를 갖고 태어나 남보다 앞서가는 학생들처럼, 뛰어난 스펙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는 창업자들이 분명 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디서 시작하느냐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고 바꿀 수 없다. 내 출발점을 파악한 뒤 뒤처진 거리만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스펙이 좋은 사람들이 한 걸음을 옮길 때 나는 두 걸음을 옮기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스펙은 출발점 위치를 결정하는 잣대다
우리가 미국의 유명한 창업지원기관인 테크스타스(TechStars)에 지원을 고려하던 시기에는 와이컴비네이터와 테크스타스가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이 중 한곳에 들어간다면 스타트업 창업자로서는 대단한 영광이자 기회라는 게 업계 전반의 인식이었다.
우리는 테크스타스에 지원하긴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합격한 회사들을 살펴보니 평균 1~2년 정도 운영해온 회사들이 많았고, 어느 정도의 가능성이 이미 증명됐고 액셀러레이터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명확했다. 이들 회사와 비교했을 때 우리는 시작한 지 3개월도 안 된 회사였고, 보여줄 만한 제품도 아직 없었을 뿐더러 우리의 아이디어가 가능성이 있는지도 전혀 증명이 안 된 상태였다.
다행히 우리는 이런 사실을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었고 그 상황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두 가지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우리 팀원들의 스펙과 실력이었다. 스펙은 그 팀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아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회사의 잠재력이 될 수 있다. 우리 팀원들은 테크스타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스펙을 갖고 있었다. 물론 스펙이 좋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학교든 회사든 서류 면접은 쉽게 통과할 수 있다. 당시 우리는 회사 상황과는 무관하게 스펙만으로 곧바로 인터뷰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스펙이 잠재력이라면 실력은 잠재력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테크스타스 프로그램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실력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한 가지 방법을 강구해냈다. 제품 출시일을 조금 앞당겨 매주 진행 과정을 테크스타스에 보고하기로 했던 것이다. 최종 합격 결정이 나기 전까지 몇 주 동안 우리는 제품 개발 속도를 위험 수준까지 끌어올렸고 그 결과 매주 가까스로 개발 상황을 보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스펙뿐 아니라 실력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됐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막상 합격 소식이 날아들자 믿어지지 않았다. 합격 소식을 전해준 프로그램 책임자는 매우 힘든 결정이었다고 고백했다. 창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검증된 제품이 없는 회사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결정적으로 그들을 설득시킨 건 우리가 증명해보인 개발 실력이었고, 처음에 그들의 관심을 끈 건 팀원들의 스펙이었다. 스펙이 우리에게 둘도 없는 기회를 선물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펙이 좋지 않은 팀은 희망이 없는 걸까? 스펙이 그처럼 중요한 요소라면 상대적으로 스펙이 좋지 않은 팀은 스타트업의 꿈을 접어야 할까? 나는 그동안 스펙에 관련된 질문을 수없이 받았다.
“일류 대학을 못 나왔는데 이건 스타트업 창업과는 무관하겠죠?”
“지금 다니는 곳이 대기업이 아닌데 스타트업을 할 때 크게 불리한 건 없겠죠?”
“스펙이 좋지 않은데 지금 지원받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이런 것에 신경 쓸까요?”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스타트업은 시쳇말로 계급장 떼고 하는 싸움이고, 스펙과는 무관합니다!”
하지만 이는 포장된 답변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테크스타스 합격 성공담이 증명하듯이 실제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는 스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현실적인 조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펙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좀 더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스펙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스펙과 스타트업 창업은 무관하다. 하지만 나보다 스펙이 좋은 사람과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해 같은 속도로 달릴 수 있을 거라는 어리석은 기대는 버려야 한다.”
스펙이 나보다 좋다는 건 결국 지금까지 나보다 더 열심히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노력을 통해 쌓은 스펙으로 나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시작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사실이 못마땅하겠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스펙이 좋으면 더 쉽게 기회를 얻고, 더 많은 관심을 받으며, 일도 더 순조롭게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스타트업이라는 마라톤에서 스펙은 남보다 좀 더 앞에서 달릴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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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열두 살 때 부모를 따라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 오클랜드대학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과 경영학을 공부하고 IBM에서 컨설턴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글로벌기업에 취직했지만 단순한 업무와 불투명한 미래에 회의를 느끼고 평소 동경하던 구글로 눈길을 돌렸다. 매년 전 세계에서 약 30명만 뽑는 구글 최고 엘리트 프로그램인 APM(Associate Product Manager)에 합격해 마운틴뷰 구글 캠퍼스에서 광고 프로그램인 애드센스(AdSense)와 글로벌 블로그 서비스인 블로거(Blogger) 업무를 담당했다. 큰 역할을 기대했던 구글에서의 일상이 지루하게 느껴지면서 새로운 도전에 목말랐다. ‘5년이나 10년 후에 어떤 선택이 덜 후회될까?’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고, 마침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을 안고 스타트업 창업에 나섰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스타트업의 여정은 혹독했다. 세계적 창업지원기관인 테크스타스에 참가했다가 좌절과 상처만 안고 뉴질랜드로 돌아갔을 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파부침주(破釜沈舟)의 심정으로 두려움의 맨 얼굴과 마주했고 초심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아이폰용 캘린더 앱인 카나리(Canary)를 개발했으며, 앱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도메인 업계의 구글이라 할 수 있는 도메인 제공업체 고대디(GoDaddy)와의 인수합병에 성공했다. 현재 고대디 샌프란시스코 오피스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며 여전히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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