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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와 대항해 시대의 개막
정화가 항해를 시작한 이유
콜럼버스는 서양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집요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항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황금의 땅으로 알려진 인도로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콜럼버스와 대항해 시대의 개막
먼저 콜럼버스의 삶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콜럼버스는 서양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집요하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항해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황금의 땅으로 알려진 인도로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여러 차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에서 인도로 가는 항해를 지원해줄 후원자를 찾았다. 그러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콜럼버스에게 후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은 에스파냐의 이사벨Isabel 1세 여왕이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 여왕과 산타페 협약Santa Fe Capitulations을 맺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통해 발견한 땅의 부왕副王이 되고 그 직책과 그에 따라 생기는 이익의 10분의 1을 챙길 수 있는 특권을 후손까지 부여받기로 한다. 그 대신 이사벨 여왕은 자금의 제공과 과거의 죄를 사면해주는 조건으로 승무원을 모집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선박 두 척을 내주었다. 여기에 핀손이라는 선장이 자기 소유의 산타마리아호와 함께 참가했다.
1492년 8월 3일 땅과 재물에 대한 부푼 욕망과 죄의 사면을 위해 승선한 선원을 태우고 콜럼버스가 지휘하는 배가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10월 12일에 오늘날의 바하마제도에 속한 섬에 도착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오늘날의 쿠바와 아이티에 상륙해서 그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우리는 흔히 별생각 없이 콜럼버스가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콜럼버스 일행은 새로운 땅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이미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먼 옛날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에 있는 베링 해가 얼었을 때 유라시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다. 쉽게 비유하면 서울에 사는 사람이 인적이 드문 지방에 가서 그곳의 땅을 자기가 발견했다고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다.
흔히 말하는 이 말은 유럽인들의 오만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말에는 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인류로 취급하지 않는 ‘서양 중심주의’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콜럼버스 일행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다.
한편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의 선장 핀손과 사이가 틀어져 다음해 3월에 귀국했다. 그러나 산타페협약Santa Fe Capitulations에 따라 콜럼버스는 새롭게 차지한 땅의 부왕으로 임명되었다. 콜럼버스의 성공은 유럽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콜럼버스가 가지고 온 금은 유럽인의 욕망을 부채질했다. 황금으로 빛나는 신대륙에 대한 환상이 생겨났다.
따라서 두 번째 항해에 무려 열일곱 척의 배와 1,500명이 참가한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다. 이들 대부분은 황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원정대는 원하는 만큼의 황금을 얻지 못했다.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그들은 그 땅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항해를 계속했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마침내 콜럼버스가 얻었던 직책의 세습이 박탈되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도착했던 땅이 여전히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라고 믿으며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많은 것을 남겼다. 가장 큰 것은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던 아메리카가 유럽인들의 식민지로 변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고통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1890년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졌다. 미국의 기병대가 어린이와 여자 230명이 포함된 350명의 인디언 포로 가운데 300명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유럽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그곳에 예전부터 살고 있던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첫 만남은 황금에 대한 욕망이 개입하면서 불행으로 얼룩졌다. 유럽은 아메리카를 자기들과 동일한 인류가 사는 곳이 아닌 황금의 땅으로 소외시키고 대상화했으며 그것은 엄청난 비극을 낳게 했다.
정화가 항해를 시작한 이유
콜럼버스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중국 명나라 때 인물인 정화를 만나보자.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콜럼버스는 알지만 정화는 잘 모른다. 웬 여자 이름이냐고 되묻기도 한다. 정화는 여자는 아니지만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는 환관이었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땅을 차지한 명1368∼1644 은 야심만만한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永樂帝에 이르러 대규모 해외 항해를 계획한다. 영락제가 해외 항해를 계획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정화의 원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이 책에서는 원정 대신 항해라는 말을 사용한다.
정화가 환관이 된 것은 어릴 때에 겪었던 불행 때문이었다. 정화는 서역에서 온 이슬람 집안에서 태어나 중국의 남서부에 있는 윈난성 쿤밍昆明에 살고 있었다. 윈난성은 차茶의 원산지였기에 예부터 교역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차와 말을 바꾸는 길로 유명한 차마고도의 출발지가 윈난성이었다.
영락제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원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해 쿤밍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영락제는 혹시 모를 반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포로가 된 성인 남자는 모두 죽이고 소년들은 모두 거세시켰다. 그 가운데 정화도 포함되어 있었다.
몽골이 세운 원나라가 다민족 국가를 지향했다면 그다음을 이은 명나라는 철저히 한족 중심의 국가였다. 따라서 원나라 때에는 색목인이라 불리는 이슬람 계통의 사람들도 자유롭게 교역하며 평화롭게 살았지만 명나라가 들어서자 사정이 급변한 것이다.
한편 정화는 이후 궁궐로 들어가 영락제를 충심으로 보좌하며 신임을 얻었고 환관 가운데 서열 2위인 내관태감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정鄭이라는 성을 하사받아 원래의 이름이었던 마화에서 정화로 이름을 바꾸었다.
치열한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고 황제가 된 영락제는 정화를 책임자로 삼아 대규모 항해단을 꾸렸다. 목적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그럴 듯한 가설은 중국의 땅에 세워진 명나라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위엄을 보이기 위한 항해였다는 것이다.
중국은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중화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중심에 어울리는 위세가 필요했다. 여기서 조공제도가 생겼다. 또한 정화의 항해도 이런 측면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콜럼버스와 정화 모두 자민족 중심주의를 밑바닥에 깔고 있었지만 목적과 드러난 결과는 달랐다.
이렇듯 콜럼버스의 항해와는 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규모 또한 차이가 났다. 정화가 이끄는 항해의 규모를 보면 입이 벌어진다. 2만 7,000명에 이르는 선원과 62척의 대형 선박이 동원되었다. 배의 크기 또한 콜럼버스가 탔던 배의 약 30배에 이르렀다.
실제로 정화가 이끄는 항해단은 콜럼버스를 비롯한 유럽인들과 사뭇 달랐다.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를 찾았던 유럽인들이 자기들을 환대하는 선주민들을 배신하고 학대한 것과 사뭇 다르다. 특히 에스파냐인이었던 코르테스, 에스파냐의 멕시코 정복자가 남미에서 자행한 대학살은 너무나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화의 항해단은 찾아간 곳을 공격해서 식민지로 삼거나 착취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적대하는 사람들과는 싸웠지만 땅을 빼앗거나 자국의 종교나 언어 등을 강요하지 않았다. 또한 대립하고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기도 하고 선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선물을 나누어주고 명나라와 황제에 대해 소개했다.
유럽인의 항해와 정화의 항해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해와 북풍> 이야기와 비슷하다. 잘 아는 것처럼 북풍은 나그네의 옷을 벗기기 위해 매서운 바람을 보냈지만 실패했고, 해는 따스한 햇볕을 비추어 스스로 옷을 벗게 했다. 정화의 항해단은 햇볕 같았다. 따뜻함으로 상대가 스스로 명나라의 위엄에 감동하고 복속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정화의 항해는 모두 일곱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멀리 아프리카 케냐의 몸바사까지 찾아갔다. 물론 정화는 그것을 신대륙의 발견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정화의 여덟 번째 항해는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신하들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정화의 항해를 반대했다. 콜럼버스와는 너무나도 대조를 이루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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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그 후 한양대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대학에서 아시아 문화, 종교 문화, 신화와 축제 등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신화 읽어주는 남자》, 《역사와 문화로 보는 일본기행》, 《신화, 우리 시대의 거울》,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 《하룻밤에 읽는 그리스신화》 등이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고민하는 힘》, 《주술의 사상》, 《일본인은 한국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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