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윤하정의 공연 세상
허당과 허세 사이
뮤지컬 <사의 찬미>의 배우 정민
평양 출신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그녀가 사랑한 극작가 김우진. 그들은 1926년,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배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사의 찬미’를 삶으로 직접 노래하듯 말입니다.
평양 출신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 그녀가 사랑한 극작가 김우진. 그들은 1926년,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배에서 현해탄에 몸을 던졌습니다. 그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사의 찬미’를 삶으로 직접 노래하듯 말입니다. 뮤지컬 <사의 찬미>에는 이 사건에 허구의 인물 ‘사내’가 개입합니다. 두 연인이 만나 사랑하고, 함께 바다에 몸을 던질 때까지 항상 곁에 있었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는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제멋대로 두 연인과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드는데요. 그래서 행동이며 말투, 캐릭터까지 어쩔 수 없이 매력이 철철 넘치는 인물입니다. 사실 현실에서는 이런 나쁜 남자를 조심해야 하는데 말이죠. 아무튼 이렇게나 멋진 사내를 초연 때부터 줄곧 맡아온 뮤지컬배우 정민 씨를 인터뷰하기로 했는데요. 비 내리는 토요일 정오, 역시나 나쁜 남자인지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군요.
“배우가 실생활과 무대 위의 모습이 같으면 안 되죠. 특히 <사의 찬미> 같은 경우는 허세와 느와르의 결합이거든요(웃음).”
훤칠한 키에 잘 재단된 슈트 차림, 윤기 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며 부러질 듯 꼿꼿한 자세. 전날 그야말로 폼생폼사 사내를 연기하던 정민 씨는 20여 분을 늦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찰랑 걸리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잽싸게 뛰어와 애교와 어리숙함으로 지각에 대한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봤던 사내와는 천차만별이었죠.
“저와 사내는 많이 다르죠. 제 생각에도 캐릭터 면에서는 안 비슷한 것 같아요. 사내처럼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다가가는 면은 별로 없거든요. 저는 한량이에요. 찰나를 사는 윤심덕마저도 저를 부러워할 만큼요(웃음).”
허세는 좀 있는 것 같은데요(웃음)?
“허세 있죠. 그래도 가식은 별로 없어요. 재미로 하는 거예요. 성종완 연출님이 공연 시작할 때부터 공연계에 새로운 느와르를 열어갈 거라며 계속 허세를 강조하셨어요(웃음). 연습 때 잠깐 밥 먹으러 나갈 때도 다들 선글라스를 쓰고 나가고. 일부러 테라스 있는 카페에서 선글라스 쓰고 커피 마시고. 허세 좀 누렸죠.”
여성 관객들에게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올 캐릭터인데, 사내는 어떤 인물인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연출님이 자꾸 규정짓지 말라고 하세요. 처음에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야 관객들도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아서. 그런데 감성이 없는 초현실적인 느낌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눈물도 없고 화도 안 내는. 그래서 페도라를 쓰기로 한 거예요. 얼굴을 가려서 사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자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공연 끝나면 아무 것도 안 한 것 같은 거예요. 뭔가 감정을 쏟아 붇지 않으니까 자꾸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재연 때 감정을 조금씩 비추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사내의 정체성을 나름 해석하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연출님도 관객들에게 열린 해석을 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그래서 지금의 사내가 됐어요.”
3인극이라 2인극보다는 부담이 덜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2인극은 등퇴장이 거의 없어서 힘든 반면, 이번 작품은 3명의 등퇴장이 너무 많아서 힘들 것 같아요.
“맞아요, 정말 바빠요. 등장하는 입구도 다양하거든요. 뒤에서는 허세가 없죠. 막 뛰어다니느라 숨이 찰 정도예요. 특히 마지막 장면에는 정말 바빠요. 윤심덕과 김우진이 바다에 뛰어들고 조명이 딱 꺼지잖아요. 암전되고 거의 3초 만에 등장해야 하는데, 그 사이 넥타이 풀고 옷 풀어헤치고 피 묻히고... 다시 허세를 부려야 해요(웃음).”
그 마지막 장면과 첫 장면이 같잖아요. 마지막이야 극이 쭉 진행된 상태라 관객들도 그 상황을 함께 겪는 거지만, 첫 장면에서는 관객들과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혼자 등장해서 꽤 오랫동안 말없이 멋있는 척을 해야 해서 무척 부담될 것 같습니다(웃음).
“부끄러워요(웃음). (최)재웅이 형도 사내인데 연습할 때 그 장면을 대충대충 하는 거예요. 다들 걱정했어요. 왜 저렇게 소심하게 하지? 처음 런을 도는데 재웅이 형이 끝나자마자 ‘나는 이거 부끄러워 죽겠어. 소심해서 부끄러움 잘 탄다 말이야’ 그러시는 거예요. 공감 100%였죠. 아무런 정보도 없는 관객들 앞에서 무척 정적인 장면을 연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는데, 이겨냈죠.”
어려움이 많네요. 라이터도 잘 안 켜지는 것 같더라고요.
“공연장에 에어컨이 있으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 흐름이 있나 봐요. 무대 뒤에서 확인할 때는 한 번도 안 켜진 적이 없거든요. 어떤 날은 7번까지 안 켜진 적도 있어요. 한 번에 켜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웃음). 뭐 이제는 실패해도 그러려니 하고요.”
우진과 일본어로는 뭐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도 꽤 오래 얘기하잖아요.
“솔직히 저도 모릅니다. 고충이 많아요. 알려준 사람마다 다 다르거든요. 평소에 일반 사람들이 잘 안 쓰는 옛날 말투니까. 게다가 작년에 알려준 말과 올해 알려준 말이 다른데, 저한테는 이게 암기잖아요. 아예 확 달라지면 모르겠는데 조사나 단어가 미묘하게 바뀌는 거예요. 미치는 거죠(웃음). 처음에 우진은 단답형으로 말했어요. 사내는 엄청 길더라고요. 지금보다 두 배 정도 긴 말을 독백으로 했어요. 그래서 분담 좀 하자고 했죠. 일본어 하는 분이 와서 도와주셨는데, 그래도 일어 아는 분들이 들으면 웃을 거예요.”
뮤지컬 <사의 찬미>에서 결말이 의미하는 건 뭘까요? 사내가 만들어 놓은 결말(심덕이 우진을 쏘고 자살)과 두 사람이 선택한 결말(함께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비슷한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하잖아요.
“정확하게 알려주지는 않죠. 인생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공연 대사에도 철학적인 말이 많아요. 찰나를 산다... 우진과 심덕이 배에서 뛰어내려 죽고 살고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죽어서 불행하고, 살아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요. 모든 행동들이 계획 하에 있었지만, 사내가 느낀 감정에 따라 두 사람을 좀 더 지켜보기도 하고, 극중 대본에도 수정을 요구하죠. 두 사람이 떠나간 것에 대해서는 어찌됐든 계획대로 됐다고 생각해요. 사내의 결말도 죽음으로 가는 거잖아요. 사의 천미니까. 하지만 사내가 마지막에 부른 노래는 그간의 심정을 노래한 거라고 생각해요. 사내를 킬러로 봤을 때는 실패한 거잖아요. 두 인물에 애정이 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으니까 스스로 감추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금지된 사랑, 금지된 낭만, 허락되지 않은 이야기 사라져라’ 노래한 거겠죠.”
전작들과 비교하면 남성미 물씬 나는, 어쩌면 더 어울리는 역할을 맡지 않았나 싶어요.
“나이 먹어서 그래요(웃음). 생각보다 이런 역할이 잘 맞더라고요. 창작뮤지컬이라 제가 캐릭터를 만들다 보니까 저를 잘 보일 수 있는, 제가 잘 할 수 있는 인물로 만들었나 봐요. 사내의 여유로운 모습이 일상에서 제가 갖고 싶은 모습이고, 갖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거든요. 서른 살 이후 그런 모습들을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제 캐릭터가 된 것 같아요.”
사내가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듯 정민 씨가 자신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거잖아요. 지금은 어떤 장면이고, 앞으로 어떻게 결말이 나길 원하세요?
“글쎄요, 아직 사춘기라서. 배우생활을 안 했으면 그냥 평범하게 잘 살았을 것 같은데. 아직 규정짓고 싶지 않아요.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을 찾으려고요. 쉬고 싶으면 쉬고, 여행가고 싶으면 여행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갑자기 이러다 결혼하고 싶으면 결혼하고. 그냥 찰나를 살고 싶습니다(웃음). 하지만 배우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군요. 10년째 벗어나지 못하고 배우생활을 계속 하는 걸 보면 말뿐인가 봐요(웃음).”
배우는 철이 들면 안 된다고 하더니, 정민 씨는 적절한 모델이 아닐까 합니다. 공연 안 가고 놀고 싶다는 배우를 달래서 인터뷰를 마무리했더니, 쏟아지는 비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마구 공연장으로 뛰어가네요. 올해 나이 서른다섯 살이랍니다. 하지만 1시간 여 뒤에는 다시 멋진 슈트 차림에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느와르 영화의 남성미 물씬 나는 남자로 변신해 허세를 부리고 있을 겁니다. 그게 배우겠죠. 뮤지컬 <글루미데이>에서 올해 <사의 찬미>로 제목을 바꾼 이 작품은 9월 6일까지 대학로 대명문화공장 비발디파크홀에서 공연됩니다. 윤심덕, 김우진, 사내 이렇게 3명의 배우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삼중주에 담아내는 ‘사의 찬미’를 마음껏 감상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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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