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지우의 드라마, 당신의 이야기
<킬미, 힐미> <하이드 지킬, 나>, 다중인격 로맨스의 대항해시대
<킬미, 힐미> <하이드 지킬, 나>
여성 시청자들에게 다중인격 로맨스는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한 남자가 가진 다양한 인격과 사랑을 나누는 여자, 말 그대로 로맨스 장르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판타지다.
아무래도 최근 드라마 작가?감독들은 재벌 2세의 오만함이나 실장님의 다정함으로는 더 이상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하다. 90년대 이후 수백 명의 재벌 2세와 실장님들이 대중을 유혹했고, 해당 범주의 캐릭터로 가능한 변주는 이미 대부분 등장했다. 2013년, 마음을 읽는 소년과 수백 년을 산 외계인이 시청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자 캐릭터의 독특함으로 승부를 보려는 작품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몸에 칼이 돋는 남자, 북한 출신 외과 의사, 귀신을 보는 왕자….
MBC <킬미, 힐미>와 SBS <하이드 지킬, 나> 역시 기존에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소재를 들고 나온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MBC와 SBS에서 같은 시간대 선보이는 이 두 드라마는 동일한 소재를 취했다. 다중인격 장애와 남자 주인공의 각각 다른 인격에 매료되는 여자 주인공. 닮은 듯 다른 이 두 작품은 왜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를 차용했을까?
참신한 소재는 참을 수 없는 유혹
먼저 소재의 독특함이 흥미를 끈다. 창작자에게 독특한 소재는 언제나 유혹적이다. 상대적으로 흔한 소재를 차용한 극보다 소비자들의 구미를 당기고, 서사에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소재만으로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왕자와 신데렐라는 지루하지만 길라임과 김주원은 드라마가 되는 것처럼. 이 두 드라마도 그렇다. 한국 드라마에서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를 로맨틱 코미디에 버무린 시도는 참신하고, 한 남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격과 인연을 쌓아가는 여자 주인공 역시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다.
<하이드 지킬, 나>에서 장하나(한지민)는 구서진(현빈)의 다른 인격 로빈을 불러오는 계기이며 시종일관 냉랭하고 예민했던 구서진을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전혀 다른 두 인격과 사랑에 빠지는 장하나는 서진과 로빈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한다. <킬미, 힐미>의 오리진(황정음) 역시 신세기가 시종일관 욕심내는 존재이며 도현이 최초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상대다. 두 여자 주인공 모두 흔한 삼각관계의 히로인보다 훨씬 복잡한 관계성을 형성하며 극중 긴장을 유발하는 셈이다. 다중인격이라는 소재를 차용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열매다.
출처_ MBC
다중인격 주인공이 선사하는 짜릿한 쾌감
한편 여성 시청자들에게 다중인격 로맨스는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한 남자가 가진 다양한 인격과 사랑을 나누는 여자, 말 그대로 로맨스 장르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판타지다. 지성도 현빈도, 감히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준수한 외모의 재벌 2세로 등장한다. 이런 외모의 재벌 2세가 자신을 사이에 두고 매력을 어필하는 데야 버틸 여자가 있을까.
차도현과 구서진, 두 남자 주인공은 젠틀맨과 나쁜 남자를 정신없이 오가며 시청자를 홀린다. 다정하고 신사적인 매력을 뽐내는가 하면 지루하다 싶어질 때쯤 치명적인 나쁜 남자로 돌아와 아슬아슬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성격도 취향도 다른 인격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받는 여자 주인공들이 그들의 구세주가 된다는 것. 특히 <킬미, 힐미>의 경우 리진의 선택은 각 인격의 생존과 맞닿아 있기에 차도현도 신세기도 그녀를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친다. 로맨스가 갖춰야 할 필수 요건은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다중인격을 다룬 두 작품은 좋은 로맨스가 되기 위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출처_ SBS
정신질환을 이해하는 시대를 바탕으로 등장한 독특한 드라마
허나 무엇보다도 다중인격 로맨스가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리라는 확신은 정신질환이 일반적 문제로 대두된 최근의 흐름에 기인할 터다. 근래 들어 대중은 정신병동은 ‘미친’ 사람이 가는 곳이라는 생각과 정신병이 숨기고 감춰야 할 치부라는 고리타분한 관념에서 벗어나, 정신질환 역시 외상처럼 병리적 치료가 필요한 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충격적 흉악 범죄 혹은 기이한 비행의 바탕에 정신적 질병이 존재하리라는 짐작도 이제 당연하다. 정신질환이 개인의 나약함이나 결핍과는 관계없으며 적절한 처치가 필요한 질환이라는 문제의식을 대부분의 대중이 공유하게 되자, 드라마들은 다양한 정신질환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다. SBS <괜찮아 사랑이야>의 조재열(조인성)은 강박증과 조현병 환자였으며, tvN <하트 투 하트>의 차홍도(최강희) 역시 대인기피증으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킬미, 힐미>와 <하이드 지킬, 나>의 다중인격은 이런 관점에서 차용된 소재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이드 지킬, 나>가 구서진의 질환에 대한 공감이나 이해를 구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드라마는 다중인격 장애라는 정신질환을 그저 러브라인을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선과 악을 대변하는 구서진의 두 자아는 장하나에게 상반된 태도로 다가가지만, 다중인격 장애는 삼각관계 속 장하나가 느끼는 모순된 감정과 독특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것 이외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반면 <킬미, 힐미> 차도현의 7개 자아는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원인을 둔다. 어린 도현을 아버지가 학대했으며, 그를 방치하고 유기한 어른들이 있었음을 드라마는 조심스레 드러낸다. 얼핏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일곱 인격은 차도현의 충격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등장한 존재이며 과거 견디지 못할 끔찍한 사건이 있었단 사실도. 우연처럼 보였던 리진과의 인연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과거의 사건에서부터 시작됐음이 밝혀지고, 이는 도현의 다중인격과 관련된 미스터리를 밝히고 질병을 치유할 열쇠가 리진임을 짐작케 한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도현의 인격들은 리진에게 자신을 죽이거나 치유해 달라 애원한다. ‘죽이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결국 인격들의 생존 문제라는 점에서, 이 힐링 로맨스는 다양한 인격들이 자신을 인정받고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투쟁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킬미, 힐미>는 다중인격 장애라는 독특한 소재를 이용해 로맨스와 스릴러, 미스터리와 성장물이라는 다양한 특성을 갖추는 한편 시청자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인 셈이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소재를 들고 나온 두 작품 <킬미, 힐미>와 <하이드 지킬, 나>. KBS <굿 닥터>, SBS <괜찮아 사랑이야>, tvN <하트 투 하트> 등에 이어 생소한 정신질환을 소재로 차용해 시청자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높은 점수를 줘야 할 것 같다. 한 남자에게 다양한 인격이 존재하고 그 인격과 사랑에 빠진다는 독특한 설정은 기존 한국 드라마의 문법을 깨고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거니와, 정신질환?정신병리학 등에 대한 높은 사회적 관심을 반증하기도 한다.
다만 다중인격 장애라는 소재를 다루는 방향에 있어서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백마 탄 왕자 혹은 충성스런 기사, 오만한 재벌 2세와 다정한 실장님이 그러하듯이 ‘다중인격’이라는 특성을 도식화해 또 다른 흥행 코드를 만드는 과정이라면 안타깝지만 별로 반갑지 않다. 사랑이 결국 모든 장애를 해결해준다는 지나치게 낭만적인 상상은 오히려 정신 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을뿐더러, 연이어 편성된 유사 소재의 다른 작품들에도 악영향만 남길 테니까.
<하이드 지킬, 나>도 <킬미, 힐미>도 결국 상처 받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다. 시청자들에게 숙고할 만한 주제를 던지는 작품이 될 만한 여지가 충분하다. 두 작품 모두 허구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따뜻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에게 상처 주고 상처 받는지, 주어진 시련에 맞서고 서로를 치유하며 어떻게 삶의 조각을 채워 가는지 보여주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다정한 이야기가 말이다.
[관련 기사]
- <닥터 이방인> 선생님, 제 심장이 왜 이러죠?
- <킬미, 힐미> 그래도 아직은 차도현
- <하이드 지킬, 나> <킬미 힐미> 두 남자를 한 몸에 담아내는 궁극의 판타지
- <닥터 이방인> 불친절하지만 자꾸 보게 되는 드라마
- <트라이앵글> <빅맨>, 꼭 싸워서 이겨야 하나?
관련태그: 하이드, 지킬, 나, 킬미힐미, 김지우, 드라마, 당신의 이야기
사람과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길어 주절거리는 것이 병이 된 사람. 즐거운 책과 신나는 음악, 따뜻한 드라마와 깊은 영화, 그리고 차 한 잔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