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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루(La Roux) < Trouble In Paradise >
내공의 깊이가 승부를 가른다. 신스 팝 대유행의 시대에서 치명적인 5년의 공백기를 겪었음에도 매혹적인 사운드로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떨어트려 놓는 라 루다. 벤 랭메이드의 탈퇴로 홀로 남겨진 빨간 머리 프론트우먼 엘르 잭슨을 단순한 가수로 생각했던 이들은 크게 한 방 먹었다. 고수는 무기를 탓하지 않는 법이라는 사실을 몸소 일깨운다.
철저한 1980년대 신스 팝 고증으로 호평받았던 < La Roux >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넘실대는 기타 리듬, 인간적인 드럼 리듬, 신디사이저 음 속에 들려오는 청량한 건반 음이 레트로라는 큰 틀 안에 다양하게 쏟아진다. 디스코와 펑크(Funk), 알앤비의 따뜻한 체온을 전자음에 더해 인간의 심장을 새로이 장착한 신보는 단순한 '신스 팝'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미 우리는 작년 우리는 다프트 펑크의 마법을 통해 생명 없던 일렉트로닉 로봇이 따뜻한 심장을 갖게 되는 과정을 몸소 목격한 바 있다. 더욱 다채로운 사운드가 귀를 총천연색으로 물들인다.
명징한 신스음과 함께 펑키(Funky)한 기타 리듬으로 빚어낸 「Kiss and not tell」은 변신한 라 루의 가장 모범적인 트랙이다. 여전히 쏙쏙 박히는 멜로디라인으로 중독을 이끌어내고, 통통 튀는 리듬감은 더욱 여유로워지며 새로운 유형의 흥취를 만들어낸다. 베이스라인이 곡 전체를 주도하는 「Cruel sexuality」나 아예 기타리프를 중심으로 디스코 & 펑크적 조합 「Tropical chancer」 또한 전작의 느낌과는 180도 다른 특유의 그루브를 형성한다. 가장 < La Roux >와 가까이 맞닿았다는 평을 받는 싱글 「Uptight downtown」 또한 기반은 그 밑에 깔린 디스코 풍의 기타&베이스 리듬이다. 흔치 않은 '리얼 세션 신스 팝'이다.
엘르 잭슨의 목 건강 이상으로 인해 「In for the kill」이나 「I'm not your toy」에서의 찢어지는 앙칼진 고음은 더는 들을 수 없지만, 귀를 사로잡는 멜로디는 여전하다. 앞서 언급했던 「Kiss and not tell」, 크라프트베르크 풍의 「Silent partner」, 하임(Haim)의 뉴웨이브와 이어지는 「The feeling」 등등 전주만으로 귀를 사로잡는 능력이 탁월하다. 건조하고 정돈된 날카로운 촉이 전작이었다면, < Trouble In Paradise >의 미덕은 단단한 사운드 속에 감춰진 은근한 마력이다. 아홉 곡이 적어 보이지만 하나하나의 퀼리티는 상당한 수준이다.
이미 각종 매체의 '올해의 앨범' 리스트에는 당연하게도 라 루의 앨범이 자랑스럽게 전시되어있다. 좀 더 반짝이고 세련된 옷을 입은 1980년대가 지배하는 현 음악 시장에서 살짝 시간의 흐름을 10년 정도 돌려놓은 라 루의 선택은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다. 음악적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가장 기본을 추구한 엘르 잭슨, 2014 신스 팝 레드 오션의 승자다.
글/ 김도헌(zener12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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