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임재청의 세계문학 인생 콘서트
그녀의 영혼 깊은 곳에 쾌락에 눈뜨게 될 강렬한 열정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한번 슬쩍 훑어보면 이 모든 솔직함과 순진함이 단지 인공적으로 꾸며진 데 불과하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낙담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의 본성은 솔직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본능적으로 뒤틀린 교활함에 가득 차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순수가 어머니, 숙모, 할머니 등과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여자 선조들의 음모로 교묘하게 조작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왕처럼 마음껏 부술 수 있는 눈으로 빚은 조각인 양 그가 원하고 가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강요되어 왔다는 점 때문에 이 순수에 억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순수의 시대』中
눈물을 말려 버리죠
그리스 신화에 고르곤이라는 세 자매의 괴물이 있습니다. 메두사는 그중 막내인데 머리카락이 모두 뱀으로 꿈틀거립니다. 그러나 메두사의 가공할 만한 힘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눈빛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두사의 눈빛이 너무도 강해 이를 본 사람은 누구나 돌이 되고 말지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어떤가요? 한 순간에 눈뜬 장님이 됩니다. 알고 보면 사랑이라는 괴물도 무시무시합니다. 고르곤처럼 슬프거나 절망적이라기보다 아름다움에 끝없이 휩쓸리게 합니다. 그런데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 엘렌은 좀 더 특이하게 말합니다.
고르곤은 아무도 눈멀게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의 눈물을 말려 버리죠.
남편과 이혼할 지경에 이른 그녀에게 눈물이 남아 있을 리 없습니다. 더구나 눈물이 마를 정도라고 한다면 그녀의 불행이 어느 정도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녀는 결혼이라는 축복 속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보면서 눈물이 마른 것과 동시에 사람들의 눈을 띄게 해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이런 그녀를 동정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결혼을 했으니 불쌍한 엘렌이라고 감싸 안으며 위로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습니다. 품위 있는 그들 입장에서 이혼은 불쾌한 일이기 때문에 그녀는 따돌림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질식할 것 같은 느낌
어디 그뿐인가요? 그녀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거침없는 말투는 그들의 취향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취향이 운명적인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취향에 대한 모독보다 끔찍한 것은 없으며 불쾌한 것은 무시해도 좋다는 게 그들만의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취향이라는 괴물에 맞서 기사도적인 열정으로 싸우는 사람이 바로 아처입니다. 그녀가 과거를 모두 지워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했을 때, 불쾌한 이혼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을 때, 그는 그녀를 끝까지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불쌍한 그녀가 죄인처럼 고개를 못들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둘러싼 불쾌함과 불쌍함이라는 감정이 기준과 지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이해라는 기준에 의하면 그녀가 이혼하면서 혼자 살려고 하는 것은 결코 참한 여자가 할 일이 아니었지요. 그는 참한 여자가 사회의 예법에 무신경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딜레탕트였던 그의 지성은 지적이고 예술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의 경우를 보면서 여성들도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여자들이 순수에 억눌려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순수에 억눌린 공기를 마시다 보면 질식할 것 같은 느낌! 그것은 마치 가족이라는 지하 납골당에 자신을 구속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에게 삶의 전부
순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로맨스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으로 메이를 사랑하는 데 한계를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녀의 순수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어느 누구도 솔직하고 순진함이 불러일으키는 순수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순수함이 가식적이라면 다시 말해 순수함에도 자신의 자유로운 판단력이나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그녀는 이러한 요소들을 갖지 않도록 세심하게 교육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상상력에 맞서 정신을, 경험에 맞서 가슴을 봉인하는 순수함에 갇혀 버렸습니다. 순수함에 갇힌 그들의 결혼은 안정적이었으나 매우 단조롭다는 게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렌이 살아있는 존재로 나타나면서 그의 심장을 다시금 거칠게 뛰게 했습니다. 앞일을 훤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즉, 결혼한 그가 그녀와 함께 서로에게 삶의 전부가 되는, 인간 대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간다는 게 가능 하느냐, 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면 그것은 자신의 운명과 어렵게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을수록 심장이 강하게 뛸 만큼 정묘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로소 그녀와의 사랑을 통해 진짜 삶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루함의 노예로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하는 건 자신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
그는 인생의 꽃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모를 리 없겠지만 왜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는 대체로 우리가 꽃의 아름다움을 너무나 거창하게 말하려다 보니 정작 꽃을 보는 동안 느낌에 대해서 소홀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헤겔은『법철학 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 -『법철학 강요』中
우리가 정말로 사랑한다면 한번쯤 소설 주인공들처럼 사랑의 도피를 해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척 보니 다르더라!’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한 부분이 되고 자신의 인생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한 부분이 되어 결국에는 서로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순수함은 고요하면서도 지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심장이 인생의 꽃을 보고 거칠게 뛰는 것이야말로 진짜 삶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순수의 시대이디스 워튼 저/송은주 역 | 민음사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받은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 『순수의 시대』. 이 작품은 출간 직후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 되었다. 저자는 번영을 구가하던 옛 뉴욕의 상류사회를 세밀화처럼 정교하게 복원했고, 세 남녀의 삼각관계를 통해 욕망과 도덕, 이성과 감정, 전통과 변화 사이의 대립과 융합을 그려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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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순수의시대
책만 보는 바보. 그래서 내가 나의 벗이 되어 오우아(吾友我)을 마주하게 되지만 읽은 책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을 때만큼은 진짜 외롭지 않아!
<이디스 워튼> 저/<송은주> 역12,600원(10% + 5%)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 상을 받은 작가 이디스 워튼의 대표작 『순수의 시대』. 이 작품은 출간 직후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8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세 차례에 걸쳐 영화화 되었다. 저자는 번영을 구가하던 옛 뉴욕의 상류사회를 세밀화처럼 정교하게 복원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