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신화들조차 불길함을 풍기는 이유, 그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 불안은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한 사회가 은밀하게 함께 만들어내고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개성이다. 어느 날 깊은 밤을 날아온 에로스가 프시케에게 말한 것은 딱 하나, ‘눈을 뜨지 마세요, 눈을 뜬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난 어려서 이 이야기를 읽고 기겁을 했다. 어떻게 눈을 뜨지 않을 수 있겠어요? 보고 싶은걸요. 내가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를 읽고 교훈을 얻어 눈을 뜨지 않았더라면 뭔가를 찾아 헤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눈물 흘리는 소금기둥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는가? 내가 믿지 않은 것은 불안이었고 내가 믿은 것은 고생담이었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순수함이었고 내가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개성이었다. 내가 싫어한 것은 공허였고 내가 좋아한 것은 긴 손가락과 손을 꽉 잡는 공모와 획책이었다.
『순수의 시대』의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눈을 뜨고 본 것은 고르곤(메두사)의 눈이다. 신화 속에서 메두사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돌이 돼버린다.
“아 그래야만 했어요, 난 고르곤을 보아야만 했어요.”
“흠 그것이 당신을 눈멀게 하지는 못했소. 당신은 고르곤이 별 볼일 없는 늙은 요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
“고르곤은 아무도 눈멀게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의 눈물을 말려버리죠.”
- 올렌스카 백작부인과 뉴랜드 아처의 대화 중에서
| 영화 <순수의 시대>(1993)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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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를 휙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거나 행복한 사람이거나 내부의 균열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살면서 아직 그런 사람들을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이 글은 상상력의 힘으로 읽는 글이 아니지만 읽는 동안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이 글은 사람을 행동하도록 자극한다기보다는 슬픔에 젖어 사색하게 하는 글인데 그 근본 감정은 애절함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애절함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잃는 ‘방법’의 애절함이다. 이 글은 원하는 것을 절대 갖지 못하게 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인데 가장 비통한 것은 누구라도 그런 일을 겪고 난다면 자주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즐겁게 웃는 사람들 속에서, 어스름 풍경 속에서, 예의 바른 대화 속에서, 기차역에서, 백화점에서, 눈밭에서, 극장에서, 브라운관 앞에서, 그러다 결국은 인생에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
1870년대 1월 어느 날 뉴욕, 파우스트 공연 날, 뉴랜드 아처는 오페라 하우스 박스석 문을 열고 들어설 순간을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다. 마르그리트가 “그는 날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라고 영혼으로 절절하게 노래 부르며 데이지 꽃잎을 뿌리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다른 어떤 순간일 수 있겠는가?
뉴랜드 아처는 명문가의 아들인데 머리글자 이니셜을 푸른색 에나멜로 새긴 은빗 두 개를 사용해 가르마를 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단춧구멍에 꽃을 꽂고 나타나는 수려한 용모의 멋쟁이 변호사다. 그는 조용하고 자제할 줄 아는 젊은이로 작은 사회에서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된 지 오래라서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튀는 행동은 기품있게 조절할 줄 안다. 오페라 하우스엔 그의 사랑스러운 약혼녀, 뉴욕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메이가 조각처럼 앉아 있었다. 그가 메이를 몹시 사랑하긴 하지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개성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표정이라서 그리스 여신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도록 선택된 인간 같았다. 그녀의 사물에 대한 관점은 늘 변함없이 똑같았는데 그것은 그가 자라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관점이었고 그가 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시해 왔던 바로 그 관점이었다. 메이는 대단히 단순하고 평범한 결혼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항상 성실하고 용감하게 잘 해나갈 것이다. 그녀는 전통을 따르고 옛날부터 이어받은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의 수호여신 같았다. 뉴랜드 아처는 가끔은 메이가 그를 전혀 꿰뚫어보지 못해서 실망했다.
그런데 그날 밤 오페라 하우스의 뉴욕 상류층들은 한 인물의 등장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고 술렁댔다. 그 언짢은 소동의 주인공은 메이의 사촌 언니인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수 년 전 파리 튈를리 궁전의 무도회에서 대단히 부유하고 유명한 올렌스카 백작을 만나 결혼했는데 몇 년 뒤에 비서의 도움을 받아 궁궐과도 같은 집을 탈출했고 그리고 어쩌면 그 비서랑 동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문이 돌고 있었다.
뉴욕 사교계는 그녀의 등장에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남부끄러운 꼴이 되는 것은 명문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가 속한 부족의 관습과 예절 하나가 온 세상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 그들에게 가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누군가가 예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예법을 어긴 자는 추방되어야 한다. 뉴랜드 아처만큼은 주위 사람들이 그런 문제로 복닥거릴 동안에 어딘가에 진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진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메이의 부탁을 받고 엘렌 올렌스카를 돌봐주던 뉴랜드 아처는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말이나 행동, 반응이 그의 가치를 뒤집고 있으며 그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처가 속으로 혼자 동경하고 적절히 타협하던 정열에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인간의 얼굴을 부여해 버렸다. 어느 날 밤 그가 책장을 뒤적이며 매 페이지마다 엘렌 올렌스카란 여인의 환영을 부여하는 장면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낯익은 풍경이다. 그녀가 아름다웠을까? 글쎄 어쨌든 그녀는 다르다고 아처는 생각했다. 어느 날 사교계의 견고한 벽에 부딪혀 외로움에 지친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에게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똑같아지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러자 아처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지는 않을 거예요.”
뉴랜드 아처와 엘렌 올렌스카는 서로 사랑했다.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경이로울 만큼 서슴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세계에 있는 것을 흥분감으로 지켜보던 아처는 그녀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생각했고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가 불성실과 무관심, 잔인함으로 얻은 행복을 싫어한다는 점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그의 친절함을 사랑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주장대로 뉴랜드는 메이와 결혼한다. 결혼식장에서 그는 하객들을 보면서 ‘이건 오페라 하우스랑 똑같잖아!’라고 생각한다. 신혼기간 동안 뉴랜드 아처는 훌륭한 남편이자 사위였다. 정해진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안 봐도 환히 알 수 있는 집이 그의 집이었다. 그 문을 열면 메이와 습관, 명예, 그와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믿어온 오래된 예의범절이 그득했다. 메이는 평화, 안정, 도망칠 수 없는 의무가 주는 안정감을 상징했다. 메이는 남편을 위한 내조라면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는 여자였다. 살면서 겪은 경험이 그녀 얼굴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고요히 사라져 버리는 게 놀라웠지만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른 세련됨은 내면에 커튼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순수를 상징했다. 그 순수는 훈육과 전통의 결과였기 때문에 견고했다. 메이의 투명에 가까운 순수한 푸른 눈동자는 세상을 담거나 반영하는 반사창이 아니라 도덕, 윤리, 예법을 반영하는 반사창이었다. 뉴랜드는 끝없이 공허한 시간을 견디면서 아무런 사건도 겪지 않은 채 늙어갈 남자가 될까 두려웠지만 자기 역할을 잘했다.
결혼 후에 올렌스카와 아처 둘이서 스치듯 만나 나눈 사랑의 대화들은 혼자서 수 만 번 상상하고 되뇌 본 것이다. 선언문 같고 단 한 번뿐인 올렌스카의 키스 장면은 너무 짧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치맛단의 사그락거리는 소리, 눈빛, 웃음소리, 마차 소리, 파도 소리, 포크 소리까지 모조리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오로지 그들의 마음속의 격렬한 격정을 대신 전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당신은 나에게 진짜 삶을 처음으로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부탁했소. 그건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거요.”
“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난 견디고 있는데….”
“당신도 그랬다고… 당신도 지금까지 죽 견디고 있었?고?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뭐란 말이요?”
“아, 내 삶이 당신 삶의 일부인 한….”
“그러면 내 삶은 당신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러면 완전해진다. … 어느 쪽에게나?”
“예.”
(이 말을 들은 아처는 세상 천지에 자기 홀로 있던 것 같은 외로움을 싹 잊어버렸다.)
“왜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당신 때문인 것 같아요.당신은 적어도 이런 지루함 속에 아름답고 섬세하고 정교한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었어요. 내가 다른 삶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조차도 그에 비하면 싸구려로 보일 정도였어요. 당신에게는 아주 솔직해지고 싶어요. 저 자신에게도 오랫동안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당신이 나를 어떻게 바꿔 놨는지 말할 수 있도록.”
(사람의 핏속까지 바꿔놓지 않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다. 핏속까지 바꿔놓지 않은 윤리는 윤리도 아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서로 가까이 있는 거예요. 그때는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죠.”
(이 말을 하고 올렌스카 부인은 떠날 생각을 한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갑자기 몸을 돌려 양팔을 벌려 아처를 부둥켜안고 그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갰을 때 바로 그 순간 가스등 불빛이 창문 안까지 비추고 깜짝 놀란 그들이 순식간에 떨어져 앉던 것만큼이나 애틋한 장면들은 책 속에서 모두 낮고 희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올렌스카의 얼굴이 창 너머로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짙어가는 어스름을 배경으로 점점 흐릿해져가는 것, 아처의 눈물이 겨울바람 때문에 얼어버리는 것, 아처가 어스름이 깔리는 황량한 정원, 쓰러져 가는 집, 떡갈나무 숲을 보면서 올렌스카 부인을 꼭 찾아낼 것만 같은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 아처가 침대에서 메이의 옆에 누워 창으로 비스듬히 새어 들어온 달빛을 보면서 달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해안을 지나 홀로 마차를 타고 귀가했을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 서재에 혼자 앉아 있는 것, 낮은 등불이 있던 올렌스카의 거실을 생각하는 것.
| 영화 <순수의 시대>(1993)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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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환희에 넘친 마르그리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메아리치는 파우스트 공연을 다시 보러갔을 때 뉴랜드 아처는 그 옛날의 뉴랜드 아처가 아닌데, 마르그리트가 파우스트의 팔에 쓰러질 때 예법을 벗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올렌스카는 가문의 보이지 않는 압력과 음모로 파리로 떠나게 되는데 뉴랜드 아처는 올렌스카 백작부인을 따라 파리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메이는 임신임을 알린다. 메이가 연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위해 연 작별 만찬 풍경은 정확히 이렇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이제 일족 전체가 그런 내막은 알지도 못하고 상상해본 적도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뗐다.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식의 방식이었다.
미셀 파이퍼가 올렌스카 백작부인으로 나오는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백작부인이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작별 만찬장을 나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대형 란다우 마차 안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똑바로 보는 그녀의 목의 힘줄과 안간힘이 내 눈에 보이는 듯해 내 혈관이 터지는 줄 알았지만 책에서 아처는 그저 그녀의 갸름한 얼굴과 빛나는 눈을 희미하게 보았다고만 말한다.
삼십 년이 흐른 뒤 뉴랜드 아처의 삶은 이렇게 표현된다.
그는 선량한 시민이었다. 뉴욕에서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자선 활동이나 시정, 예술에 새로운 움직임이 있으면 언제나 그의 의견을 구했고 그의 이름을 빌리고 싶어 했으며 장애 아동을 위한 최초의 학교개교, 미술관 개편, 새 도서관 건립, 새 실내악단 구성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물어봤고 그의 매일 매일이 고상한 일로 빽빽이 채워졌다.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볼 만한 삶이었는데 그가 놓뫀 것은 인생의 꽃이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을 생각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나는 뉴랜드 아처가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볼 만한 삶을 살았다고 회상될 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삶은 결과적으로 수월한 타협이었고 중요한 어떤 것을 포기한 것이 명백한 것이기 때문에 내 맘이 복잡했다. 갈망에 가득 찼던 남자들이 어느 날 윤리나 도덕에 기댈 때 그가 찾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변명거리이다. 욕망은 포기하지 않는 게 제일 좋고 포기해야 하더라도 시련을 극복해낸 성공 스토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모름지기 진짜 아름다운 여자란 남자의 가슴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여자이고 남자를 어떤 확신에 사로잡히게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여자를 잃어버린 남자에게 세계는 의무와 예법으로 가득 찬 낯선 집이 된다. 나는 그래서 자주 길을 잃는 남자들에게 무척 관대하게 굴 수밖에 없다.
『순수의 시대』에서 사회적인 외벽을 통과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삶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었고 모두 자기 삶에 충실했다. 위대한 개인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엘렌 올렌스카겠지만 아마 그녀는 열정 때문에 무척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왜 둘이서 단 하룻밤도 같이 보내지 못했을까 불만스럽다. 그들은 왜 하룻밤도 고함을 지르며 싸우지 않았을까? 비밀만이 영혼을 키운다는 것을 믿는 나는 그들이 단 하루도 피 흘리는 짐승이 되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여서 안타까웠다. 그것 또한 사회적 예법이었을까? 궁금하다.
올렌스카 부인이 말한 사람들의 눈물을 마르게 하는 오늘날의 고르곤은 무엇일까? 순수? 갈망? 사회적 추방? 윤리? 전통?
어쨌든 한 번 사랑한 것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 덕택에 역설적으로 세계는 별 큰 일 없이 해피엔드이다.
소설에서 잊지 못할 두 장면을 꼽는다면 다음의 두 개다. 첫 장면은 정체성의 상실과 사랑 혹은 사회적 연결망의 상실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에 좋다. 우리 모두 사랑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한정 치산자가 되는 영광과 모욕을 누려야하니까.
아처는 자기 마음 속에 일종의 성소를 만들어놓고 비밀스러운 생각과 열망 가운데 그녀를 간직해 두었는데 그곳이 그의 삶이자 이성이 활동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거기에 읽은 책, 정신의 자양분이 되는 생각과 감정, 판단과 공상을 가져다 놓았다. 바깥의 실제 삶이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갈수록 비현실적이고 불만족스러운 느낌만 커져갔고 넋을 잃은 사람이 자기 방에서도 가구에 여기저기 부딪히듯이 익숙한 편견과 전통적인 관점과 이리저리 충돌했다. 넋이 나갔다. 가장 현실적인 것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마음이 떠나 버려서 그들이 아직도 자기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파리 아파트 창문 바람에 펄럭이던 흰 커튼을 보면서 아처가 돌아서는 장면.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사랑을 잃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 번 사랑한 것을 영원히 사랑하는 방식으로만 잃어버리고 싶다. 혈관 안에 피만 흐르는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