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나는 책
오늘은 2주간 ‘책, 임자를 만나다’ 시간에서 마르고 닳도록 이야기했던 『속죄』 의 장면 장면들을 읽어드리려 합니다. 첫 번째로는 모든 사건이 시작된 분수대 장면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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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리아는 난간 위로 몸을 굽히고 꽃병 속에 있는 꽃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붙잡은 채 꽃병을 기울여 물을 담을 생각이었는데, 바로 그 순간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로비가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로비가 한 손을 뻗으며 말했다. “내가 할게. 물은 내가 채울 테니 너는 꽃만 갖고 있어.”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어쨌든 고마워.” 세실리아는 이미 몸을 굽히고 꽃병을 분수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물은 내가 채운다니까”라며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어 꽃병을 건네받으려고 했다. “담배 다 젖겠다. 꽃이나 뽑아서 들고 있어.” 로비는 갑자기 남자의 힘과 권위를 자랑하고 싶어진 듯 사뭇 명령조로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세실리아로 하여금 꽃병을 쥐고 있는 두 손에 더 힘을 주게 만들 뿐이었다. 그녀는 꽃을 꽂은 채로 꽃병을 물에 담는 것이 자기가 바라는 자연스러운 꽃꽂이에 도움이 될 거라는 사실을 설명할 시간도 없었고, 또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녀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면서 몸을 비틀어 로비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꽃병 주둥이의 한 부분이 마른 나뭇가지 부러지듯 툭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더니, 두 개의 삼각형으로 쪼개져 물속으로 떨어졌다. 두 개의 도자기 조각은 천천히 오락가락하며 출렁이는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조각난 햇빛에 비틀거리면서 서로 몇 인치 떨어진 곳에 내려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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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통신
특별한 취향이나 재주가 없는 이들이 취미 란에 가장 흔하게 적어 넣었던 것이 ‘독서’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독서는 어렵고도 특별한 취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저조차도 취미를 묻는 질문에 말끝을 흐리며 ‘독서’라고 말하고는 상대의 눈치를 보곤 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휴스턴 대학 영문학과 교수 데이비드 미킥스의 책
『느리게 읽기-삶의 속도를 늦추는 독서의 기술』 을 편집한 엄정원입니다. 처음에 이 책을 검토했을 때 이런 시절에 책 읽기에 대한 책이라니, 그것도 ‘느리게 읽기’라니 너무 눈치 없이 착하고 뻔한 말만 하는 책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독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독자에게 매우 적대적인 환경이라고 진단합니다. 사실 저의 하루를 떠올려보아도 이 진단은 틀리지 않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이메일과 페이스북을 체크하고, 뉴스와 가십, 인터넷에 떠도는 재밌는 이야깃거리를 찾아보고, 몇몇 사람의 트위터를 엿보고…… 이런 과정은 종일 반복됩니다. 잠자기 전 누운 채 책을 읽던 습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요. 종일 뭔가를 읽지만 그것이 독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행위이고, 독자가 위기에 처했다는 저자의 말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책과 멀어져 버린 저의 현재 모습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택해야 하는 책 읽기가 ‘느리게 읽기’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이 빨리 읽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여러 번 충실하게 읽는 것. 이것이 삶의 리듬과 속도, 관점과 생각까지도 바꿔 줄 거라고 말합니다. 느리게 읽기는 열네 가지 규칙을 통해 익힐 수 있는데요. 인내심을 가져라, 목소리를 파악하라, 메모하는 습관을 길러라, 또 다른 책을 찾아라 등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규칙들을 다양한 문학 텍스트를 예시로 들어 친절하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예를 들어,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의 수정 과정을 보여 주면서 작가의 의도를 읽어 내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에서 다른 길을 상상해 보는 적극적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또한 테니슨의 시 「크라켄」 에 저자가 상세하게 메모한 내용을 보면, 작품의 주제나 시대적 배경, 이론 등에 짓눌려 텍스트 자체를 꼼꼼하게 읽지 않아서 지금껏 제대로 된 독서를 하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은 다양한 작품을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서와 호메로스의 서사시, 그리스 비극부터 셰익스피어, 톨스토이, 헨리 제임스 등을 거쳐 베케트, 앨리스 먼로, 필립 로스까지 방대한 시공간을 아우르는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는데요. 저자가 워낙 친절하고 설득력 있게 분석하고 있어서, 읽지 않은 작품이라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고 작품을 찾아서 읽고 싶은 욕구까지 느끼게 합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인 에머슨이 일기에서 제인 오스틴을 폄하한 내용이나 새뮤얼 존슨이
『리어 왕』 의 결말이 맘에 들지 않아 읽지 않았다는 등 우리가 아는 대단한 작가들의 다른 작품에 대한 평가, 당시 문학계와 지성계의 재미난 뒷이야기는 덤이고요.
누구나 펴지 못한 책, 읽다가 덮은 책,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꾸역꾸역 읽어 낸 책이 있을 겁니다.
『느리게 읽기-삶의 속도를 늦추는 독서의 기술』 은 오늘 그 책들을 다시 꺼내 보라고, 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책 읽기가 주는 즐거움을 잘 표현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의 인용문으로 마무리를 대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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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 좋고 즐거워서 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독서도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나는 가끔 이런 꿈을 꾸었다. 최후의 심판일이 되어 위대한 정복자들과 법률가들, 정치가들이 보상을 받으려고 갈 때, 옆구리에 책을 끼고 가는 우리를 본 신이 베드로를 돌아보며 부러운 듯한 표정으로, ‘보아라, 이들에게는 상이 필요 없겠다. 그들에게는 줄 것이 없어. 그들은 독서를 좋아했으니’라고 말하는 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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