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번의 부진, 대표팀의 부진
구자철이 구자철이 아니다. 김보경도 김보경이 아니다. 최근 홍명보호의 10번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홍명보호는 4-2-3-1포메이션을 주로 사용하며, 경기 중에는 수시로 4-4-2로 변형을 시도하며 유기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는 전술적 움직임을 보여왔다. 특히 2선과 1선을 넘나드는 홍명보호의 공격형 미드필더, 3의 중간에 위치한 포지션은 많은 활동폭을 보이는 원톱과 공존하며, 자기 자신의 능력 또한 잘 살릴 수 있는 선수가 맡았다.
이 역할을 가장 잘 소화한 예로는 2012 런던 올림픽에서의 구자철을 꼽을 수 있다. 올림픽 당시 구자철 선수는 상대 미드필더와 수비진을 무력화시키는 수준 높은 탈압박 기술과 활동량으로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줬다. 그의 활약은 올림픽 대표팀이 세계 축구 강국들을 넘어 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성인대표팀 홍명보호가 출범한 이후 강팀과의 대결에서 10번 자리를 맡아왔던 선수들은 올림픽 대표팀 구자철의 모습을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전방 공격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공격형 미드필더가 제 능력을 다 펼치지 못하다 보니 팀 전체의 경기력도 만족스럽다 말하기가 어렵다. 월드컵 본선에서 만날 법한 팀들과의 대결에서 홍명보호가 따낸 승은 고작 1승, 최근 주전이 몇 빠진 스위스를 대상으로 한 것이 전부다.
2012시즌 구자철 어디 갔나요?
원래 청소년월드컵 대표팀-아시안게임 대표팀-올림픽 대표팀을 거치며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선수는 구자철이다. 헌데 구자철은 올림픽 이후로는 원래 자신이 보여주고 있었던 능력을 모두 펼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은 모르겠다. 올림픽 때 상대하는 선수들도 같은 나이대여서 성인대표들보다 한 수 아래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분석도 있고, 소속팀이 바뀌며 맡은 역할이 이전 팀에서의 공격형 미드필더가 아니라 수비형 미드필더라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또는, 원톱의 부진이 여파가 되어 동반 부진이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원인이 무엇이든 문제는 여실히 드러난다. 구자철의 드리블은 작년보다 덜 역동적이고, 장기였던 탈압박도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전술적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선수 본인의 몸상태가 일시적으로 좋지 않은 것일지 속단할 수는 없다. 다만 팬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클 것이다. 최근 대표팀 경기 중 얻은 부상까지 겹쳐 다른 선수들과 발을 맞추지 못하는 데다 소속팀에서도 출장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까지 겹치면 아쉬움은 한층 더 깊어진다. 사실상 이렇다 할 해결책이 없다는 것도 큰일이다. 부상 복귀 후 내년엔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길 바랄 따름이다.
그래도 그에 대한 기대는 아직 크다. 음식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누가 뭐래도 홍명보호의 10번,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가장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준 적 있는 선수가 구자철이기 때문이다.
7번의 후계자.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김보경은 옷이 몸에 맞지 않는 느낌이다. 그는 최근 대표팀의 평가전에서 구자철의 부상으로 인해 기회를 잡았다. 팬들의 기대는 컸다. 구자철이 만족스럽지 못한 데다 김보경은 올 시즌 카디프시티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프리미어리그에 안착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전에서 드러난 김보경의 플레이는 실망 그 자체였다. 대표팀의 공격 전술과 한 박자 어긋나 고립되기 일쑤였으며, 유효한 기회를 거의 만들지 못했다. 슈팅도 허공으로 솟았다.
현 홍명보호에서는 오른쪽 윙포워드로 투입된 이청용이 중앙으로 쇄도하며 위협적인 패스를 뿌려주는 경우가 잦은데, 그럴 경우에도 동선이 겹치거나 자신의 위치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홍명보의 지도 아래서는 주로 왼쪽 윙포워드로 뛴 탓일까? 박지성이 직접 지명한 자신의 후계자지만, 현재의 부진은 그가 홍명보호의 10번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다행인 점은 김보경이 부상 중인 것도 아니며, 소속팀에서도 교체든 선발이든 꾸준히 출장 중이라는 사실이다. 거기다 얼마 전 맨유전에서는 교체로 투입되어 동점 골도 넣으며 나쁘지 않은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을 다루는 감각도 뛰어나고, 좋은 기술도 가진데다 잠재력도 큰 선수기에 시간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가 대표팀에서도 안착하지 않을까?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 이근호라는 변수
원래 10번 자리를 놓고 경쟁할 거라 여겨졌던 두 선수가 부진한 가운데, 저번 경기 홍명보 감독은 10번 자리에 이근호 카드를 투입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김신욱과 이근호의 콤비다. 두 선수는 작년 울산에서 같이 뛴 경력이 있으며, 둘의 조합은 소속팀을 아시아 최강자 자리에 올려놓았다. 홍명보호에서는 그간 김신욱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이근호만 명단에 자주 오르는 상황이었으나 스위스전에서 기회를 얻은 김신욱은 수준급 팀을 상대로도 자신이 통한다는 것을 십분 보여주었다. 이근호 또한 교체로 들어갔지만 경기를 잘 소화했다. 그렇기에 홍명보 감독이 대표팀에서 두 선수의 조합을 시험해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경기였던 러시아전에서 두 선수의 조합은 기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왕성한 활동량이 눈에 띄었으나, 전반 이후 대표팀이 전체적으로 체력이 떨어진 모습을 보이자 이들도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코너킥 상황에서 김신욱이 골을 만들어냈지만, 짜임새 있는 플레이는 아니었다. 첫 번째 경기 후 이틀 만에 장거리 이동의 여파가 있는 상태에서 치른 경기라 발도 무거워보였다.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좋지도 않다는 말이 어울리지 싶다. 소속팀에서의 모습을 다 보이지 못하고 있는 김보경처럼 이 둘도 선발 투입 시에는 울산에서의 강력한 투톱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앞서 언급했듯 경기와 경기 사이의 휴식이 충분치 못해 팀이 전반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는 변명을 할 수 있다. 좀 더 좋은 체력적 상태로 두 선수의 조합을 시험해 볼 가치가 있다. 둘의 조합이 제대로 먹혀들어갔을 때 울산은 그야말로 ‘아시아 깡패’였으니 말이다.
답답하지만 아직은……
A 안, B 안, C 안까지 합격점이라 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상태가 합격점이어서도 안 된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만날 팀들은 어느 팀이라 해도 안심할 수 있는 약팀이 아니다. 그 팀들과의 대결에서 한국 대표팀이 우위를 점하고 경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공격의 열쇠를 쥔 10번의 활약이 꼭 필요하다. 팬들도 지금의 경기력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 포털 사이트부터 축구 팬사이트, 스포츠 기자들에 이르기까지 10번의 부진은 빼놓지 않고 드러나는 팀의 약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팬들처럼 선수를 비하하거나 매도하는 건 다소 이른 행동이다. 홍명보호의 국가대표팀에서 10번 자리로 부름 받았던 선수들은 아직 자신의 능력을 다 보이고 있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다 팀도 부임기간을 생각하면 빠른 속도로 완성되고 있는 참이다. 홍명보 감독도 인터뷰에서 ‘평가전에서 한 경기도 이기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월드컵 본선에서의 승리다.’라고 말한 적 있다. 월드컵 본선 조 추첨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다 해서 감독을 대체할 수도, 없는 선수를 생성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기다려보는 편이 좋지 않을까? 팀도 선수도 아직 성장의 여지가 남아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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