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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사람을 살리는 집에 살고 있는가?
집을 짓기 전에, 고치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들
안녕하세요. 전 오늘 소개해드릴 책, 『사람을 살리는 집』을 편집한 박지수라고 합니다. 이 책은 집에 대해 무언가를 계획하기 전에, 우선 ‘나를 살리는 집이란 무엇인가’ 같은 기본적인 물음에 스스로 답해보길 권하는 책입니다.
소리 나는 책
<빨간책방> ‘책 임자를 만나다’ 코너에서 2주간 다뤘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담겨 있는 구절들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읽어드릴 부분은 이 책의 도입부,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어떻게 하루키가 이 긴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지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거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 사이 스무 살 생일을 맞이했지만 그 기념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 그는 생명을 스스로 끊는 것이 무엇보다 자연스럽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는 이유를 잘 모른다. 그때라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 따위, 날달걀 하나를 들이키는 것보다 간단했는데. 쓰쿠루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마음이 너무나 순수하고 강렬하여 거기에 걸맞은 구체적인 죽음의 수단을 마음속에 떠올릴 수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구체성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만일 그때 손이 닿는 곳에 죽음으로 닿는 문이 있었다면 그는 거침없이 열어젖혔을 것이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말하자면 일상의 연속으로서.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가까운 곳에서 그런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죽었더라면 좋았을지도 몰라.’ 쓰쿠루는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랬더라면 지금 여기있는 세계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매혹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게 되고, 여기에서 현실이라 부르는 것이 현실이 아니게 되는 것. 이 세계의 그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자신에게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동시에 왜 자신이 그때 왜 그렇게까지 죽음의 턱밑에 다가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 또한 쓰쿠루는 잘 모른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민음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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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다보니 ‘신문사 기자’ 생활을 십 수년간 했고, 또 어찌어찌 하다보니 ‘영화평론가’로 불리게 됐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한 번도 꿈꾸진 않았던 ‘영화 전문가’가 됐고, 글쓰기에 대한 절망의 끝에서 ‘글쟁이’가 됐다. 꿈이 없었다기보다는 꿈을 지탱할 만한 의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삶에서 꿈이 그렇게 중요한가라고 되물으며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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