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게 음악 특유의 매력을 거부한 나라는 없었다. 엇박자를 기초로 한 느긋한 리듬은 즐기기에 그만이었다. 노래가 조금만 흘러나와도 금방 발 박자를 타게 되고 어깨를 흔들게 되니 이만큼 흥겨우면서도 즐거운, 중독성 있는 음악이 어디 있을까. 1970년대를 전후로 레게는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여기에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레게가 더욱 깊숙이 스며든 이후의 팝을 받아들이면서 가요 시장에서도 레게 음악을 만나볼 수 있었다.
지난 주 특집 <시대를 빛낸 레게 노래>에서 이즘은 시대를 빛낸 레게 노래라는 타이틀로 팝 레게 명곡 16곡을 선정했다. 이번에는 가요 명곡을 소개할 차례다. 사회적, 음악적인 영향력과 사람들에게 친숙한 대중성을 고려해 총 12곡으로 간추려 보았다. 전편과 마찬가지로 차례는 시대 순이다.
1 김준기-사랑은 가도 추억은
1980년대의 빼놓을 수 없는 밴드 ‘벗님들’ 활동 이후 김준기는 당시에는 생소하기만 했던 레게 탐구를 본격화한다. 그 결과가 1991년 자신의 첫 앨범에 수록한 「사랑은 가도 추억은」이다. 국내에 무더기로 레게리듬 곡이 쏟아져 나오는 기폭제 역할을 한 1993년 봄, 김건모의 「핑계」보다 시점이 1년 반 이상 빠르다는데 주목해야 한다. 이는 한국 레게의 전도사 혹은 자존심이라는 영광은 오롯이 그에게 주어져야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베이스와 드럼이 주도하는 전형적인 엇박의 업 비트 레게리듬은 여성 코러스와 유연한 멜로디 전개의 도움으로 레게와 대중가요의 성공적 퓨전을 부르면서 김준기의 ‘한국형 레게’ 구현에 대한 집중력을 증명한다. 레게 붐을 탄 당대 고 임종환의 골든 넘버 「그냥 걸었어」도 실은 김준기 작곡이다(레게는 아니지만 박강성의 「내일을 기다려」도 그가 썼다) 자신은 노력에 걸맞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대신 한국 레게의 개척이라는 공적이 늘 따라붙는 역사성을 얻었다
글/ 임진모(jjinmoo@izm.co.kr)
2 공일오비-수필과 자동차
노래를 들으며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은 귀여운 멜로디와 장난스런 보컬, 변화하는 시대상을 따스하게 포착한 가사이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할 점은 노래의 배경에 경쾌한 레게 사운드를 깔아놓았다는 공일오비의 접근법이다. 전주에서 들려오는 퍼커션 소리와 엇박자에 맞춘 반주는 흥겨움을 일으켰고 낯익은 터치가 아니었기에 독특한 매력까지 유발했다. 음악에 여러 사운드를 접목시키는 데 있어 공일오비는 탁월한 밴드였다. 장호일(본명 정기원)과 정석원 형제의 뛰어난 창작력과 소화력이 낳은 이 곡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 가치가 더욱 빛났다.
글/ 이수호 (howard19@naver.com)
3 김건모-핑계
허공에 퍼지는 첫 소절의 떨림부터 친근하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레게풍의 노래, 「핑계」는 파급력으로 그것을 증명한다. 김건모의 다음 앨범이 한국 음반판매기록을 세우는 큰 발판이 되었고 룰라, 마로니에, 투투 등 당시 여러 가수들의 밴드왜건으로 대대적 레게 붐을 기폭했다. 노래를 만든 프로듀서에게도 작곡가로서의 자신감을 심어준 결정적인 곡이라 하니 1990년대 김창환브랜드의 시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해외 시장의 유행을 읽고 우리나라 양식에 맞게 쓸 줄 알던 프로듀서 김창환의 ‘적정선 유지’가 컸다. 본격 레게 아닌 국산형 레게를 가공해낸 것이다. 하지만 느긋한 퍼커션과 베이스라인, 원래부터 매력적인 김건모의 음색에 최적화된 멜로디는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다. 묘하게 슬픈 가사에 들어맞는 위로 하는듯한 편곡이 재미있다. 오랜만에 들어본 노래는 그 시절 추억에 젖게 하기도 하지만 「핑계」는 오직 노래 분위기에 집중하게 한다.
글/ 전민석 (lego93@naver.com)
4 닥터레게-어려워 정말
과거 바비 킴이 래퍼로 활동했던 팀 닥터레게는 국내 레게 밴드의 시초이다. 레게가 트렌드로 부상하던 시기, 이들은 자신의 음악에 유행을 단순히 접목해 보는 수준을 넘어 레게라는 장르 자체를 전문으로 하겠다며 등장했고, 그 의지를 담아 팀명도 ‘레게 박사’로 지었다. 1993년 데뷔곡이자 히트곡 「어려워 정말」은 LA A&M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하고, 마돈나와 U2의 앨범 작업을 도맡았던 엔지니어 타비 모테가 녹음에 참여하는 등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수작으로 평가된다.
글/ 윤은지(theothersong@naver.com)
5 임종환-그냥 걸었어
김건모 「핑계」, 마로니에 「칵테일사랑」, 투투 「1과 2분의 1」… 1994년 여름은 완전히 레게의 흥이었다. 임종환의 「그냥 걸었어」도 레게를 선두로 끌어낸 곡 중 하나다. 「핑계」를 제외한 세 곡이 같은 시기에 가요 프로그램에서 상위권 다툼을 했을 정도니 그 열풍은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김흥국은 이 기류에 편승해 몇 달 뒤 「레게파티」라는 곡을 내기도 했다).
‘(전화 왜 했어?) 정말이야 / 처음엔 그냥 걸었어 / 비도 오고 기분도 그렇고 해서~’
비오는 날, 예고 없이 애인의 집 앞에서 전화를 걸어 주고받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유행이 되었다. 일반인들의 장기자랑은 물론 개그 프로그램 소재로도 종종 등장해 인기를 이어갔다. 어깨를 움츠리고 리듬에 맞춰 쭈뼛쭈뼛 걷는 동작으로 무대를 휘젓던 임종환은 수화기 너머로 말을 걸어오는 여성의 정체를 줄곧 비밀에 부쳐왔는데, 오랜 뒤 직접 밝힌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다. 「그냥 걸었어」의 황금 밭을 뒤로하고 뉴질랜드로 떠난 지 십 수 년, 트롯 앨범을 내고 새 출발을 알렸으나 안타깝게도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2010년 눈을 감았다.
글/ 조아름 (curtzzo@naver.com)
6 마로니에-칵테일 사랑
연초에 발표한 김건모의 「핑계」에 이어 1994년 여름의 레게 열풍은 이들이 이끌어갔다. 이국적인 사운드와 보컬을 통해 전해지는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 후리지아 꽃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 봤으면’과 같은 시적인 가사는 감미로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경쾌한 레게리듬과 금방 귀에 익어 따라 흥얼거리게 만드는 멜로디, 젊은 세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세련된 가사까지,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만한 요소는 충분했다. 3개월 동안 20만장 이상을 판매함으로써 음반 판매량 집계에서도 높은 순위를 기록하며 1990년대 초중반에 일었던 레게 붐의 주역의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발표된 지 약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이 곡은 여전히 많은 20대들의 ‘감성 레퍼토리’로 남아있다.
글/ 위수지 (sujiism@naver.com)
7 투투-일과 이 분의 일
멤버 전원이 스물두 살 동갑내기라는 점에 착안해 그룹명을 지었다는 투투. 신세대들의 사랑방식에 레게리듬을 입혀낸 이 곡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반쪽은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는 젊은이들의 연애감각을 「일과 이 분의 일」이라는 방식으로 규정해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다.
메인보컬 김지훈, 베이스의 유현재, 건반을 맡으면서 1집 대부분을 작사 작곡한 오지훈. 객원 보컬 황혜영으로 멤버구성이 꽤 탄탄했다. 특히 줄곧 옆에서 춤만 추다가 뒷부분에 잠깐 노래를 부른 황혜영은 인형 같은 외모로 팀의 마스코트이자 당시 남성 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일과 이분의 일을 추억하는 팬들이라면, 묘한 무표정에 두 팔을 번갈아 뻗어 가며 밟는 스텝, 그리고 ‘반쪽 안무’는 아직도 무조건반사다. 한번 들어도 따라 부르기 쉽고 자연스레 리듬을 타게 되는 이 곡은, 젊은 남녀의 사랑법을 통해 각기 다른 상상력과 감성을 소통하고자 했고 그 결과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며 인기를 끌었다.
글/ 허보영(stylishb@hanmail.net)
8 룰라-100일째 만남
그룹의 정체성 자체가 레게였다. 룰라(Roo'ra)라는 그룹명을 파헤쳐보면 무려 ‘레게의 뿌리(Roots Of Raggae)’라는 거창한 문구가 등장한다. 물론 루츠음악으로서의 레게 그 자체보다도 이후 다른 장르와 만나며 파생된 댄스홀 레게 음악에 더욱 가깝지만 우리나라의 가요, 특히 댄스 음악에 레게의 바람을 불어넣었다는 점에 있어 룰라의 음악 역시 한국의 레게 음악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100일째 만남」은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 <Roots Of Raggae>의 타이틀 곡이다. 자메이카 아티스트 샤기(Shaggy)와 닮은 이상민의 걸쭉한 래핑과 시원하게 뻗는 김지현의 보컬이 레게 사운드에 녹아든 이 노래는 룰라의 첫 번째 히트곡이자 이후의 인기 행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여담으로 덧붙이자면, 「100일째 만남」은 훗날 젝스키스의 「폼생폼사」와 티(T)의 「시간이 흐른뒤」, 성시경의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등을 만든 작곡자 박근태의 첫 번째 히트곡이기도 하다. 더불어 훗날 컨츄리 꼬꼬의 멤버가 되는 신정환 역시 이 곡을 통해 데뷔하며 본격적인 가수 인생을 시작했다.
글/ 이수호(howard19@naver.com)
9 바비 킴-고래의 꿈(Falling in love again)
닥터 레게를 거쳐 부가킹즈의 멤버로서 활동하던 바비 킴의 솔로 2집 앨범 <Beats Within My Soul>에 수록된 곡이다. 힙합, R&B부터 레게까지 아우르던 2집의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트랙이면서 긴 무명 시절을 거치던 바비 킴을 대중들의 시야라는 수면 위로 부상시켜준 곡이다. 특히 트럼펫 세션은 바비 킴의 아버지가 직접 참여하면서 좀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오르간 소리가 곡의 전체적 뿌리를 받치고 트럼펫이 주 멜로디를 이끌면서 인상적인 레게 곡이 만들어졌다. 가사는 이 곡을 오랫동안 회자되도록 만든 또 다른 요소였다. 스스로를 고래에 비유하며 먼 바다로 떠나려는 화자가 등장하는 가사는 좌절하거나 무기력한 이들에게 잔잔한 용기를 심어주기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고래는 바비 킴의 화신 그 자체다. 이 곡을 통해 바비 킴은 ‘꿈을 찾아 바다로 떠나는 고래’처럼 새로운 음악적 전기를 맞게 된다.
글/ 이기선 (tomatoapple@naver.com)
10 스토니 스컹크-Ragga Muffin
척박한 한국 레게 시장에서 스토니 스컹크가 이뤄낸 업적은 엄청나다. 네 장의 정규 앨범을 통해 어디서도 들을 수 없던 진한 레게 힙합을 선보였으며, 멤버 스컬의 미국시장 진출과 빌보드 차트 등재 등 대외적 인정까지 확보했다. 개척자의 길을 걸었으나 끝내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팀을 해체하게 된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YG 엔터테인먼트의 지원으로 본격적인 자신들의 음악을 들려주기 시작했던 2집의 수록곡 「Ragga Muffin」은 그들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둔탁한 드럼 비트와 어우러지는 퍼커션과 흥겨운 기타 소리는 완벽한 한국형 ‘댄스홀 레게’ 곡을 만들어냈다. 현재 쿠시는 잘나가는 아이돌 댄스 음악 프로듀서로, 스컬은 하하와 함께 솔로 커리어를 이어나가는 등 오히려 팀 해체 이후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지만, 「Ragga Muffin」 같이 끊임없이 후대에 화자될 앤섬 (anthem)을 다시 만들기는 어려워 보인다. 2005년의 스토니 스컹크는 한국 레게 씬의 ‘창과 방패, 음지의 태양’ 이었으니 말이다.
글/ 김도헌 (zener1218@gmail.com)
11 윈디시티-Elnino Prodigo
“단지 리듬만 차용한 것은 진짜 레게가 아니라 ‘레게풍의 노래’에 지나지 않는다” 윈디시티 김반장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레게 ‘정신’을 숭배하는 뮤지션이다. 그가 해석하는 레게는 ‘자연과 생명을 섬기는 자세’다. 최근에는 이런 사상을 한국 토속적 소스와 비벼 독창적인 음악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Elnino Prodigo」는 윈디시티의 데뷔 음반에 수록된 곡으로 민속적인 흙냄새는 덜하다. 다만 “우린 음악이 너무 좋아. Music lover and we playin' long long time”등의 가사를 통해 음악에 대한 무한 사랑을 드러낸다. 이 속에서 묻어나는 기분좋은 행복감과 자부심은 ‘레게’와 ‘레게풍 노래’의 차이가 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글/ 김반야 (10_ban@naver.com)
12 킹스턴 루디스카(Kingston Rudieska)-My cotton candy
듣고 있자면 몸이 절로 움직이게 하는 선동력은 킹스턴 루디스카의 지대한 힘이다. 때문에 여름 록페스티벌의 섭외 1순위일 수밖에 없다. 올해에도 수많은 공연장에서 울려 퍼질 「My cotton candy」는 이들의 대표적 스캥킹(skankin') 유발곡이다. 무조건 반사처럼 신명 나게 놀아나 보자는 이들의 음악판은 덩실덩실 어깨를 들썩이는 우리네 탈춤판과 흡사하다. 뿌리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경쾌한 선율과 해학적 움직임은 스카에 대한 강박을 통해 체득한 이들의 절대무기다.
글/ 신현태 (rockersh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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