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클래식’이라는 용어를 쓸 때, 그것은 서양음악 전반을 가리키는 의미로 흔히 사용됩니다. 중세부터 바로크, 고전, 낭만, 현대 등 서양음악 전반을 통틀어 지칭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클래식’이라는 말은 고전주의 음악을 지칭합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스트리아 빈에서 완성된 고전주의, 그러니까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시대를 관통했던 음악적 양식과 그 흐름을 일컫는 것이지요. 약간 무리가 있긴 하지만, 바하가 타계한 1750년부터 베토벤이 세상을 뜬 1827년까지를 고전주의 시대라 칭합니다. 사상적으로 계몽주의가 융성하고 시민계급이 새로운 시대의 주체로 떠오르고 있던, 이른바 근대의 초입입니다.
고전주의는 음악사의 사전적 의미를 종종 뛰어넘어 ‘어떤 태도’를 뜻하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글쓰기에 비유한다면, 문장의 주술관계와 조사, 어미의 활용 등에서 문법에 딱딱 맞게 글을 쓰는 경우를 ‘고전적’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공부했던 교과서의 문장들이 대체로 고전적입니다. 하지만 좀 나이가 들면서, 그 단조로운 문법에서 벗어나 나름의 멋과 개성을 담아보려는 자의식이 생겨납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출처: 위키피디아]이를테면 베토벤은 그런 자의식이 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문장의 주술관계를 슬쩍 도치시킨다거나, 조사와 어미도 기존의 것을 슬며시 변형시켜 새로운 뉘앙스를 만들려고 했던 선구자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엄청난 정신의 힘을 요구한 작업이었지요. 그래서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는 개인적 격랑을 거치면서 자신의 새로운 음악적 돛을 올립니다. 그 장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곡이 ‘내 인생의 클래식 101’의 11월 15일자 컬럼에서 함께 들었던 교향곡 3번 ‘에로이카’였지요. 그때 저는 “바야흐로 ‘낭만’의 시대가 ‘에로이카’로부터 열립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곡이 보여주는 힘찬 리듬과 확장된 규모는 이전의 교향곡에서는 볼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베토벤은 3박자로 진행되는 악구에서 과감하게 2박자의 리듬을 개입시켜 당김음의 효과를 냅니다. 완고한 고전주의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감히 이단적 행위였지만, 베토벤은 그런 식의 과감한 시도를 통해 막강한 음악적 추동력을 얻어냅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고전주의 시대의 작곡가인 동시에, 결코 ‘고전주의’라는 틀에 가둘 수 없는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오늘, 두 번째로 들을 베토벤의 음악은 <교향곡 5번 c단조>입니다. 베토벤의 9개 교향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지요. 3번을 완성한 1804년에 작곡을 시작했다가 잠시 중단했는데, 그 이유는 요제피네 폰 다임 백작 부인(1779~1821)을 향한 연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이 누구인고 하니,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을 헌정했던 프란츠 폰 브룬스비크 백작(1771~1849)의 여동생입니다.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그에게는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큰 동생은 테레제(1775~1861), 작은 동생이 요제피네였습니다. 베토벤은 1800년부터 테레제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연모의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1949년에 발견된 베토벤의 연애편지 13통을 통해 동생 요제피네도 사랑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왼쪽부터) 요제피네 폰 다임 백작 부인, 테레제 브룬스비크, 줄리에타 귀차르디 [출처: 위키피디아]
잠시 영화 한 편을 떠올려보겠습니다. 1994년 영국에서 만들어진
<불멸의 연인>(Immortal Beloved)이라는 영화입니다. 게리 올드만이 베토벤 역으로 나왔었지요. 영화의 첫 장면은 1827년 오스트리아 빈, 베토벤의 장례식입니다. 베토벤이 남긴 유품 속에서 편지 한 통이 발견됩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베토벤이 어떤 여인을 ‘불멸’이라 칭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넘긴다는 편지였지요. ‘나의 천사이자 전부이며 나의 분신이여…. 잠자리에 누워서도 온통 당신 생각뿐이오. 내 불멸의 연인이여.’ 이토록 절절한 사랑의 대상이 과연 누구였을까요? 베토벤의 제자이자 오늘로 치면 매니저이기도 했던 안톤 쉰들러(1795-1864)가 편지에 등장하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여인을 찾아 나섭니다. 영화 <불멸의 연인>은 바로 그 여인을 찾는 과정을 약간의 추리기법을 곁들여 그려가고 있지요.
베토벤이 지칭한 ‘불멸의 연인’이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음악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이 줄리에타 귀차르디(1784~1856)입니다. 베토벤이 서른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던 14세 연하의 아가씨였는데, 그녀는 앞서 언급한 테레제와 요제피네의 사촌이었습니다. 베토벤은 실제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가 거절을 당하기도 하지요.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이 바로 그녀에게 헌정된 곡입니다. 말하자면 베토벤은 줄리에타와 테레제에게 거의 동시에 피아노를 가르쳤는데, 그 두 여인은 모두 ‘불멸의 연인’ 후보로 올라 있습니다. 거기에 요제피네까지 사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베토벤은 한 집안의 자매와 사촌까지 두루두루 마음에 뒀던 셈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불멸의 연인’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습니다. 세 여인 중 한 명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여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베토벤이 교향곡 5번의 작곡을 잠시 중단했던 이유는 요제피네를 향한 사랑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시기의 베토벤은 격렬하고 투쟁적인 곡을 쓰는 것을 잠시 뒤로 미룹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다가 요제피네와의 사랑이 좌절에 부딪히면서 다시 교향곡 5번의 악보로 돌아오지요. 그것이 1807년이었고 이듬해에 드디어 곡을 완성합니다. 그러니까 곡의 구성에서 완성까지 5년의 세월이 걸렸던 셈이지요.
베토벤은 교향곡 3번에서 보여줬던 ‘고난과 투쟁, 그리고 승리’의 드라마를 한층 더 밀고 나갑니다. 클래식을 별로 안 듣는 분들도 이 곡의 1악장 첫머리에 등장하는 4개의 음, 이른바 ‘운명의 동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요. 베토벤은 이에 대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안톤 쉰들러가 쓴 베토벤 전기에 등장하는 내용인데, 실제로 베토벤이 그렇게 말했는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운명’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지요. 교향곡 3번에는 베토벤 스스로 ‘에로이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5번을 따라다니는 ‘운명’이라는 별칭은 후대 사람들, 특히 일본인들의 작명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1악장」1악장은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 ‘힘차고 빠르게’란 뜻입니다. 교향곡의 역사에서 이처럼 격렬하게 문을 여는 1악장은 찾아보기 힙듭니다. 어두운 시련의 느낌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듣노라면 다가올 여명을 간간히 암시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지요. 오케스트라 총주(總奏)가 운명의 동기를 1주제로 제시하고, 이어서 호른과 바이올린이 2주제를 노래합니다. 단호하고 남성적인 리듬으로 막을 내리는, 전체적으로 긴장감 넘치는 악장입니다.
「2악장」2악장은 안단테 콘 모토(Andante con moto). ‘느리게 그러나 활기차게’라는 뜻입니다. 비올라와 첼로 등의 저현악기들이 첫번째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두번째 주제를 클라리넷과 파곳 등의 목관악기들이 연주합니다. 이 두 개의 주제를 여러 차례 변주하는데, 전체적으로 약간 어두우면서도 부드럽고, 그러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풍기는 악장입니다. 1악장과 2악장의 관계를 ‘긴장’과 ‘이완’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3악장」3악장은 알레그로(빠르게) 템포의 스케르초입니다. 첼로와 콘트라베이스의 약음(弱音)으로 문을 열었다가 바이올린이 그것을 이어받은 후, 호른이 ‘운명의 동기’가 변형된 악구를 우렁차게, 또는 갑작스럽게 터뜨립니다. 그러다가 고요히 침잠했다가, 조금씩 꿈틀거리면서 또 한번의 도약을 준비하지요. 전체적으로 가장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면서 스케르초 악장다운 유머를 구사합니다.
「4악장」4악장 알레그로(빠르게)은 마침내 환희의 악장이지요. 오케스트라 총주(總奏)가 먹구름을 뚫고 마침내 솟아오른 햇살처럼 승리의 주제를 노래합니다. 이어서 바이올린이 두번째 주제를 활달하게 연주하지요. 중간쯤에 3악장 스케르초의 마지막 부분을 잠시 회상하다가 다시 맹렬한 기세로 돌진합니다. 마지막 코다(결미)는 장엄한 기백이 넘치는 승리의 노래라고 할 수 있지요. 고난의 시절을 견뎌야 할 많은 분들께,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응원의 노래로 띄워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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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angler)ㆍ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43년/DG
이른바 ‘역사적 음반’이다. 푸르트벵글러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수차례 녹음했지만, 소위 ‘전시 녹음’으로 불리는 1943년 녹음과 전쟁 이후인 1954에 빈필하모닉을 지휘해 연주한 녹음이 수작으로 꼽힌다. 특히 전시 녹음에서 지휘자 푸르트벵글러가 보여주는 존재감은 막강하다. 1악장 ‘운명의 동기’에서부터 섬찟하게 다가오는 음악의 응집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왜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로 베토벤을 들어야 하는지를 실감케한다. 특히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푸르트벵글러는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내면서 음악적 장관을 펼친다. 하지만 음질에 대한 기대는 미리 접어두는 것이 좋겠다. 1940년대의 모노녹음이다.
▶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ㆍ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74년/DG
꼭 들어봐야 할 음반이다. 클라이버는 완벽주의자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이런 지휘자는 좀 피곤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완벽주의는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역사적 명연을 음반사에 아로새겼다. 특히 음악의 세밀한 조탁이라는 측면에서 이 연주를 따를 녹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템포는 전반적으로 약간 빠른 편이다. 리듬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1악장의 스피드감, 3악장의 변화무쌍함, 4악장에서 보여주는 분출도 힘차다. 하지만 클라이버의 연주는 결코 낭만의 과잉으로 치닫지 않는다. 각 악장을 관통하는 극적인 표정을 제대로 끌어내면서도 치밀한 조형미를 구축한다. 단, 이 음반을 구입할 때 주의사항이 하나 있다. 국내 라이센스가 아닌 수입반으로 반드시 선택할 것.
▶ 오스모 벤스카(Osmo Vanska)ㆍ미네소타 오케스트라/2004년/BIS
21세기의 녹음 중에서는 이 음반을 추천한다. 핀란드 출신의 벤스카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미네소타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상당히 빼어난 일련의 베토벤 연주를 들려준 바 있다. 5번, 6번, 7번 등이 호평받는다. 특히 영국 <그라모폰 가이드>는 그들의 5번 연주를 수작(秀作)의 반열에 올려놨다. 벤스카의 장점은 약간 차가운 듯하면서도 매우 치밀한 연주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은 북유럽 출신 지휘자들의 보편적 특징일 수도 있다. 5번 녹음에서도 그렇다. 다이내믹 레인지를 강조해 극적인 표정을 드러내기보다는 매우 세밀하고 깨끗한 연주를 펼친다. 속도감은 표준적이다. 음질이 빼어나서 오디오파일용 음반으로도 환영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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