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에도 나와 있지만 시드니 칼튼은 자신이 죽은 뒤 행복한 루시의 가족을 생각해요. 그들의 자식을 낳으면 시드니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으면 또 시드니라고 이름을 짓고 행복하게 살 거라는 걸. 너무 가슴 아픈 사랑이지만 저라도 그렇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의 흥행 덕이었을까? 뮤지컬 역시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작들이 쏟아진다. 무대 장치나 작품의 색깔도 은근 비슷하게 보일 지 모를 작품들이 관객에게 어려운 선택을 요구한다. 우연히 그리 된 것이겠지만 설핏 경쟁의식을 느낄 수도 있을 배우들, 지난해에 이어 재연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찰스 다네이’로 변신한 배우 최수형은 그러나 자신만만해 보인다.
“<두 도시 이야기> 원작이 영국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하잖아요. 뮤지컬에서도 고전의 힘이 살아있고요. 파리와 영국을 무대배경으로 하는데 6개의 철제 구조물로 입체감 있게 잘 표현이 되고요. <두 도시 이야기>의 노래도 <레미제라블> 못지않게 좋은데요. 하면 할수록 새로운 깊이가 나오더라고요. 묘한 게 듣는 사람은 듣기 좋다고 할지 모르지만 부르는 사람은 너무 힘들어요. 노래하는 사람을 참 힘들게 하죠. 정답이 정해져 있어서 하면 할수록 질리는 음악이 있는데 <두 도시 이야기>의 음악은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요. 저희 음악이 클래식해서 기타나 드럼 같은 리듬악기가 없어요. 그래서 철저하게 음악감독님과의 교감이나 조화가 잘 이뤄져야 해요. 피아노로만 연습하다 처음 오케스트라와 맞춰볼 때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그저 감탄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브로드웨이 여배우가 교체될 만큼 어렵다는 루시의 노래 ‘Without a word’, 누군가 불러준다면 넘어갈 텐데 싶은 시드니의 ‘Reflection’, 시드니와 다네이의 슬픈 자장가 ‘Little one’, 우리나라 여배우 중에서도 몇 못 부르겠다 싶은 마담 드파르지의 ‘Out of sight, out of mind’ 등 뭐 하나 부르기 쉬운 노래는 없다. 하지만 분명 관객에겐 귀에 꼿꼿이 박혀 흥얼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두 도시 이야기>의 노래는 하면 할수록 이런 게 있었네, 저렇게 할 수도 있네 하는 게 계속 나와요. 그 방대한 양을 무대 위에서 짧은 시간 안에 함축적으로 보여줘야 되니까 속으로는 이만큼 갖고 있는데 입으로 표현하는 건 요만큼 밖에 안 나오는 것 같고, 이걸 풀고 싶으니까 뭔가 계속 더 찾게 돼요.”
최수형은 상남자라는 오해
<두 도시 이야기>의 재연에 갖는 관객의 관심과 기대에 부담도 크다는 최수형, 그만큼 단단히 준비했다.
“재공연에 새로 들어간다는 게 굉장한 부담이거든요. 책을 먼저 읽었어요. 찰스 다네이도 굉장히 남성적인 인물이더라고요. 높은 귀족의 신분인데도 모든 걸 다 버리고 소신만 가지고 영국에 가서 일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삼촌과 대립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남자이기도 하고요. 겉으로 보기엔 귀하고 착하게 자란 사람이지만 내면의 남성스러움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최수형의 다네이를 본 블로거들은 득달같이 ‘상남자스럽고 패기 있는 다네이의 등장’이라는 평을 올렸다. 뮤지컬 <아이다>에서 상남자 같은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던 걸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바. 그렇다면 상남자의 매력, 최수형 본연의 것일까?
“얼마 전에 윤형렬 군이 그러더라고요. 형은 태어났을 때부터 수염이 났을 것 같다고. 그런 이미지 때문에 이제까지 장군 역할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저는 참… 소녀 같은 감수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찰스 다네이를 해보고 싶었어요. 남자다운 면도 있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지는… 저는 분명 그런 면이 있는데 주변에서 모두 상남자 같다고 하니까… 살을 더 빼야 하나? 보시는 이미지와 저의 원래 이미지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그 갭을 줄이기 위해 제가 더 노력해야겠죠.”
처음부터 테이블 앞에 앉아 다정다감 말하는 그를 보며 눈치 챘어야 했더랬는데… 금방이라도 ‘1 더하기 1은 귀요미’를 부를 것만 같은 애교스러운 눈빛으로 변했다!
“외모는 좀 각지게, 남자답게 생겼지만 노래나 목소리도 ‘부들부들’ 해요. 성격도 상남자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애교도 많고, 유머러스하고, 저 나름대로는 재치와 유머가 번뜩인다고 생각해요.”
연습할 때도 그래서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 그. 하지만 그 상남자스러운 캐릭터 때문에 역할의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그걸 계속 깨는 작업인 것 같아요. 보는 분들마다 장군 같은 센 남자 역할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데 <쓰릴미>에서의 역할도 저는 어울린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미지를 탈피하는 게 제 숙제죠.”
하지만 여전 그가 <쓰릴미>에서 “오늘 밤 집에 안 들어간다고 아빠한테 말했어.”라고 말하는 건 상상이 안 간다.
포텐은 꼭 터뜨려야만 하는 건 아니다.
<두 도시 이야기>에서 찰스 다네이는 사랑하는 루시와 딸을 영국에 두고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간다. 친구를 구하러. 하지만 악명 높은 귀족 가문의 찰스는 사형당할 위기에 처하고, 소신과 사랑 하나로 살았지만 무기력하게도 그가 바꿀 수 있는 상황은 없다.
“솔직히 <아이다>를 할 땐 내지르는 게 많으니까 속이 시원했거든요. 그런데 <두 도시 이야기>를 하면서는 슬픈 이야기라 해소가 안 되더라고요. 하지만 답은 루시와의 사랑 같아요. 내가 뭔가 해소하려고 할 게 아니라 루시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면 다네이 역할에 충실했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장치상 그런 부분이 작품에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저는 터뜨릴 것이 아니라 루시와 다네이가 그렇게 사랑과 가정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묵묵히 그리려고 하고 있어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꼭 그 사랑의 전부는 아닌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대개 슬픈 사랑이 이에 해당하지만. 풋풋하며 성실한 다네이의 사랑도,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결코 아깝지 않은 시드니의 사랑도, 재연에서 닭살 돋을 정도의 애교로 무장했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더 강인해지는 루시의 사랑도 모두 공중에 터져 삽시간에 산화되는 사랑이 결코 아니다. 박수를 유도하는 흔한 뮤지컬처럼 극적으로 터지진 않지만, 그래서 그 먹먹한 울음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두 도시 이야기>… 철저히 와인을 부르는 뮤지컬이다.
“저라면 못 버리죠”
시드니 칼튼을 맡은 윤형렬에게 사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지 묻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두고 피바람이 불고 있는 혁명의 소용돌이로 진정 다네이는 가야만 했을까?
“다네이의 솔로곡이 2막 때 있어요. 친구를 구하러 가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버리고 친구를 구하러 가야하나 고민하는 씬인데요. 사실 아직 고민인 게 저 같으면 못 갈 것 같거든요. 어떻게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두고 가요. 후작 역할을 하는 선배님께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어요. 찰스 다네이는 뼛속까지 귀족이라 갈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리 내가 신분을 버렸어도 내가 가면 해결될 거라는 귀족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봐야죠.”
최수형은 어쩌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도 ‘꼭 버리고 가야 하나’ 고민이 계속될지 모른다 말했지만 기자는 그런 인간 최수형을 더 이해하기로.
솔직히 시드니 칼튼, 탐나지 않던가?
기자가 윤형렬을 인터뷰하며 뽑은 제목이 이랬다. “당신은 과연 시드니 칼튼을 좋아하게 될까, 윤형렬을 좋아하게 될까?” 그만큼 캐릭터 자체가 배우의 에너지까지 드높이는, 배우에겐 참 바람직한 역할 되시겠다. 최수형 역시 시드니 칼튼이 탐나지 않더냐 슬쩍 물었을 뿐인데, 진지하게 도전할 의사를 전했다.
“너무 멋있더라고요. 시드니 칼튼은 세상을 등지고 고뇌가 많은 역할이니까 연륜이 있으면 더 잘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욕심 있죠. 너무 너무 너무 해보고 싶어요. 다음에 어떤 역할이나 작품을 해보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지금은 시드니 칼튼을 해보고 싶다고 말해요.”
그래서 그가 다네이가 가족을 버리고 친구를 구하러 가는 것보다 시드니 칼튼이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걸 더 이해하고 지지하는지도 모르겠다.
“원작에도 나와 있지만 시드니 칼튼은 자신이 죽은 뒤 행복한 루시의 가족을 생각해요. 그들의 자식을 낳으면 시드니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고 그 자식이 자식을 낳으면 또 시드니라고 이름을 짓고 행복하게 살 거라는 걸. 너무 가슴 아픈 사랑이지만 저라도 그렇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천천히 가되 후퇴하고 싶진 않아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고찰로 역할을 분석한 최수형, 배우인생에 있어서도 꽤 중요지점에 닿아있다고.
“최고는 아니고요. 최고가 10이라고 쳤을 때 <두 도시 이야기>는 6정도? 작품을 할 때는 힘들고, 비교되거나 박탈감이 있을 때도 있지만 끝낼 때마다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에 뿌듯해지거든요. 저는 돈을 못 벌어도 뮤지컬을 했을 거예요. 특히 <두 도시 이야기>라는 작품은 연습할 때부터 다른 작품보다 느끼는 게 너무 많았어요. 배우로서 하나를 배워간다고 생각한 작품이죠.”
그렇다면 배우인생의 그래프에서 10을 찍는 날은 언제쯤 올까?
“안 올 것 같아요. 정점을 찍고 내려오는 건 싫으니까 천천히 가려고요. 한 순간 잘 되는 건? 원하지 않고요. 천천히 가되 후퇴하고 싶지는 않아요.”
잘 안될 땐 ‘이 씬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은데 왜 안 될까?, 이 바보야’, 의외로 이렇게 앙증맞게 글로 적는단다. 반면 무대 위에 가장 좋은 모습으로 서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커지지만 그런 스트레스쯤은 무대 위에서 풀어버리는 배포도 있다. 그의 배우인생의 그래프가 정점을 찍을 때쯤 그는 낙서장에 뭐라고 속마음을 적을까?
참, 2009년에 <노트르담 드 파리>의 인연으로 뮤지컬 배우 네 남자(최수형, 윤형렬, 문종원, 김성민)가 결성한 그룹 4one, 대체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전설의 그룹이죠. 되게 아쉬워요. 다시 하고 싶은데 저 빼고 다들 너무 잘 나가셔서… 기회가 되면 다시 뭉치고 싶어요. 요즘도 자주 보기는 해요. 주로 ‘우리 언제 할 수 있을까?’ 얘기하죠. 아마 언젠가는 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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