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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에서 만난 플라시도 도밍고와 안드레아 보첼리

플라시도 도밍고,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하는 아레나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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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나 입장까지만 1시간, 지난해와는 또 다른, 고대 원형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의 열기에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무대는 9시30분이 돼서야 안드레아 보첼리의 감미로운 음색으로 막을 엽니다. 보첼리에게도 2만여 명의 들끓는 열기가 전해졌는지 그의 음색에서도 긴장감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자, 이제 상상을 해보세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베로나, 그 하늘이 고스란히 올려다 보이는 2세기 초에 지어진 원형 경기장, 그곳에서 울러 퍼지는 보첼리의 음성. 기차 8시간쯤은 두 번도 탈 수 있겠다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1년 만에 다시 찾은 베로나

오전 6시30분에 비엔나 서역을 출발한 기차는 인스부르크에서 한 번 갈아탄 뒤 꼬박 8시간을 달려 오후 3시 베로나에 도착했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이 정도 기차나 버스 여행은 일도 아니지만, 극도로 질 낮은 체력을 지닌 저에게는 ‘쓰리 테너’를 만나겠다는 집념으로 버텨낸 그야말로 장도(長途)였습니다. 어차피 저에게는 동선과 주머니 사정을 고려한 여행이 아니라 음악 축제를 따라 나선 여행이기에, 공연 일정에 맞춰 비엔나에서 베로나로, 북유럽에서 그리스로, 러시아에서 스페인으로 비행기를 타고 지그재그로 움직여야만 합니다. 유레일도 있고 유로라인도 있는데, 유에어라인 패스는 왜 없는지, 수화물에 카드 결제 비까지 꼬박꼬박 챙겨 받는 저가항공사들이 야속할 따름입니다.

어땠든 인스부르크까지는 정신없이 자던 저는 베로나행 열차부터 창밖을 유심이 바라봤습니다. 눈 덮인 티롤 산맥이 계속 이어지는 창밖이 잔뜩 흐려 있거든요. 제 이름에 ‘물 하(河)’ 자가 있는데, 비를 몰고 다니는 걸까요? 사실 이번 공연기행은 루트가 너무나 화려해서 기존에 갔던 도시는 과감히 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로나 오페라 축제 측에서 보낸 뉴스레터를 무심히 보던 저는 파바로티를 대신해 안드레아 보첼리가 합세한 ‘쓰리 테너 공연’ 일정을 보게 된 것입니다. 안 보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 이렇게 찬란한 루트를 만들고야 말았지 뭡니까. 기억하시나요? 지난해 여름 베로나를 찾은 저는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다 폭우에 공연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때 다시 오겠다 말했는데, 정말 1년 만에 이렇게 다시 오네요.


플라시도 도밍고,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하는 아레나 100주년

2013년 베로나 오페라 축제(//www.arena.it/en-US/HOMEen.html)는 6월 14일 <아이다>를 시작으로 9월 8일까지 <나부코> <라트라비아타> <일트로바토레> <로미오 앤 줄리엣> <리골레토> 등 6편의 작품과 4개의 갈라쇼로 총 58회의 무대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베르디 탄생 2백 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이 더욱 풍성해졌는데요. 본 프로그램에 앞서 6월 1일,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안드레아 보첼리가 함께 하는 오페라 갈라 쇼가 열린 것은 올해가 아레나 페스티벌 탄생 100주년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913년 베로나 출신의 테너 지오반니 제나텔로와 극장 기획자 로바토가 베르디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야외 오페라 공연을 시작했거든요.


스타가 서는 무대는 역시 다른 걸까요? 저녁 7시, 공연 시작 2시간 전이지만 아레나의 많은 출입구에는 끝이 보이지 않게 줄이 서 있습니다. 저렴한 좌석은 자유석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모여든 관람객들은 먹을 거리와 담요, 방석 등을 짊어지고 길게 길게 줄을 잇고 있습니다. 저는 공연장까지 데려다 준 이탈리아 친구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뒤늦게 행렬에 가담했는데요. 아레나 입장까지만 1시간, 지난해와는 또 다른, 고대 원형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의 열기에 숨이 멎을 것 같았습니다. 무대는 9시30분이 돼서야 안드레아 보첼리의 감미로운 음색으로 막을 엽니다. 보첼리에게도 2만여 명의 들끓는 열기가 전해졌는지 그의 음색에서도 긴장감이 여실히 느껴졌습니다. 자, 이제 상상을 해보세요.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베로나, 그 하늘이 고스란히 올려다 보이는 2세기 초에 지어진 원형 경기장, 그곳에서 울러 퍼지는 보첼리의 음성. 기차 8시간쯤은 두 번도 탈 수 있겠다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급기야 도밍고와 보첼리가 함께 무대에 섭니다. 여기저기에서 팝스타 콘서트 못지않은 환호성이 쏟아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는 도밍고의 노래를, 커서는 보첼리의 노래를 더 많이 들었는데요. 그런데 두 사람이 한 무대에서 노래를 주고받으니 특징이 확연합니다. 이미 환갑을 내다보는 보첼리이지만 그의 음색에서는 청년의 맑음이, 반면 도밍고의 음색에서는 장년의 깊이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보첼리에서 도밍고로 넘어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옵니다. 세상에, 제가 두 사람의 노래를 한 무대에서 듣다니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날 호세 카레라스는 무대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젊은 보첼리의 무대 점유율이 훨씬 높았고, 도밍고는 지휘를 하는 등 ‘음악가’로서의 다채로운 면모를 선사했습니다. 갈라쇼인 만큼 유명 오페라의 인기 있는 아리아는 원 없이 들었는데요. 특히 이날 공연은 이탈리아 TV로도 방영되는지 녹화까지 진행돼 더 화려했습니다. 아레나 공연은 무대전환을 매번 사람의 손으로 진행하는 까닭에 중간 중간 여백이 생기는데요. 경기장의 탁월한 음향 덕에 객석에서 사회자에게 툭툭 말을 건네는가하면, 한 관람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아를 뽑아냅니다. 그런데 이게 또 제법 들을만해서 관람객들은 웃음과 함께 큰 박수를 보냅니다. 자정을 넘도록 이어지는 감동과 웃음의 황홀한 무대. 어쩌죠? 저 베로나에 또 와야겠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은 전해진다

저는 이번 베로나 공연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 친구 집에 머물렀습니다. 사실 신세를 질 정도로 막역한 사이는 아닌데, 자정이 넘어 숙소에 혼자 찾아갈 생각을 하니 겁도 나고, 또 이런 것도 경험이다 싶어, 평소와 달리 친구의 친절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습니다. 친구의 이름은 에네리코, 이제 30대에 접어들었는데요. 아레나 극장에서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아주 멋진 집에 부모님, 6명의 동생들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그날 아레나를 찾은 사람은 멀리 한국에서 온 저 뿐이었습니다. 공연에 앞서 에네리코의 친구들과 저녁을 함께 먹었는데요.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아레나에 몇 번이나 가봤느냐는 질문에 친구들 모두 한두 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와본 적이 있다는 친구는 K-POP이 더 좋답니다. 공연 시간이 임박해오자, 도밍고와 보첼리를 포기하면 레스토랑 지하에 있는 펍에서 또 다른 공연과 함께 재밌는 시간을 선사하겠다고 농담까지 건넵니다. 서울에 살면 오히려 한강 유람선을 타지 않는 것만 비슷한 현상일까요? 에네리코는 저를 아레나에 보내고 친구들과 펍에서 시간을 보내다 자정이 지나 다시 저를 데리고 집에 갔습니다. 그에게는 저의 벅찬 기쁨이 신기한가 봅니다. 참, 에네리코네 집 무선 인터넷 비밀번호는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 숫자를 더해 20자리가 넘어 사용을 포기했습니다. 밀라노 공항에서 와이파이를 이용하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문득 우리와 그들이 갖고 있는 것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받는 부분도 다른 것이겠죠. 과거의 흔적을 찾아 자꾸만 유럽을 찾는 우리들, 우리나라의 빠른 지금에 관심이 많은 그들. 에네리코가 한국을 찾는다면 저는 무엇을 보여줘야 할까요?

낮 12시, 베로나에서 두 시간을 달려 다시 베르가모 공항을 이륙한 저는 오후 9시, 탈린 공항에 착륙을 앞두고 있습니다. 에스토니아 탈린 역시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죠. 옆에 앉은 오스트리아인이 자기들도 잘 모르는 탈린을 아시아 사람들이 찾아오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하네요. 서로에게 결핍된 것을 찾아 미친 듯이 빠져드는 사랑처럼 저 역시 우리에겐 부족한 과거의 흔적만 쫒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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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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