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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퍼니처주의’ 입니다

텅 비었을 때의 여백, 그대는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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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들여놓지 않는 습관 탓인지 6개월이 넘도록 집 안은 텅 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내 고민했던 왜 나는 임시의 삶을 사는가하는 질문. 어쩌면 나는 사는 것 자체가 임시라는 유목민적 세계관 탓이 아닐까. 게다가 서울에서 혼자, 수차례의 이사를 거듭하면서 임시의 삶에 익숙해졌고.


10년 이상 서울에 산 30대 싱글녀의 평균 이사 횟수는 얼마나 될까? 나야말로 이사 좀 해봤다 자부하는 터,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화려한 이력을 자랑했다. 최소 5회 최대 10회. 잦은 이사 탓에 주민증 뒷란, 주소 적는 곳은 꽉 차 더 이상 주소를 기재하지 못한다. 그리고 주민증에 누락된 주소지들처럼 이사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다. 마음 맞는 친구랑 같이 살면 마냥 좋을 거 같아 동거를 시작했다가 영원히 등 돌린 경험, 눅눅한 반지 하나 한낮의 열기를 밤까지 품고 있는 옥탑방, 5평의 비좁은 고시원에서 버텼던 경험. 그 곳을 탈출했을 때의 복잡한 심경. 보증금이 터무니없이 올라 쫓겨나듯 이사했던 일. 이사의 역사엔 이렇게 약간의 서러움을 동반했다.

서러움의 역사와 더불어 잦은 이사는 어떤 생활습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첫 번째, 살면서 짐을 안 만든다는 것. 나의 집은 썰렁하다. 만약 도둑이 든다면 화를 낼 정도. 만약 불이 난다면 지갑, 핸드폰, 차 키만 갖고 튀면 될 정도. 이렇게 단출하게 사는 건 언제 이사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짐은 옷, 책, 주방 용품처럼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늘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태원의 앤티크 숍을 지나다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협탁을 발견했다 쳐도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구매하지 않는다. 실용의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 뭔가를 샀다 치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헌 물건은 반드시 버리고. 이렇게 짐을 줄이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보니 어느 해에는 자동차로 두 번 왔다 갔다 하는 걸로 이사를 마친 적도 있다.

두 번째 집에 가전과 가구가 없다보면 웬만하면 아웃소싱에 의존하게 된다. 제대로 된 주방과 서재가 있을 리 만무하기에 밥은 밖에서 먹고 일은 카페에서 한다. 그래서 이사할 곳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게 주변에 괜찮은 밥집과 카페가 있느냐다.

누군가 그런다. 왜 그렇게 언제 떠날지 모르는 유목민처럼 사냐고. 집에 오면 따뜻하고 안락함을 느껴야지 왜 불편하게 사냐고. 돌이켜보면 나에게 집은 임시 거주지요, 그간의 삶은 모텔방 장기투숙자였는지 모른다. 언젠가 결혼을 하면, 언젠가 더 큰 집으로 가면, 혹은 내 집을 사게 되면, 이라는 가정법 아래 지금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미룬 건 아니었을까. 하여 작년 겨울엔 정착한다는 마음으로 제법 집 같은 구조를 갖춘 주택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뭔가를 들여놓지 않는 습관 탓인지 6개월이 넘도록 집 안은 텅 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내내 고민했던 왜 나는 임시의 삶을 사는가하는 질문. 어쩌면 나는 사는 것 자체가 임시라는 유목민적 세계관 탓이 아닐까. 게다가 서울에서 혼자, 수차례의 이사를 거듭하면서 임시의 삶에 익숙해졌고.

잡지에 실린 어느 가수의 인터뷰였다. 자기는 집에 가구 들여 놓는 걸 안 좋아 한다고. 텅 비었을 때의 여백을 좋아한다고. 어쩜 나와 이렇게 똑같을까,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노퍼니처주의라고. 멋있다 그 말.

이제 나를 당신들의 기준에서 이상하다 여기지 마십시오. 저는 단지 노퍼니처주의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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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 서울 김지현 저 | 네시간
방송작가 특유의 객관성 있는 담담한 어조로 ‘도시, 서울 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현장성 있게 그리고 있다. 마치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은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자신을 타인화하여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단조롭고 관조적인 감성도 매력적이다. 여행과 지리적 공간, 풍광이나 맛집 등을 찾아다니는 표피적인 도시 즐기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사소한 일상의 모습을 통해 서울의 지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노선을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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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현

1975년생, 14년차 방송작가, 2년 전세 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서울을 뜰 생각을 하지만 19년째 유예하고 있는 중견 서울생활자다. 요리와 정리정돈을 잘하고 맥주, 씨네큐브, 수영장, 효자동을 좋아한다. 게스트하우스, 똠얌꿍 식당, 독신자 맨션처럼 실천 가능성 없는 사업을 자주 구상하며 그나마 가장 오래 하고 있는 일이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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