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믄 인자 나를 따라오소.”
장인의 말은 정겨운 사투리가 실려있긴 했지만,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담고 있었다. 양조장으로 돌아오자마자 맛본 것은, 죽력고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술덧원재료가 되는 술인 청주와 소주였다. 백미를 20일간 발효시켜 만든다는 청주를 코끝에 가져갔을 땐, 이것이 곡주가 아니라 과실주가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놀랍도록 달콤한 향기가 마음까지 둥실 떠오르게 했다.
“효모가 편안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더우면 식혀주고 추우면 덮어주제. 6시간마다 한 번씩 정성들여 돌봐주면 효모들이 신나서 일을 헌당께. 그라믄 나가 넣지도 않은 과일향기가 나. 그것이 바로 효모의 땀냄새요.”
이토록 정성들여 만든 청주를 끓여 만든 소주는, 단언하건대 지금껏 마셔본 소주 중 가장 맛있었다! 수백 개의 수정구슬이 은쟁반 위에 떨어지는 것 같은 짜릿함과 청량함, 그리고 쌀이 얼마나 향기로운 곡식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화려한 향기는 지금껏 내가 소주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 자체를 바꿔놓았다.
“원래 그냥 먹기에도 아까운 술을 가지고 만들어야 제대로 된 죽력고가 나오요. 요것을 가지고 한 번 더 끓이믄서, 소줏고리 안에 죽력과 각종 약재가 든 바구니를 넣어 증류를 하믄 죽력고가 되는 것이제. 이런 제조방법을 가리켜 ‘재고내린다’라고 허요.”
죽력은 푸른 대(靑竹)의 줄기를 숯불이나 장작불에 쪼이면 흘러나오는 수액 같은 기름(膏)을 가리킨다. 죽력 이외에도 생강, 석창포, 계피, 솔잎과 죽엽 등의 재료가 사용된다고 하니, 단순한 술이라기보단 약에 더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조선 말기의 학자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오하기문梧下奇聞>을 보면, 일제 강점기에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된 녹두장군 전봉준이 모진 고문을 당해 몸져 누웠는데, 죽력고를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여 서울로 압송될 땐 수레에 꼿꼿이 앉아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린 아이들이 병에 걸려 죽도 못 먹는 상태가 되면, 영양을 공급해야 허는디 방법이 없잖여. 그랄 때 우리 옛 어른들이 쓰신 방법이 바로 ‘재고내리기’요. 약재를 담은 바구니를 시루에 넣고 찌면, 약성분 중에서도 아주 가벼워서 소화하기 편한 것들만 위로 올라오고 무거운 독은 아래로 떨어진단 말요. 위로 떠오른 것을 식혀 그 이슬을 모으면 몸이 아주 편허게 받아들이는 약이 되는 것이제.”
원래부터 약으로 쓰였다는 설명에, 지금의 죽력고 역시 밤샘 편집이라도 하고 나면 누구에게 두들겨맞은 것 같은 상태가 되는 나에게 특효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선생님께서 만드시는 죽력고도 약효가 있겠네요?”
“‘옛날의 죽력고는 분명히 약효가 있었고, 옛 방법 그대로 만드니 아마도 약효가 있지 않을까 싶다’까지만 말할라요. 안 그라믄 또 나가 이것을 약이라고 선전혔다고 관청에서 뭐라 할 것잉께.”
장인의 말에는, 죽력고 생산면허를 얻기까지 규제 일변도인 해당관청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거쳐야 했던 때의 분노가 묻어났다.
“처음엔 죽력이 약이라고 했다 혀서 안 된다 하고, 다음엔 용기 때문에 안 된다 하고, 그거 해결하니 전통방법과 다르다고 해서 안 된다 하고, 어떻게 하면 규제가 풀립니까 하니 당신이 만든 술을 설치류, 비설치류에 6개월간 반복 투여해서 DNA 변형이 없는 걸 증명해라…….”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제조면허를 받고 나서도 세상으로부터 전통주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는 일은 만만치가 않은 듯했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비싼 술을 만들 수가 없으요. 제조 원가와 노동력만 인정허지 기술력은 인정을 안 혀. 나가 이것을 한 병에 10만 원 받겠다고 하믄 원재료가 뭐냐, 재료값의 25%까지만 이윤을 붙일 수 있다, 허는디 어디 와인은 포도가 한 송이에 몇만 원씩 해서 그리 비싼감? 나의 술은 예술인데 그것을 원가를 가지고 평가한다면 누가 이것을 만들겄소. 그 시간에 논에 가서 일을 허제.”
눈을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장인의 솜씨에 비해 작업장은 너무나 허름했다. 관에서 보내준 듯한 ‘무형문화재의 집’이라고 써있는 현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만 이름나면 그 술을 만드는 양조장이나 증류소도 하나의 관광자원이 되는 외국의 현실과 비교하자니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평생을 바쳐 술을 만들고 있지만 자기 술의 가격 하나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전통주 관련 법규가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장인을 따라 양조장 한편으로 들어서니, 늘어선 스테인리스 용기 안에서 이곳에 오는 내내 갈구하던 향기가 풍겨 나온다.
“원래 여름엔 맛이 좀 덜해서 죽력고를 안 허는디, 마침 거르고 있는 것이 있으니 맛이나 보소.”
장인은 병에 담기 전 여과과정을 거치고 있는 죽력고를 허름한 붉은 플라스틱 바가지에(!) 담아 내밀었다. 바가지를 내미는 손은 그 술을 직접 빚어낸 손이다. 서울에서 마신 것과 그 맛이 절대 같을 수가 없다.
“예전에 마셔본 것보다 훨씬 맛이 좋은데요.”
“아마 고것이 바가지맛일 것이여, 허허. 사람의 정취를 느끼며 먹으니 당연한 것이오. 술을 만들 때도 나의 기원이 들어가야 비로소 살아있는 술이 되는 법이거든.”
입에 머금은 죽력고에선, 쌉싸름한 대나무의 향기가 느껴지는가 하면 서늘한 솔바람이 불어오고, 매운 계피향이 피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생강의 더운 기운이 올라왔다.
“소줏고리 안에서 술기운이 바구니를 통과하믄서 어떤 놈은 죽향을 가지고 올라오고, 어떤 놈은 솔향과 한몸이 되어서 나와. 이런 여러가지 기운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자유자재로 순서가 바뀌면서 입안에서 맴도는 것이 바로 죽력고의 매력이제.”
연거푸 바가지를 비워 불콰해지는 술기운에 기분좋게 몸을 맡기면서, 이 술을 마시는 사람들에게 장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아무쪼록 이것을 드시는 분들도 만드는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았으면 좋겄소. 감기약을 먹어보니 몸이 개운해지는 것 같다고, 사흘치를 한꺼번에 먹어불면 그 사람은 어찌되겄소? 마찬가지로 이 술은 드시고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해지시라고 만든 것인데, 그것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드시고 괴로워불면 내 마음이 어떻겄냔 말이오.”
마시는 사람이 끝까지 즐겁기를 바라는 장인의 마음 앞에서 그 동안 내가 저질렀던 만행들을 반성하는 가운데, 바가지에 담긴 술은 아쉽게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 스피릿 로드 탁재형 저 | 시공사
이 책은 해외 취재와 여행 중 탁재형 PD가 맛본 수많은 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을 선사했던 어떤 술의 맛과 향기, 그리고 술에 얽힌 때론 황당하고 때론 진중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술을 향한 그의 ‘진정성’까지 느껴질 정도다. 인기 팟캐스트인 ‘나는 딴따라다’와 ‘탁 피디의 여행수다’를 통해 솔직한 입담과 위트를 자랑했던 한 애주가가 풀어내는 술과 여행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