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소나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열정’이다. 그는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좌절할 때도 열정을 가진 남자였던 모양이다. 각각의 소나타 곡이 표현해내는 감정은 셀 수 없이 다채롭다. 한 사람이 이 모든 노래를 작곡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한 선율과 리듬으로 마음을 울적하게도 기쁘게도 한다. 그럼에도 동시에 모든 곡이, 열정을 지니고 있다.
라는 마 선배의 말에 “오, 이번에는 진짜 모르는 곡이에요.”라고 답했더니, 선배가 나를 뻥진 듯 바라본다. “그럴 리가?”라는 반문에 “전 초보자라고요.”라고 대답하고, 선배가 건네준 앨범 중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3번 「비창」을 재생시켜봤다.
“아, 이거.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치아키랑 노다메가 처음 만날 때 나오는 그 음악이구나?” 민망해서 한번 웃고 “아니, 영화 <클래식>에서 손예진이 쳤던 그 노래라고 했으면 알아들었을 텐데.”라고 덧붙였다가, 선배님의 호응이 별로 없어서 정색하고 이렇게 말해본다. “선배님, 전 말이죠. 이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일본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중, 「비창」을 연주하는 노다메의 피아노 소리에 이끌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면.
「비창」 피아노 소나타 2번은 피아노 교습용으로 많이 쓰인다. 얼핏 기억이 난다. 체르니 30번까지 (그저 선생님과 진도 수첩을 가지고 사투를 벌인 기억밖에 나지 않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배웠던 그때, 피아노 소곡집이라는 노란색 악보 책에 베토벤의 「비창」 그리고 「월광」이 실려 있었다. 「비창」 2악장은 느리고 음표도 몇 개 되지 않아서, 그다지 어렵지 않았지만 꽤나 심심한 곡이라고 생각했다.
<클래식>에서 손예진이나 <허공에의 질주>에서 천재 음악가를 연기한 리버 피닉스같이 비운의 주인공들이 분위기를 잡거나, 비극적인 운명의 전조를 깔 때나 어울리는 노래라고. 하지만 처음으로 「비창」 2악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게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저 장면 때문이었다.
저 배경. 그러니까, 이 음악에 노을빛이 참으로 어울린다고, 저물기 전에 마지막으로 붉은 태양 빛을 내뿜는 노을의 이미지와 이 곡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처음으로 이 노래가 참 아름답다고 느꼈다.
영화 ‘허공에서 질주’, 리버 피닉스도 「비창」 2악장을 연주한다
제목 ‘비창’은 깊은 슬픔, 연민을 뜻한다. 베토벤의 곡에 붙인 별명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또한 후세 사람들에 의해 붙여진 제목이니, 굳이 이 노래에서 슬픔을 찾으려고 할 필요는 없겠다. 그의 소나타는 대부분 3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형식이 흥미롭다.
브렌델이 연주하는 「비창」의 1악장은 고개를 떨구는 듯한 느낌으로 시작한다. 음표들이 무겁게 걸어 나오더니, 불안한 분위기 가운데서도 이내 활기차게 움직인다. 그리고 다시 무거운 (걸)음이 느릿느릿 등장하면서 분위기를 한껏 긴장시킨다. 다음에 이어지는「비창」의 2악장은 그래서 더없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1악장에서 느껴지는 감상은 슬픔보다는 절망적인 느낌에 가까운데 (아무래도 고개를 떨구며 시작하는 도입부 때문에) 누구나 우울의 바닥의 정점을 치고 나면, 내면에 잠잠한 고요가 잦아들기 마련이다. 2악장은 그때 잔잔한 마음의 풍경을 음악으로 그린 것 같이 들린다. 좋았던 때를 상상하거나, 아쉬웠던 순간을 반추하는 데에 잘 어울리는 음악이다.
과거의 아름다운 때를 보여주는 영화 <클래식>이나 이후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아름답고 포근한 풍경을 상상할 때 또 한 번 이 노래가 쓰이는데, 이 곡이 그런 애수의 감상을 품고 있기 때문일 거다. 2악장의 메인 테마는 ‘Midnight Blue’라는 팝송으로 편곡되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브렌델의 앨범을 들었을 땐, ‘아, 부드럽고, 포근하다. 좋다’ 정도였는데, 문득 생각나 옛날 <허공에의 질주>에서 리버 피닉스가 연주하는 장면을 다시 찾아봤다. 그는 음을 하나하나 정직하게 누르며, 담백하게 연주한다. 그리고 다시 브렌델이 연주한 「비창」을 들으니, 이건 그냥 부드러운 정도가 아니라, 풀밭이나 구름 위에 몸을 던진 듯이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라는 걸 알겠다.
게다가 「비창」의 3악장은 예전에 펌프를 뛰어댈 때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제목으로 편곡된 익숙한 곡! 앞으로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제8번 C단조’라고 말해도 알아들어야겠다.
‘Favourite Sonata’ 베토벤의 인기 있는 소나타곡 모음집
“우스갯소리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두고, 건반 음악계의 신약성서라고 불러. (구약성서는? 바흐의 평균율 클라이버곡집이고.) 피아니스트라면 꼭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작품이라 워낙 음반도 많고 명연도 많은데, 이 브렌델의 음반은 연주도 좋고, 선곡도 좋아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세계의 입문용으로 딱 추천할 만하지.”
예스24 리스너들이 가장 많이 선택한 이 앨범, 알프레드 브렌델의 피아노 유명 소나타는 원제가 ‘Favourite Sonata’다. 제목에 걸맞게, 베토벤의 소나타 중에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곡들을 모아둔 실속앨범이다. 베토벤의 유명 소나타라 함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곡들, 8번 「비창」, 14번 「월광」, 15번 「전원」, 17번 「템페스트」, 21번 「발트슈타인」, 23번 「열정」, 26번「고별」이다.
“뿔테 안경 쓴 모습이 왠지 대학교수님 같은 느낌이지? 알프레드 브렌델은 실제로 철학적이고 학구적인 예술가였어. 그만큼 작품 해석도 엄격하게 했고, 에세이나 시 등 글도 많이 써냈고. 그의 명연주로 꼽히는 것중에 베토벤 작품이 많아서 ‘베토벤 스페셜리스트’로 불렸어.”
“스페셜리스트요?”
“어떤 분야든 소위 ‘궁합’이란 게 있잖아. 연주자 중에서도 이 작곡가나 저 작곡가, 연주를 다 잘하는 사람이 있고, 특정 작곡가랑 궁합이 특별히 좋아서, 그 작곡가의 곡을 연주만 했다 하면 명연으로 꼽히는데, 다른 곡은 평타인 사람들도 있어.
예를 들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는 릴리 클라우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일단 재클린 뒤 프레의 연주를 듣고 본다는 식이지. 알프레드 브렌델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들도 호평을 받고 있는데, 슈베르트가 당시에 베토벤을 상당히 존경했다고 해. 뭔가 연관이 있는 걸까?(웃음)”
유명세로 「비창」과 앞뒤를 겨루는 곡 「월광」, 이 곡은 마 선배한테도 특별한 곡이다. 마 선배가 맨 처음 클래식에 꽂힌 게 바로 이 「월광」이었단 말씀! “처음으로 여러 연주자의 음반을 뒤지게 한 곡”이란다.
처음으로 여러 연주자의 음반을 뒤지게 한 곡,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c샵단조 「월광」
“비평가 렐슈타프(Ludwig Rellstab)가 「월광」1악장을 듣고, 스위스 루체른 호수에 비친 달빛이 마치 물결에 흔들리고 있는 조각배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해서 「월광」이라는 별명이 붙었어. 정말 공감 가는 제목이야.”
선배님처럼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를 직접 다녀와 봤다면 참 좋았겠지만, 나와 「월광」의 첫 만남은, 피아노만 겨우 들어갈 만한 좁은 연습실 안에서였다. 1악장이 시작되자마자 흥건하게 흘러나오는 이 곡 특유의 비장미와 서정적인 분위기는 초짜 피아노 연습생에게도 황홀경을 안겨주기 충분했다. 뭔가 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는 거다.
나는 이 곡을 연주할 때, 루마니아의 성에 외롭게 사는, 15세기부터 불면증에 시달려 얼굴이 허옇게 질린 드라큘라 백작에게 잘 어울리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나른함, 외로움을 넘어선 초연함이 어쩐지 깊은 밤 달빛에 비친 드라큘라의 쓸쓸한 옆선을 떠올리게 했다.
스트레스 해소? 격렬하고 빠른 「월광」 3악장 활용법
‘밀당’의 대가, 빌헬름 켐프가 연주하는 「월광」 3악장. 앙다문 입이 인상적이다.
2악장에서 곡은 다시 밝고 활기차지는데, 마치 호수 위에 반짝거리는 별빛, 가만히 퍼져 나가는 파장을 묘사한 것 같다. 소리의 강약에 귀 기울여 얼마나 섬세하게 크고 작은 파장을 묘사하고 있는지 들어보면, 곡이 훨씬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월광」의 백미는 3악장이다. 잔잔했던 호수는 갑작스럽게 휘몰아친다. 수억 개의 물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이 「월광」은 선배님이 함께 권해준 다른 연주자 에밀 길렐스와 빌헬름 켐프의 연주가 훨씬 강렬하다.
두 사람의 연주는 악장 옆에 ‘격렬하고 빠르게’(Presto agitato)라는 음악 기호에 누가 더 부합하느냐 겨루고 있는 것 같다. 에밀 길렐스는 피아노 건반을 산산이 부숴버릴 것만 같이 강렬하게 연주하는데 스타카토를 내리칠 때마다 마음속이 후련해지는 듯한 쾌감을 준다. 반면 빌헬름 켐프는 음악의 강약을 좀 더 섬세하게 표현한다. 선배 말로는 “밀당에 능하다”
어찌나 빠르게 연주하는지, 강물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이다. 거기다 더 강하게 솟구쳤다가 더 고요히 잦아들어 음악을 듣고 있자면, 거친 파도타기를 하는 기분이랄까. 맑디맑은 스위스 루체른 호수보다는 어둡고 음습한 루마니아의 껌껌한 바다 위에서.
(그러고 보니, 빌헬름 켐프의 이 앨범은 선배가 나에게 “스트레스 해소용 클래식 음악”으로 오래전에 권해준 적이 있다. 선배님 말로는 스트레스받을 때 「월광」 3악장과 「비창」 1악장을 교대로 들으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정서적 찜질을 받게 된다나.)
“서정적인 1악장을 지나 3악장에 다다르면 충격적일 정도로 강렬하잖아. 같은 곡인가 싶을 정도로 말야. 휘몰아치는 건반의 맛이 일품인 곡이지. 그래서 어려운 곡이기도 해. 베토벤 소나타에서 명반으로 치는 다른 음반들은 강인함이나 기교, 진지함을 강조해서 「월광」 1악장의 맛을 살리지 못하기도 하고, 반면 1악장을 너무 울적하게 연주하다가 3악장에 가서 몰아치는 매력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개인적으로 내 취향에 딱 맞았던 음악은 빌헬름 켐프의 연주였어. 심금은 심금대로 울리고, 몰아칠 땐 굉장하게 몰아치잖아? 이번에는 너만의 「월광」 소나타를 찾아봐.”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피아노 소나타 제23번 f단조 「열정」
23번 「열정」 소나타는, 제목만 보면 용광로에서 불꽃이라도 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다른 곡들보다 훨씬 웅장하고 진중하다. 그러니까, 깊다. 「월광」이 호수의 풍경, 호수 위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묘사했다면, 「열정」은 그 물속에 깊숙이 손을 집어넣은 듯하달까.
열정이라는 게, 표면적으로 빠릿빠릿 움직이고 흥분된 상태를 이르는 게 아니라, 마음속 깊숙이에 꺼지지 않을 강렬한 불씨 하나 키우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 곡도 역시 마음 구석구석 세세하게 짚어주는 많은 음표와 긴장감을 한껏 조였다 풀었다 하는 강약을 살린 연주로, 베토벤 특유의 극도의 섬세함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비창」이나 「월광」처럼 귀에 착 감기는 음악은 아니지만, 들을수록 내면에 침잠해가는 기분이다. 내면을 흩트려놓는 슬픔, 고통, 절망 등의 감정과 뜨겁게 직면하고 있는 곡이다.
“이 소나타는 베토벤 소나타 중에서도 난이도가 상(上)이야. 대중들이 연주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어. 베토벤도 29번 교향곡(「함머 클라이버」)을 쓰기 전까지, 스스로 이 곡을 최고의 걸작으로 꼽기도 했지. 연주하기 까다로운 곡이라 당시에는 아무도 손댈 수 없었는데, 피아니스트 리스트가 연주한 덕분에 많이 알려졌어. 곡의 생명을 연장한 셈이지.”
또 이런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베토벤이 서른 살쯤, 브룬스빅 백작의 집에 가서 그의 여동생 테레제에게 피아노를 가르쳤어. 베토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불멸의 연인> 있지? 그 연인을 테레제라고도 하는데, 그녀에게는 요제피네라는 언니가 있었어. 두 여자의 아름다움 사이에서 방황할 때 「열정」 소나타가 쓰였지. 2악장의 차분하고 명상적인 곡이 테레제의 아름다움을 그렸고, 1, 3악장의 격렬한 곡은 관능적인 요제피네의 매력, 두 사람 사이에 선 갈등과 방황을 표현한 거라고도 해.”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혈혈단신 DKNY(독거노인)로 평생을 사신 베토벤 할아버지였으니. 결과는 뻔하다. 둘 다 안됐다는 비극적인 결말. 신은 그에게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을 주시고, 여자는 허락지 아니하셨다. 가혹하다.
어렸을 적, 피아노 좀 쳤다고 자랑할 때, 오른손을 넘어가는 왼손의 현란한 퍼포먼스를 뽐내며 연주했던 그 곡 베토벤 소나타 24번 「엘리제를 위하여」가 바로 테레제를 위한 곡이라고 한다. 오래 짝사랑만 했던 베토벤, 이 사연을 듣고 나니, 심란하게 휘몰아치는「열정」의 3악장이 더욱 애잔하고, 절절하게 다가온다. 깊은 고통에서 빚어낸 음이라 이렇게 아름다운 건가요,라고 묻기도 미안하게 말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 가득했던 한 젊은이의 일기장
Emil Gilels가 연주하는 베토벤 소나타 23번 「열정」
살짝 슬퍼지려고 하려는 찰나, 21번 소나타 「발트슈타인」이 흘러나온다. 아름답다. 이 곡은 마음속에 잠잠하게 커지는 설렘을 그린 노래 같다. 이 곡을 들을 때면, 정말 꿈을 꾸는 것 마냥 행복한 감상에 젖는다. 발트슈타인 백작에게 헌정된 곡이라 그대로 이름이 붙었다.
「발트슈타인」 1악장은 한 음이 떨듯이 짧게 짧게 반복되는데, 찾아 이를 연주 용어로 트릴(trill)이라고 부른다. 건반 여러 개를 반복적으로 쳐대는 게 어려운 점이, 빠른 속도를 유지하기도 어렵고, 건반의 무게가 있어서 음이 똑 부러지게 떨어지는 게 아니라, 주욱주욱 늘어난다. 입시곡으로 많이 연주되기도 하니, 학생들의 연주를 찾아보면, 빌헬름 켐프의 연주가 얼마나 빠르고 깔끔한지 실감할 수 있다.
“이 앨범에는 꼭 들어봐야 할 곡 하나가 빠졌는데 바로 29번 「함머 클라이버」야. 베토벤 자신이 최고의 걸작으로 꼽기도 한 이 곡은, 피아노 소나타계의 교향곡이라고 할 만큼 스케일이 굉장한 곡이야. 앞으로 50년 동안,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큰소리쳤다는데, 20년 후에 리스트라는 피아니스트가 나타나 연주해버렸지.(웃음)
그만큼 기교면에서도 어렵고, 해석이 까다로운 곡이기도 해. 이렇게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총 32곡인데, 이렇게 부제가 붙은 유명 소나타들을 섭렵하고, 다른 소나타 곡도 하나씩 들어봐.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곡들이니까, 좋아하게 될 거야.”
베토벤 소나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열정’이다. 그는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좌절할 때도 열정을 가진 남자였던 모양이다. 각각의 소나타 곡이 표현해내는 감정은 셀 수 없이 다채롭다. 한 사람이 이 모든 노래를 작곡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한 선율과 리듬으로 마음을 울적하게도 기쁘게도 한다. 그럼에도 동시에 모든 곡이, 열정을 지니고 있다.
젊은 시절,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의 기록을 적은 베토벤의 비밀스러운 일기장을 엿보는 기분이랄까. 2악장에 담긴 잔잔한 명상곡을 빛내주듯, 1악장과 3악장에서 쏟아내는 격렬한 에너지는 베토벤 음악에 금세 빠져들게 한다. 바다에서 맞는 폭풍우 같은 거센 악장 때문에, 가운데 삽입된 2악장의 명상곡은 더없이 아늑하고 아름답다.
영화 <클래식>에 보면, 여주인공 손예진을 사랑하는 과거(조승우)와 현재(조인성)의 남자 둘이 그녀에게 마음을 담아 쪽지를 보내는데, 베토벤 소나타를 들으면서 그 글귀를 떠올렸다. “태양이 바다에 미광을 비추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희미한 달빛에 샘물 위에 떠있으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괴테의 문장이다. 이번 주 내내, 그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베토벤에게 이런 쪽지라도 받은 마냥 설레며 즐거워했다.
안타깝게도 현재 매우 구하기 힘든 프리드리히 굴다의 68-73년 전집 녹음이 바로 2위를 차지한 음반이다. 굴다의 베토벤 연주는 은근히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하지만 초기에는 고가에도 없어서 못구하는 귀한 존재였으며, 후에 이 엘로퀀스 시리즈로 전집이 재발매되면서, 가격면에서도 더이상 라이벌이 없어졌다. 어디서든지 눈에 띄인다면 망설이지말고 구매해서 들어봐야할 음반!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도전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그만큼 음반도 많고, 손꼽히는 명연도 많다. 그 중 월광소나타만큼은 켐프의 연주를 꼭 들어보라고 추천을 하고 싶은데, 달빛이 어른대는 것과 같은 1악장의 서정적인 느낌은 가히 일품이며, 같은 곡인가 싶을만큼 격렬하게 쏟아지는 3악장에도 빠지지 않는 매력적인 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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