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족 마을은 계곡을 가운데 끼고 산비탈을 따라 자리잡고 있었다. 촬영을 위한 교섭이 끝나고, 동행한 여성 리포터를 꺼족의 복장으로 갈아 입히고 나자 웬 청년 한 명이 나서서 등을 내민다.
“이 마을의 청년회장이야. 귀한 손님이 오면 업어서 촌장님 댁까지 안내하는 게 이들의 풍습이라는군.”
통역을 맡은 이정환 씨의 설명이 이어지자, 리포터는 주저주저하다가 결국 청년회장의 등에 업혔다. 향긋한 화장품 냄새를 풍기는 묘령의 외국인 처자를 등에 업자 기분이 좋았던 듯, 그는 연신 싱글대며 우리를 계곡 아래쪽에 위치한 집으로 안내했다.
꺼족은 태국 북부와 미얀마 북부, 라오스 북서부에 걸쳐 거주하는 민족으로 지역에 따라 ‘아카(Akha)’족으로도 불린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걸쳐 중국 남부에서 동남아시아 각 지역으로 이주해온 것으로 추측될 뿐, 정확한 역사는 베일에 싸여있다. 하루 이틀 촬영을 진행하다 보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의 전통의상이었다. 만일 세계 여성 전통의상 경연대회라는 게 있다면 꺼족 의상은 깜찍 발랄 부문의 유력한 우승후보가 아닐까 싶다. 먼저, 치마 길이가 미니스커트를 방불케 한다! 무릎 위로 깡충 올라간 치마 아래로는, 형형색색의 천을 이어 붙인 각반이 마치 말괄량이 삐삐의 스타킹마냥 귀여움을 더한다. 그리고 심플한 저고리 안에 받쳐입는 것은 어깨끈이 하나밖에 없는 튜브탑. 더운 날씨를 이겨내는 데도 한몫 하거니와, 어디서든 아기에게 쉽게 수유할 수 있는 기능적인 이점까지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할까. 그런데 유심히 관찰하니 어떤 소녀는 치마 앞에 댕기 비슷한 것을 늘어뜨렸는데 어떤 소녀는 그것이 없다. 그리고 그 댕기의 유무에 따라 머리장식도 미세하게 다르다. 이정환 씨에게 물었다.
“형님, 저 댕기는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저거…… 나도 아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참, 그게…….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응, 저게 사실은 소녀와 처녀를 구분하는 표식이라고나 할까. 성년식을 마친 여자들만 치마에 저 댕기를 달 수 있대.”
“아니 그게 뭐라고 그렇게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세요.”
“근데 그 성인식이라는 게 말야…….”
돌아온 대답을 듣곤 나도 한동안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꺼족 여성은 14살이 되면 모두 성인식을 거쳐야 하는데, 그 성인식이라는 게 바로 마을의 청년회장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리포터에게 등을 빌려준 그 친구가 바로 이 마을 처자들의 초야(初夜)를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어찌 보면 무지막지한 권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아직 여성으로서 성숙하지 않은 소녀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친밀감도 무엇도 없는 남자와 한 방에 들 때 느껴야 했을 수치심과 공포감을 생각하자니, 갑자기 이 마을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꺼족에 대한 나의 인상은 그것으로 결정되어버린 걸까. 이후로는 꺼족의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곱게 보이지 않았다. 촬영을 도와주기로 한 부부가 한참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아 알아보니, 방 가운데의 구멍을 동시에 넘어가다가 서로 마주치는 바람에(꺼족의 가옥은 남편의 공간과 아내의 공간이 가운데 얕은 벽을 사이에 두고 격리되어 있다. 부부 중 한쪽이 욕구를 느끼면 벽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과해 상대방에게 간다.) 부정을 탔다 하여 바깥출입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었다던가, 새사냥 하는 장면을 연출하려고 어렵게 사로잡은 새를(?!) 한눈 파는 사이 먹어 치운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다음날 있을 촬영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러 촌장의 집에 가보면, 늘 이런 식이다.
“그럼 약속하신 겁니다. 마을사람 20명 모두 전통의상을 입고 나오시는 거예요.”
“하하하하, 이 친구. 하하하, 마음에 들어. 20명? 아냐, 30명은 있어야지!”
“그렇게 된다면 저야 좋지만……, 마을 일이 바쁘시지 않겠어요?”
“무슨 소리야, 흐흐흐. 우리 마을이 멋지게 나와야 하지 않겠어? 하하하하, 콜록! 콜록!”
“그럼 촌장님만 믿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말이 달라진다.
“아니, 어젯밤에 약속하셨잖아요. 마을사람 20명이 전통의상을 입고 도와주신다고.”
“안 된대도. 오늘은 중국에서 사탕수수를 실어갈 차가 오는 날이야. 바빠서 안 돼.”
문제는 대마초였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별다른 소일거리가 없는 이들은 촌장의 집에 모여서 앞사람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때까지 대마초를 피워댔고, 당연히 기분은 최고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부탁을 하든 오케이인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아침이 되어 약기운에서 깨어나면 두통부터 몰려드는 모양인지, 내 말을 들으려 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는 사이, 촬영은 점점 고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 말수가 점점 줄고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셨는지, 이정환 씨가 촬영을 마친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향긋한 냄새가 감도는 그곳은 다음날 있을 풍년 기원제에 대비해 한창 술을 만들고 있는 집 안뜰이었다.
“탁 피디, 술 좋아한다고 했지? 이 증류기를 보니 어떤 생각이 들어?”
불 위에서 연신 향긋한 수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라오스식 증류기는 내가 그 동안 보아온 어느 증류기보다도 아담하고 단출하면서도, 기능적으로 훌륭해 보였다. 집 한 칸을 가득 채우는 서양식 팟스틸이나, 곡선이 아름답지만 옹기로 되어있어 무겁고 휴대가 불편한 우리의 소줏고리와는 달리, 그들의 것은 나무로 만들어지고 각 부분의 해체가 용이해 기동성 면에선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플하면서도 합리적이네요.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을 것 같고…….”
“그렇지. 사실 이 사람들이 화전민이잖아. 이들이 덩치 큰 증류기를 만들 줄 몰라서 못 만드는 건 아닐 거야. 다만 이곳의 지력이 다하면 또 다른 곳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니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증류기를 만들게 된 거겠지.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의 관습과 전통이 지금은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그것이 처음 생겨났을 땐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어떤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 이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때, 탁 피디의 마음도 편해지고 좀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
찹쌀을 발효시킨 후 산에서 캐낸 갖은 약초를 더해 증류한 그 술의 이름은 ‘라오라오’였다. 쌀로 만든 술 특유의 화려한 향기와 미세한 단맛 그리고 증류주의 불맛이 더해진 술잔을 천천히 들이켜자니, 왜 나는 술맛을 음미할 때처럼 이 사람들에 대해 시간을 두고 다가가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섣부른 판단 따윈 유보하고, 천천히 입술과 목울대를 적시고 위장과 코 안을 그 술의 진짜 향기가 가득 찰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왜 그렇게 다가가지 못했을까하는 생각.
다음날, 다시 씨를 뿌릴 수 있게 된 것을 하늘에 감사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문피 싸카오’ 축제의 막이 올랐다. 남자들은 돼지를 잡느라 부산을 떨고, 여자들은 큰 대나무줄기를 땅에 찧으며 ‘탕방’이라는 춤을 추었다. 문명의 선입견을 한 꺼풀 걷어낸 내 눈으로 비로소 그들의 미소가 온전히 들어와 자리잡았다. 오늘 이 축제가 끝나기 전에 그 청년회장이란 친구와 한 잔의 라오라오를 나누리라, 그리고 그 억세게 운 좋은(?) 청년은 그런 관습이 마냥 좋기만 한지 마음을 터놓고 물어보리라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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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피릿 로드 탁재형 저 | 시공사
이 책은 해외 취재와 여행 중 탁재형 PD가 맛본 수많은 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을 선사했던 어떤 술의 맛과 향기, 그리고 술에 얽힌 때론 황당하고 때론 진중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술을 향한 그의 ‘진정성’까지 느껴질 정도다. 인기 팟캐스트인 ‘나는 딴따라다’와 ‘탁 피디의 여행수다’를 통해 솔직한 입담과 위트를 자랑했던 한 애주가가 풀어내는 술과 여행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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