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60년대 중반, (어울리지 않게도) 유럽에서 제작한 서부영화 3부작에 출연하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영화제작자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실상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40년 동안 영화계의 스타 혹은 우상으로 지낸 그는 거의 자신이 제작하거나 공동 제작한 영화에만 모습을 드러냈고, 직접 감독을 겸한 경우도 잦았다. 주연과 감독을 함께 맡은 작품은 23편인데, 우디 앨런을 제외하면 오늘날 그 어떤 감독 겸 배우도 그토록 많은 영화에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해낸 사람은 없다. 또한 그는 현역 감독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2011년 작 <J. 에드가>는 1971년 이후 33번째 연출작이다. 그동안 고전적이면서도 대담한 개성을 드러내는 이스트우드의 연출 방식은 폭넓게 인정받았다. 할리우드 안에 머물면서도 영화제작의 문화적ㆍ미학적 유행을 거부함으로써 외부자의 시선을 유지해온 것도 사실이다. “저는 저의 직감을 믿고, 제가 믿는 바를 영화로 만듭니다.”
제작자이자 감독으로서 이스트우드는 드물게도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스타로서의 지위와 큰돈 들이지 않고 효율적으로 제작을 한다는 오랜 명성은 스튜디오에서 그의 작품을 배급하는 보증이 되었고, 재정적인 위험이 없었기 때문에 감독으로서 제작 전반에 관한 권한을 전적으로 위임받을 수 있었다. 워너브러더스사의 전 사장 프랭크 웰스는 1993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단 계약을 하고 나면 사전 시사를 할 때까지 그를 볼 수가 없습니다. 낮은 예산 영화에서는 항상 그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뒀죠.” 영화 인생 50년에 접어들어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스트우드는, 여러 인터뷰에서 반복해 이야기하듯 오직 한 가지 기준에 따라 자신의 작품을 선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는 그 자신이 영화에서 보고 싶어 하는 무엇이다.
1954년 유니버설사의 연기자 발굴 프로그램에서 선발된 그는 스물네 살의 촉망받는 배우였는데, 얼마간 영화의 단역으로 출발해서 처음 성공을 거둔 것은 4년 후 텔레비전 시리즈에서였다. 서부극 시리즈 <로하이드>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을 맡은 것이다. 장수를 누렸던 프로그램 덕분에 그는 유명세를 얻은 것은 물론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방법과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돈으로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다. 몇몇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감독으로서의 야망은 <로하이드>의 촬영장에서 수도 없이 말을 타고 달릴 때 처음 생겨났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프로그램의 연출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1964년 <로하이드>를 찍던 그에게 진짜 대약진의 기회가 찾아왔다. 무명의 감독 세르조 레오네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요짐보>를 각색해 로마와 스페인에서 촬영할 저예산 서부영화에 출연할 그럴듯한 카우보이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네 감독이 만났던 몇몇 배우들은 모두 변변찮은 출연료 때문에 거절했지만 그중 한 명이 <로하이드>에 나오는, 장화가 잘 어울리는 젊고 깔끔한 배우를 추천했고, 이스트우드는 낯선 그 기회를 잡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그해 말 개봉한 <황야의 무법자>는 유럽 전역에 걸쳐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했다.
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1964)
<황야의 무법자>와 이어진 두 편의 연작 <석양의 건맨>과
<석양의 무법자>에서 그가 연기한, 말수가 없고 신비감에 싸여 있으며 믿을 수 없는 총 다루기 솜씨를 지닌 악당의 외모와 성격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스트우드와 레오네 감독의 설명이 다르다. 이스트우드가 레오네 감독의 반대를 물리치고 대본에 있던 인물 설명을 과감하게 생략해버렸다는 것은 명백해 보이며, 덕분에 영화 속 총잡이의 성격에 관한 배경도 드러나지 않고 그의 행동도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이후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속 인물들 대부분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이스트우드는 팀 케이힐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오네 감독에게 계속 말했죠. ‘진짜 A급 영화에서는 관객들이 영화를 따라오며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모든 걸 다 설명해주는 건 B급 영화예요’라고요.”
스타 배우의 제안을 레오네가 열린 자세로 받아주었다는 것은 이스트우드가 영화제작 과정에 제대로 참여하는 경험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는 의미다. 비록 이스트우드 본인은 스튜어트 카민스키와의 인터뷰에서 ‘감독들은 내가 자신들과 함께하는 영화의 스타일에 관해 내 생각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불평했지만 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영화들을 통해 이스트우드가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고 그에 걸맞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1967년 초
<황야의 무법자>가 미국에서도 개봉했고, 연작 두 편도 다음 해에 개봉했다. 영화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놀랍게도 이스트우드는 유니버설이 제작하는 새로운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자신의 요구 조건을 계약서에 추가할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새로운 영화(<집행자>라는 제목의, 적당한 규모에 주제도 도전적인 작품이었다)를 제안하며, 자신이 정한 감독(테드 포스트)과 작업하기를 원했고, 촬영 기간 내내 포스트 감독과 대본을 수정해갔다. 이스트우드는 그런 식으로 사실상의 제작자 역할을 계속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제작사를 만들고 ‘말파소’라고 이름 지었다. 현재 말파소는 배급사와 거래를 할 때 편리하게 활용하는 법인 성격이 강하지만, 1970년까지는 독립된 영화제작사로 이스트우드 본인이 감독을 맡든 맡지 않든 프로젝트 전체를 궁극적으로 총괄할 수 있게 하는 장치 역할을 했다.
관록 있는 액션 영화 감독 돈 시겔과의 만남은 이스트우드의 경력에 이정표가 되었다. 두 사람은 영화제작에 관한 서로의 생각이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스트우드는 패트릭 맥길리건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더더기가 없는 감독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현장에서는 찍으려고 생각했던 걸 곧장 찍어내는데, 다른 사람들처럼 몸을 사리지 않아요.” 시겔이 영화를 만드는 방식은 사실 이스트우드 본인의 연출 방식, 비슷한 말로 표현하자면 자신이 원하는 걸 알고, 빨리 찍고, 원하는 걸 얻은 다음 곧장 다음으로 넘어가는 그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거기에다가 시겔은 스타 배우의 제안에 열려 있었는데, 감독 본인은 그 점에 대해서 스튜어트 카민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클린트가 영화제작에 관해 꽤 박식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죠……. 그래서 언제부턴가 카메라 세팅에 대해 아이디어를 내놓기 시작했고…… 제가 그것들을 다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는 되었습니다.” 이스트우드도 이렇게 확인해주었다.
“돈은 말하자면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당시 그가 참여했던 다른 세 편의 영화
<독수리 요새> <페인트 유어 웨건>
<켈리의 영웅들>의 제작 과정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촬영 때 시간과 자원, 돈이 낭비되는 데 화가 났고, 최종 결과물에 자신이 맡은 역할 이상의 기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덕분에 그는 말파소를 통해 자신의 경력을 좀 더 채워나가야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고, 이후로는 사실상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의 제작자로 활동하게 된다.
더티 해리(Dirty Harry, 1971)
이스트우드는 시겔을 설득해 그들의 네 번째 영화를 만들었고, 이는 그의 경력에 또 다른 이정표가 되었다.
<더티 해리>는 정치적으로 양극화되어 있던 시기에 미란다원칙과 에스코베도(Escobedo) 원칙을 보란 듯이 무시하며 피의자를 거칠게 다루고, 관료주의적인 구속을 경멸하고,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법을 어기는 것도 개의치 않는 주인공 형사를 동정적인 시선으로 그림으로써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캘러헌 경사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관객들은 그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는 이스트우드가 그때까지 출연한 작품들 중에 가장 많은 수익을 남기고 네 편의 연작까지 낳았으며, 그 결과 이제 그의 미래는 두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연기자로서 그는 국제적으로 관객 동원 능력이 있는 슈퍼스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영향력 있는 비평가와 문화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향후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비호감인 인물로 여겨졌다.
<더티 해리>는 이스트우드가 워너브러더스와 처음으로 함께한 작품이었고, 이후 배급사와 제작자이자 감독이자 스타였던 이스트우드(그는 영화의 기획부터 제작, 홍보까지 거의 전적인 자유를 누렸다) 양쪽은 거의 독점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상호 이득을 누렸다.(이스트우드의 영화는 대부분 이득을 남겼고, 몇몇 작품은 아주 크게 흥행했다.) 워너브러더스는 이스트우드가 정상급 미디어에 노출될 수 있게 도와주었고, 국제적인 홍보 행사나 영화제 출품 등을 적극적으로 주선함으로써 명망 있는 영화제작자가 되고 싶었던 그의 야심을 지원했다. 그 대가로 이스트우드는 말파소에서 제작한 영화들을 배급할 수 있는 사실상의 독점적 권리를 워너브러더스에 주었다. 많은 사람들은 말파소의 제작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말한다.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적은 ‘개인적’이고 작은 영화를 만들 때마다 이스트우드 본인은 좀 더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의 감독을 맡거나 출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선택이 ‘의식적’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특정 영화의 관객이 얼마나 될지 단 한 번도 예상해본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1992년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를 계속 고려하다 보면 영화가 가야만 하는 방향을 생각할 수 없게 되죠.” ‘상업적’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에도 그만의 개인적인 관심사와 형식적 특징들을 가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970년 이스트우드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직접 연출하며 제작 과정 전반을 통제하는 확고한 단계로 올라선다. 감독조합의 추천자로는 시겔이 서명을 해주었다. 이스트우드는 이제 자신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감독들, 이를테면 오랜 기간 말파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제임스 파고나 버디 반 혼 같은 감독들과의 작업은 내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다른 사람의 지도를 전혀 받지 않으려 했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이후로 이스트우드는 70년대에 다른 감독이 연출한 작품 일곱 편에 출연했지만, 그 이후에는 네 편에 불과하며, 마지막 작품은 1993년작
<사선에서>다.(2013년 현재 마지막 작품은
<내 인생의 마지막 변화구>다.)
말파소는 계속해서 이스트우드가 늘 선호하던 작고 단정한 회사로, 합리적인 제작비로 효율적으로 제작되는 극영화를 만들기에 최적화된 회사로 유지되었다. 회사 자체가 작았기 때문에 전체 제작 과정이한 사람의 통제 아래 놓일 수 있었는데, 그 한 사람은 당연히 이스트우드였다.
1975년
<무법자 조시 웨일즈>를 찍을 때 이스트우드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필립 카우프만을 해고하고 자신이 직접 감독을 맡았다. 이 사건에 대해 이스트우드는 데이비드 톰슨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의 해석대로 흘러가게 내버려둘 수 없었고, 카우프만은 또 제 방식대로 가는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감독조합에서는 새로운 조항(이른바 ‘이스트우드 조항’)을 만들어 어떤 식으로든 같은 영화에 참여한 다른 스태프가 조합 소속 감독을 대체할 수 없게 했다.
1983년, 바로 그 조항 때문에 이스트우드는 공식적으로는 리처드 터글 감독을 해고할 수 없었다. 역시 시나리오 작가였던 터글 감독은 촬영 첫날 세트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고 영화 촬영에 필요한 기술적인 지식도 충분하지 못했다. 늘 집중력을 발휘해서 효율적으로 일하는 이스트우드로서는 둘 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결함이었다. 하지만 터글은 크레디트에도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고 이스트우드 역시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거부한 적이 없다.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프로젝트에서 최종적인 통제권을 가지고 싶어 했지만, 그와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모습은 협업 정신 안에서 그런 통제력을 발휘하는 마음 좋은 대장의 모습이다. 이스트우드는 스스로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방향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동업자들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바라는 결과를 얻어냈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항상 넘치도록 많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스태프의 창의적인 제안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은 배우나 스태프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인데, 몇몇 배우들은 차분하고 부담감이 없는 이스트우드의 촬영장 분위기를 칭찬했고, 많은 스태프가 몇 년 혹은 몇십 년 동안 계속 함께 일하기도 했다. 이스트우드는 ‘영화 작가(auteur)’라는 말을 싫어하는데, 자신은 전체로서의 집단의 일부이며 다만 ‘선봉장’ 혹은 ‘소대장’ 정도의 역할을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자주 말했다. 오늘날 할리우드의 감독들은 대부분 ‘자신의 작품임을 밝히는 크레디트’, 그러니까 히치콕 정도 되는 거장에게나 어울리는 “○○ 감독 작품” 혹은 “○○ 감독 연출” 같은 자막을 원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들 중 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작품은 단 한 편도 없다. 대신 ‘말파소 영화사 영화’ 혹은 ‘말파소 영화사’처럼 제작사의 이름만 등장한다.
오랫동안 스타로서의 이스트우드의 인기가 종종 감독 이스트우드의 업적을 가리곤 했다. 주로 그가 맡은 영화 속 인물들에 관한 인터뷰에 집중하는 대중매체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진지한 평론가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스트우드를
<더티 해리> 시리즈를 공동 제작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무시해버렸다. 1970년대 후반, 감독으로서 여섯 편의 영화를 연출한 시점에 이스트우드는 영화제작자로서의 자신의 이름값을 높여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했고, 영화 잡지나 업계 소식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그런 인터뷰에서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작품에서 간과되는 요소들, 예를 들면 강한 여성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 자신이 맡은 인물들이 마초 이미지만 너무 강조된 면이 없지 않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그런 이스트우드의 주장은 80년대 초반,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비평가들의 글에 반영되었다.
브론코 빌리(Bronco Billy, 1980)
1980년 이스트우드는 프랑스 도빌에서 열린 미국영화제에 <브론코 빌리>를 출품했는데, 이는 유럽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참가한 것으로는 최초였다. 그때부터 정기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제작할 때면 그는 홍보를 목적으로 유럽 순회에 나섰다. 종종 유럽 비평가들은 장르의 경계를 허물며 대중 영화에 개인적인 미학을 담아내는 이스트우드라는 제작자의 예술적 장점들을 미국 비평가들보다 빨리 알아보았다. 이스트우드는 그런 유럽 평론가들의 호평에 대해 고마워했는데, 1992년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저의 첫 연출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 대해서도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많은 용기를 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저를 배우로 인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고, 감독으로 인정하는 데에도 똑같이 시간이 걸렸죠.”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1999년 이후 12년 동안 이스트우드는 열한 편의 작품을 연출했는데, 그 영화들로 일곱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비평가나 영화계에서 주는 다른 상도 열 개 이상 수상했다. 이스트우드는 개인적으로 두 개의 아카데미 감독상과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생존하는 최고의 영화감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본 인터뷰 모음집은 40년이 넘는 그의 영화 경력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인터뷰들을 관통하는, 이스트우드가 영화를 만드는 철학을 개략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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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중요성 : “무엇보다도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이 묶여 있는, 말하자면 ‘뿌리’니까요. 그런 다음엔 이야기에 맞는 이미지를 고민하고, 어떤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면 좋을지, 어떤 감정과 울림으로 전달할지 살핍니다.”(주스ㆍ느베르와의 인터뷰, 1992)
저절로 나오는 것 : “가끔은 완벽하지 않은 모습이 현실적일 때가 있죠. (…) 그래서 모두들 조용히 리허설을 해보자고 하고 카메라를 돌릴 때도 있습니다. 모두들 카메라 앞에서 무엇을 하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직접 그 무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촬영에서 근사한 장면을 잡아내기도 합니다. 배우들이 정말로 그걸 하고 있으니까요.”(헨토프와의 인터뷰, 1989)
관객의 역할 : “관객은 모든 장면에, 영화의 모든 부분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이야기를 따라오려면 꼭 알아야 할 것 같은 것들만 제공하죠. 너무 많이 풀어놓는 건 그들의 지성을 무시하는 겁니다. 어느 정도는 관객들의 상상력에 맡겨요.”(톰슨ㆍ헌터와의 인터뷰, 1976~1977)
모호함 : “아주 작은 부분까지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으면 관객들이 자리를 뜰 거라고 믿는 경향이 영화계에 있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두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런 면에 좀 집착하는 편이죠. (…)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의 모호함을 피할 수 있다면 가끔씩 어떤 것은 말하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사람의 머릿속에 훨씬 더 그럴듯하게 남을 때도 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려줘서 다른 상황을 바라고 있던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때도 있죠.”(토빈과의 인터뷰, 2005)
조명 : “제게 영화의 빛과 어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 빛의 양은 극의 흐름에 따라 조절하죠.”(토빈과의 인터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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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우드는 50년 넘게 대중 앞에 섰고, 그를 다룬 자료의 양은 압도적으로 많다. 수십 편의 인터뷰 중 이 책에 실을 것들을 선정하는 작업은 어려웠다. 이 인터뷰집에는 어쩔 수 없이 몇몇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온다. 연출에 대한 이스트우드의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도 거의 바뀌지 않았고, 그래서 특정 영화 이야기나 영화제작의 특별한 과정에 관해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로버트 E. 카프시스
캐시 코블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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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린트 이스트우드 클린트 이스트우드 저/로버트 E. 카프시스,캐시 코블렌츠 공편/김현우 역 | 마음산책
이 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첫 연출작을 내놓은 1971년부터 최근 연출작 〈J. 에드가〉를 내놓은 2011년까지 40년에 걸친 그의 영화 인생과 철학을 엿볼 수 있는 24편의 인터뷰를 엮었다. 〈포지티프〉 〈스테디캠〉 〈사이트 앤 사운드〉 〈필름 코멘트〉 〈롤링 스톤〉 등 미국과 유럽의 유수 영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황야의 무법자’나 ‘더티 해리 캘러헌’처럼 말이 없던 영화 속 모습과는 달리, 연출작 곳곳에 담긴 의미와 제작 과정은 물론, 출연한 영화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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