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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 열살 소년이 50도짜리 술을 들고… - 루마니아 ‘빨링꺼’

첫사랑 같이 아련한 스피릿의 이데아 느릿느릿, 손에서 코로, 다시 입으로 그리고 번개처럼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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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링꺼를 접한 첫 느낌은 ‘한 대 맞은 것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식도를 태우는 것으로는 부족한, 송두리째 둘둘 말아버리는 것 같은 고통. 비록 찰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삽시간에 그 괴로움을 지우며 올라오는 것은 머리를 풀어헤친 발레리나의 광기 어린 춤 같은, 강렬하고 발랄한 과일향기. 0.5초 안에 극한의 자학과 보상을 오간 이 순간의 체험을 표현하기엔 아직 글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다음날 아침,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라무레슈의 서르비 마을로 향했다. 잔칫집에 들어선 순간,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100명 남짓 되어 보이는 하객들은 모두 손에 술병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심지어는 열 살밖에 되지 않아 보이는 꼬맹이 녀석도 의젓하게 술병 하나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녀석들은 손님에게 술을 나눠주는 역할만 하고 마시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스스로 도를 깨치는 맹랑한 녀석이 나오지 않으리란 법이 있으랴. 다만 그 맛은 너무 어린 녀석이 맛보기엔 소스라치게 놀랄 만한 것이니, 음주를 하고자 하는 맹랑한 녀석들의 욕구를 자연스럽게 제어하는 효과가 있을 터였다(아님 말고).

이들이 손에 들고 있는 술은 ‘쭈이꺼’라고 하는데, 빨링꺼와 마찬가지로 과실로 만든 증류주다. 다만 빨링꺼는 두 번을 증류해 알코올 도수가 60~80도로 높은 반면, 쭈이꺼는 30~50도로 그보다는 낮은 편이다. 아침부터 술자리를 시작해야 하니 속 편하게 약한(?) 술부터 시작하라는 세심함이 느껴진다. 만일 잔칫상에 술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신랑 측에 큰 수치가 되는 것이라 하니, 술궤짝이 통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일찍부터 불콰하게 취한 마을사람들은 신랑, 신부와 함께 교회로 행진을 시작하는데, 짓궂은 하객 몇몇이 행진 도중 바닥에 퍼질러 앉아 노래를 부르며 어서 식을 끝내고 싶은 신랑 신부의 애를 태우는 모습이 눈에 띈다. 웃음기 가득한 마을사람들과 난처함으로 얼굴이 붉어진 신랑 신부의 모습에, 함 들어가는 날의 우리네 풍경이 오버랩된다.

정교회 의식으로 결혼식이 끝나면, 하객들은 마을회관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잔치를 시작한다. 빨링꺼가 가득 찬 법랑주전자들이 잔칫상을 점령하는 순간이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플로어에선 동유럽 특유의 빠른 선율에 맞춰 춤추는 남녀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고, 빨링꺼를 들이켜는 사람들의 머릿속도 그와 비슷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다.

“오늘은 테이블 아래에서 뻗어 잘 겁니다!”
한 청년이 외친다.
“내일 아침에는 모두 멀쩡하게 집에 갈 거예요!”

‘아침을 배반하지 않는 술’. 마라무레슈에서 빨링꺼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그만큼 숙취가 없다는 이야기다.


빨링꺼는 제철과일을 발효시킨 뒤 증류해 만드는데, 계절별로 사과, 배, 자두 등이 쓰인다. 두세 달 발효시킨 과일을 건더기째 단식증류기에 채우고 두 시간 동안 끓이면 묽은 우유처럼 뿌연 술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쭈이꺼다. 아침에 마시기 적당한(?) 30~50도의 알코올 도수다. 하지만 로마제국을 끝까지 괴롭혔던 화끈한 다치아(Dacia)족의 후예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쭈이꺼를 따로 모아 다른 증류기에서 한 번 더 끓이면 그제야 비로소 빨링꺼가 만들어진다.

증류소 주인 할머니가 빨링꺼를 조금 받아서 가열된 증류기에 뿌려본다. 화아악! 파란 불꽃이 마법처럼 피어오른다. 그 어떤 계측기도 흉내낼 수 없는, 완성된 술의 등장을 알리는 퍼포먼스다.

“됐어. 제대로 된 거야.”

할머니의 얼굴에 주름 가득한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잔에 남은 술을 권한다. 느릿느릿, 손에서 코로, 다시 입으로. 그리고 번개처럼 목구멍에서 위장으로.

“……”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희미한 귀울음만 들려올 뿐.
빨링꺼를 접한 첫 느낌은 ‘한 대 맞은 것 같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식도를 태우는 것으로는 부족한, 송두리째 둘둘 말아버리는 것 같은 고통. 비록 찰나이긴 하지만 그것은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삽시간에 그 괴로움을 지우며 올라오는 것은 머리를 풀어헤친 발레리나의 광기 어린 춤 같은, 강렬하고 발랄한 과일향기. 0.5초 안에 극한의 자학과 보상을 오간 이 순간의 체험을 표현하기엔 아직 글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5리터만 구입하고 싶습니다.”

식도의 울림이 잦아든 뒤 간신히 내뱉은 문장이었다.
첫사랑의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 가슴 속에, 머릿속에 남아 어쩔 수 없이 다음 연애 상대를 규정하고 비교하는 대상이 된다. 눈가에 핑 도는 눈물과 함께, 나는 나의 첫사랑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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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릿 로드 탁재형 저 | 시공사
이 책은 해외 취재와 여행 중 탁재형 PD가 맛본 수많은 술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강렬함을 선사했던 어떤 술의 맛과 향기, 그리고 술에 얽힌 때론 황당하고 때론 진중한 에피소드들을 읽다 보면, 술을 향한 그의 ‘진정성’까지 느껴질 정도다. 인기 팟캐스트인 ‘나는 딴따라다’와 ‘탁 피디의 여행수다’를 통해 솔직한 입담과 위트를 자랑했던 한 애주가가 풀어내는 술과 여행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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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탁재형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정훈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더 이상 어디 틀어박혀 공부하는 게 신물이 나 외주제작사에 들어갔다가, 호랑이 같은 감독님을 만나 박박 기면서 방송을 배웠 다. 때려치울까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술힘으로 버텼다는 소문이 있다.
2002년 <KBS 월드넷>을 시작으로 <도전! 지구탐험대>, <SBS 모닝와이드>, <KBS 영상앨범 산>, <세계테마기행>, <EBS 다큐프라임 - 안데스> 등 해외 관련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했다. 현재는 해외콘텐츠 전문 프로덕션 ‘김진혁공작소’에서 다큐멘터리 PD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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