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 청나라의 볼모가 되다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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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5년(1637) 1월 30일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受降檀에서 단상에 앉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인조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 남한산성에서 농성한 지 45일 만의 일이었고 군량미가 이제 막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였다.
이제 속국이 된 조선에 청나라는 두 번 다시 조선이 배신하지 못하도록 보다 확실한 안전 방편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즉 세자를 비롯한 왕자는 물론 대신의 자식들도 볼모로 삼아 청나라로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척화파의 반발은 격렬했으나 거절할 재간이 있을 리 없었고 결국 소현세자가 자청하는 형식을 빌려 청의 요구를 수락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소현세자를 볼모로 떠나보내게 된 인조는 “매사에 힘써 행하되 격노하지 말고 또 처신을 가벼이 하지 말라”는 당부를 건네며 눈물로 세자를 전송했다. 소현세자는 당장의 곤경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을 뿐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깊게 고민할 분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분별력 결여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는 가혹할 정도로 참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알 리가 없는 소현세자는 전송자의 눈물을 뒤로 하고 청나라로의 길을 떠났다. 이때 그의 나이 스물여섯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8년 전의 일이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
소현세자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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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로 떠난 지 4년, 괴로운 볼모생활을 보내야 했던 소현세자에게 일시적이나마 꿈에 그리던 고국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인조 18년(1640) 1월 조선으로부터 사신이 찾아와 인조의 병세가 위중함을 알려왔는데 조선사신단의 간곡한 청도 있었고 소현세자가 고국을 떠나 심양에서 생활한 지 4년째로 접어들었다는 점도 감안해 문병을 다녀오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드디어 그해 3월 그리운 고국 땅을 밟게 된 소현세자였지만 그를 맞이한 것은 인조의 싸늘한 반응이었다. 인조의 냉담한 태도에 소현세자는 낙담과 원망이 뒤섞인 마음으로 무거운 발길을 옮겨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번에 귀국하게 된 진짜 속사정을 알았더라면 귀국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귀국했더라도 서둘러 심양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세자가 일시귀국하기 바로 전 해인 인조 17년(1639) 7월 청나라로부터의 불길한 소문이 전해져 왔다. 청나라 조정이 세자를 신임해 진작에 왕으로 세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는데 이를 접한 인조는 그날부터 혹시라도 청나라 조정이 자신을 심양으로 소환하지 않을지 걱정하며 대책을 강구했다. 그래서 나온 대책이 중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심양으로 불러도 갈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자가 한양에 오는 바람에 자신의 병이 위중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청나라가 정말 소환할 작정이라면 자신만 심양으로 끌려가면 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으니 인조는 사색이 되어 좌불안석이었고 마음은 분노로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세자가 환영받을 리 만무한 이야기였다. 이를 계기로 인조는 소현세자를 언제라도 자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는 위험인물로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소현세자의 이런 행동은 이후로도 그칠 줄을 몰랐다. 인조 19년(1641) 12월, 소현세자의 생활비를 대주던 청나라 조정이 지급중단을 결정하고서 이후부터는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통고해왔다. 살길이 막막해진 소현세자는 결국 청나라가 제공한 토지를 경작해 모자란 생활비를 충당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인 포로를 고용해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식을 가지고 심양관에서 현지인들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많은 이문을 남기게 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심양관의 안주인인 세자빈 강빈姜嬪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는 그대로 조선 한양궁궐에 있는 인조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사농공상의 신분질서가 엄연해 장사꾼을 멸시하던 조선시대에,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장차 조선의 국왕과 왕비가 될 세자?세자빈이 오랑캐를 상대로 돈벌이를 했다는 사실은 망신 정도가 아니라 망조가 든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인조는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 세자와 세자빈을 궁궐로 끌고 와 폐위시키고 싶었지만 청나라 조정이나 황실과 두터운 친분이 있는 세자를 일개 속국의 왕인 인조가 어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미 인조의 마음속에 세자는 자식이 아니라 강력한 정적이 되어 있었다.
소현세자 가계도(위 그림을 클릭하시면 더 상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화려한 귀환이 부른 비극
한편 인조 23년(1645)으로 들어서자 이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게 된 청나라 조정은 더 이상 소현세자를 붙잡아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청나라 조정은 봉림대군은 볼모로 남긴 채 소현세자만 영구 귀국하도록 허락했다.
청나라 조정과 황실은 명나라 정벌 때 획득한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진귀한 물품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며 귀국준비를 도왔다. 또 아담 샬은 조선에 천주교 전파를 결심한 소현세자의 태도에 고무되어 서양문물과 천주교 포교관련 물품을 챙겨주고자 애썼다.
엄청난 양의 귀국선물이 들어오는 것은 보고는 마음이 들뜨게 된 소현세자는 그만 자신이 끌려온 처지라는 것을 잊은 채, 그의 귀국행렬을 금의환향으로 꾸몄다. 이제까지 늘 손을 벌려 고생을 시켰던 조선 백성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거니와 나무라는 듯이 자신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부왕 인조에게 자기가 능력을 발휘하여 그동안 조선이 청나라에 빼앗겼던 것을 되받아오게 되었다는 성과도 과시할 겸 금의환향 행렬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조 23년(1645) 2월, 세자의 귀국을 학수고대하던 조선 백성은 세자의 귀국행렬을 보고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심양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를 토로하는 소현세자였고, 정말 그런 줄 알고 세자의 무리한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보내주었건만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행렬은 장탄식이 절로 나오는 허탈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심양에서 데려온 명 황실의 환관과 궁녀들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이 되었음을 과시하는 전리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자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오랑캐 다 되었다”는 소리를 듣기에 딱 좋은 귀국행렬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인조 23년(1645) 4월 23일 소현세자가 병환이 들어 어의 박군이 진찰했는데 학질(말라리아)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다음 날인 4월 24일부터 인조가 친히 명을 내려, 의관으로 특채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이형익李馨益에게 침을 놓아 학질을 치료하게 했다. 침시술을 시작한 지 사흘 만인 4월 26일 소현세자가 급서했다. 학질은 모기를 매개체로 감염되는 질병으로 온대지방에서는 주로 여름에 발생하는데 아직 더위가 찾아오지 않은 음력 4월에 감염된 것도 이상한 이야기였고 일반적인 치료방법을 물리치고 침술로 치료하게 했다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례적인 일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궁궐 전례상 설령 사망률이 높은 전염병 때문에 왕이나 세자가 사망하게 되더라도 치료를 담당했던 의관은 그 죄를 물어 처벌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된 일인지 인조는 이형익에게 죄를 묻기는커녕 두둔하기까지 했다. 또 세자의 장례관련 의례도 턱없이 간소화시켜 사흘 만에 장사를 지내게 했고 염을 하는 자리에 신하가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3년간 입어야 할 자신의 상복착용 기간을 줄이고 또 줄여 7일로 했고 1년간 입어야 할 백관의 복제도 석 달로 단축시켰다.
이러던 차에 세자의 염습에 참여한 종실 친척으로부터 “온몸이 전부 검은색을 띠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와 검은 천으로 세자의 얼굴 반쪽만 덮어놓았는데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을 정도여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는 목격증언이 나오자 독살 가능성을 의심하는 소문이 돌았으나 왕실 내의 일이기도 해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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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운의 조선 프린스 이준호 저 |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흔히 부귀영화, 명예, 권력을 모두 지녔으리라 생각되는 조선 왕실의 제2권력, 세자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는지, 그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흔들렸는지, 그들의 희생이 가져다준 조선의 정치적 이익 등을 깊이 있게 살펴보는 데 집중했다. 조선왕조의 경우, 일찌감치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단명으로 생을 마감한 경우가 유난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어려서부터 강요받았던 고달픈 생활이 끼친 영향도 분명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조선 왕조 특유의 권력세습 형태인 ‘적서차별’과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어떻게 조선시대 왕자들의 삶을 무너뜨렸는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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