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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거절당한 여인, 몇 년 뒤의 모습은…

“모든 어긋난 사랑을 위로하며” 런던에서 공연보기 5. 오네긴, 발레 vs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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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컬하게도 원작소설을 쓴 푸슈킨은 6년 뒤 실제로 자신의 아내를 연모하던 남자와 결투 끝에 서른여덟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차이코스프키는 여제자의 사랑고백을 오네긴처럼 사뿐히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만, 그 결혼생활은 불행했습니다. 삶이 이렇게 우리를 속여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푸슈킨의 <유진 오네긴>

<유진 오네긴>은 러시아의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1831년에 완성한 운문소설입니다. 빼어난 지식과 개성을 갖춘 오네긴은 도시 사교계의 스타인데요. 유산상속을 위해 죽음을 앞둔 백부의 시골 저택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하지만 오만하고 거만한 데다 냉소적인 그는 시골 생활이 지루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때 시인 친구인 렌스키가 동네 지주의 두 딸을 소개하죠. 바로 여주인공 타티아나와 그녀의 동생이며 렌스키의 연인인 올가입니다. 올가는 외적으로 눈에 띄는 데다 성격도 활달한 반면, 타티아나는 수수한 외모에 어머니를 닮아 책에 빠져 사는 사색적인 여인인데요.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던 타티아나는 오네긴을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는 절절한 편지를 오네긴에게 전달하죠. 하지만 고매한 이상을 지녔으나 현실적으로 무엇 하나 바꿀 수 없었던 냉소적인 지식인 오네긴에겐 시골 처자가 건넨 편지는 유치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타티아나의 마음을 깨끗하게 거절합니다. 자신은 결혼에 관심이 없으며, 소녀의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는 법이라 말하죠.

타티아나의 명명축일. 지루한 데다 자신을 두고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던 오네긴은 재미삼아 올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올가와 다정하게 춤을 추죠. 질투에 눈이 먼 렌스키는 오네긴에게 결투를 신청합니다. 오네긴은 친구에게 사과하고 싶었지만 자존심에 말을 건네지 못하고 결국 렌스키와의 결투에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리고 시골을 떠나 수년을 방랑하게 되죠. 떠도는 생활에 지친 오네긴은 몇 년 후 퇴역한 그레민 공작의 파티에 초대됩니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요? 그곳에서 한껏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타티아나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공작의 아내인 타티아나를요. 방랑 생활에 지친 오네긴은 타티아나가 마지막 돌파구인 듯 타는 듯한 구애의 편지를 건네지만, 이번에는 타티아나가 그 마음을 거절합니다. 자신은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이고 그 삶에 충실하고 싶다고요.


그 모든 몸짓, 발레 <오네긴>

발레 <오네긴>의 역사는 소설이나 오페라와 비교하면 그리 길지 않습니다. 드라마 발레의 거장으로 불리는 존 크랑코(John Cranko)의 손을 거쳐 지난 1965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의해 초연됐으니까요. 존 크랑코는 오페라와는 차별화된 발레 <오네긴>의 매력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무대에서도 오페라 음악은 물론 차이코프스키의 다른 음악 28곡을 편곡하여 사용합니다.


발레 <오네긴>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발레 <오네긴>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발레’를 뛰어넘어 ‘마음을 나누는 무대’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드라마발레의 특징이기도 할 텐데요.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야기와 주인공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오네긴의 첫 등장이 기다려집니다. 기다란 다리를 느릿느릿 뻗어나가는 그 오만하고 나른한 움직임에서 오네긴의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죠. 타티아나는 어떤가요? 오네긴에게 마음을 빼앗겨 종종걸음으로 무대를 휘젓는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사랑을 거절당해 비통해 하는 모습,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호소하는 모습이 모두 춤으로 표현되고 관객들은 그 움직임만으로 그녀의 애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오네긴과 타티아나가 다시 만나는 3막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저며 오죠. 타티아나를 갈구하는 오네긴과 그 마음을 애써 거절하며 돌아서는, 그러나 냉정히 뿌리치지 못하고 자꾸만 그에게 이끌려가는 타티아나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됩니다. 그 어떤 말이 이들의 춤을 대신할 수 있을까요.

발레 <오네긴>의 경우 국내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공연인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04년 발레리나 강수진 씨가 슈투트가르트발레단과 처음으로 선을 보였고, 2009년 이후 유니버설발레단이 무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올해도 7월에 유니버설발레단의 무대가 예정돼 있는데요. 저는 발레 <오네긴>을 볼 때마다 1막에서는 싱긋 웃고, 2막에서는 안타깝고, 3막에서는 애통함에 울곤 합니다. 1막과 3막, 두 주인공의 파드되를 비교해 보면 흘러간 시간과 달라진 감정선의 미묘한 간극이 고스란히 전해질 겁니다. 무대에서 구현되는 춤으로 이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하지 않나요?


드라마와 음악의 만남, 오페라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 <유진 오네긴>은 발레에 훨씬 앞서 1879년 3월 모스크바 말리 극장에서 초연됐습니다. 이번 로열 오페라 하우스 공연에서는 러시아어로 무대가 꾸며지고 영어 자막이 제공됐는데요. 어쨌든 ‘노랫말’이 있기 때문에 좀 더 디테일한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편지를 건네는 장면이나 렌스키가 오네긴과의 결투를 앞두고 죽음을 예감하며 올가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아리아는 언제나 객석에서 큰 박수를 이끌어 냅니다. 또 차이코프스키가 빚어낸 <유진 오네긴>의 현란한 음악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절절함은 어쩐지 간접적입니다. 음악과 함께 시각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는 발레와 달리 ‘노래’라는 청각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오페라에서는 메시지 전달력이 현격히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함축적인 발레에 비해 너무나 직접적인 대사를 읽으며 스토리에 대한 환상이 깨질 때도 있습니다. 몸짓으로만 보는 3막과 ‘나를 떠났던 그때를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원망하는 타티아나의 가사를 접하는 3막은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까요? 무언가 좀 더 통속적입니다. 또 1막과 3막 사이 등장인물들의 분장에 큰 차이가 없어 풋사랑에 들뜬 풋풋한 타티아나도, 그림자까지 거들먹거리는 오네긴의 오만함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발레의 ‘자태’를 대신할 오페라의 ‘노래’에서 가창력 이상의 감동을 얻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발레 무대에 마음이 기우는 것 같죠?!




<오네긴>, 뜻대로 되지 않은 모든 사랑을 위로하며

모든 예술의 불멸의 화두는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름답고 슬프고, 안타깝고 애통한 모든 예술작품은 누구나 겪는 제각각의 사랑이 녹아 있기 때문이겠죠. 푸슈킨 시절 러시아의 젊은 지식인들이 겪었던 갈등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아도 우리는 오네긴과 타티아나가 겪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뜻대로 되지 않은 삶과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공감하죠. 타티아나가 오네긴처럼 미련 없이 그를 뿌리쳤다면 이렇게 큰 애절함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과거 무참히 짓밟혔던 그녀의 마음은 불완전 연소된 사랑이기에 그 모멸감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다시금 타오릅니다. 하지만 순수한 영혼을 지닌 여인이기에 뒤늦은 사랑을 따라갈 수도 없죠. 그래서 <오네긴>에는 감동이 있고, 모든 어긋난 사랑을 위로하는 게 아닐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원작소설을 쓴 푸슈킨은 6년 뒤 실제로 자신의 아내를 연모하던 남자와 결투 끝에 서른여덟이라는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합니다. 차이코스프키는 여제자의 사랑고백을 오네긴처럼 사뿐히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만, 그 결혼생활은 불행했습니다. 삶이 이렇게 우리를 속여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진출처: <로열 오페라 하우스> www.roh.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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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하정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

<알렉산드르 뿌쉬킨> 저/<석영중> 역10,62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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