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창작 뮤지컬 1호 <살짜기 옵서예>
막이 오른 무대 위에 화사한 유채꽃 풍광이 펼쳐졌다. 큼지막한 돌하르방도 자리를 잡고, 해녀들이 흥을 돋우며 춤사위를 벌인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1966년 극단 예그린이 무대에 올린 국내 창작 뮤지컬 1호다. 신임 제주 목사를 따라 제주도에 온 현감 배비장이 기생 애랑에게 홀려 혼쭐이 난다는 ‘배비장전’을 원작으로 한 이 뮤지컬은 17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화사한 무대와 색색의 곱디고운 한복이 시종 관객들의 눈을 홀린다.
원작 ‘배비장전’은 당시 양반 풍자가 주된 내용이다. 아내를 여의고 평생 술과 여색을 멀리하겠다는 맹세를 한 배비장전을 두고 제주목사와 비장들이 모략을 짜낸다. 제주 목사는 애랑에게 내기를 제안한다. 애랑이 배비장을 홀리면 그녀가 원하는 것을 전부 주고, 홀리지 못하면 애랑을 관기에서 내쫓겠다 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양반의 상투다. 조선시대 남자는 장가를 가면 누구나 머리를 틀어 올렸다. 상투적이다,라는 표현이 빚어질 만큼 당시의 당연한 습속이고, 문화였다.
정조를 목놓아 외치고 다닌다는 배비장의 얘기를 듣고 애랑은, 위선을 상투처럼 당연시 이고 다니는 양반을 망신주고 싶었던 게다. “어디서나 끄떡! 안하무인 끄떡”하는 상투를 잘라 봉두난발된 배비장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속셈이다. 극중 배비장이 좀 더 위선적이고 허풍쟁이였으면 이런 풍자의 맛을 더 살았을 텐데, 홍광호의 배비장은 아내와의 약조를 금쪽같이 여기는 순정남이자, 애랑에게 사랑에 빠질 땐 여지없이 순진한 소년의 모습이다. 골리는 애랑과 한마음이 되어 배비장이 당할수록 후련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골탕 먹는 배비장이 안쓰러울 지경이니 이를 어이할꼬.
너만 잘났다 이거지? 배비장 여색 빠뜨리기 대작전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에서 배비장의 잘못이라 하면, 정절을 지키겠다고 한 아내와의 약조를 깬 것이다. 배비장은 약조한 증표를 머리에 꽂고 아내 대신 외로움을 곁에 두고 지냈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를 도통 놔두질 않는다. 배비장이 술자리에도, 여색을 즐기는 자리에도 어울리지 않고, 이들을 우습게 비웃으며 혼자 고상한척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두 가지 방식으로 다루는데, 물들이거나 따돌린다.
우리와 다른 어떤 사람들 때문에 하나와 다름없는 우리가, 그래서 최선인 우리가 좀 부족해 보이거나 비천해 보이는 걸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너도 이렇게 해!”라고 강요해서 지금 우리의 방식이 최선이라는 걸 확증하는 셈이다. 권위적인 공동체 속에서 쉽게 보이는 속성이다. 이들이 작정하고 배비장을 물들이겠다고 나서는데, 목석이 아니고야 어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고고하고 당당했던 배비장은 결국 애랑의 교태에 빠져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우스꽝스러운 신세가 된다.
배비장은 처음 애랑이 마음을 흔들었을 때 “폭풍우가 지나가듯 지금의 설렘이 지나갈 테니 기다려주오”라고 죽은 아내에게 고백한다. 사랑의 폭풍이 지나가고 난 자리는 더 오랜 시간 요동친다는 걸, 한 여자만 보고 살았던 배비장은 몰랐다. 죽은 아내와 살아있는 기생의 대결! 외로운 배비장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간다. 지금 이 순간의 설렘은 오랜 추억과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 어이할까나. 이제 그 얼굴만 떠오르고. 급기야 배비장은 상사병 증세를 보이고, 그날 밤으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코메디도 멜로로 뒤바꾸는 (의심 없는) 사랑의 힘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된 배비장은 애랑을 찾아 떠나는 캄캄한 길에서부터 방자의 놀림에 혼쭐이 난다. 그래도 배비장의 벌렁벌렁 뛰는 가슴엔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은 배비장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행동에 자지러지지만 배비장 마음속에는 오직 그대 애랑 얼굴뿐이다. 여기서 (아마도 연출가가 의도하지 않은) 발견을 한다. 의심 없는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할지니!
배비장이 그녀를 의심하고, 그의 마음을 의심했더라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놀림감 신세로 전락했을 테다. 허나 슬랩스틱 코미디로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도 배비장은 숭고한 멜로드라마 속에 있다. 그는 진지하다. 뒤주에까지 갇혀 바닷물에 빠져 죽을 뻔 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배비장, 그녀부터 찾고, 그녀만 걱정한다. 애랑이 “이 모든 것이 내 희롱이오. 미안하오” 사과해도 우리의 배비장 왈, “아니오. 아니오. 그대 집으로 찾아간 내가 미안하오” 도통 순정을 거둘 줄 모른다.
이 온전한 사랑! 배비장이 속았나? 아니, 그는 속지 않았다. 그저 계속 애랑을 사랑했을 뿐!배비장의 일편단심 전략을 눈여겨보자. 제 아무리 나를 놀리고 조롱하고 떠들어대도, 내 마음 깊숙이 확실한 진심이 있다면, 휘둘릴지언정 맞붙을 수 있다는 걸 배비장이 보여준다. 속은 건지 속인 건지 배비장, 알 바 아니다. 배비장이 할 수 있는 일은, 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결정하는 일 뿐이었다.
확실하면 쭉 가는 거다. 한 치 의심 없는 진정성으로, 시종 나에게 중요한 것만 생각하고 나아가는 거다. 놀리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도 이런 뚝심 앞에서는 사그라들기 마련. 저들이 미지근한 반응에 지쳐 돌아갈 때까지 흔들리지 않는 우직함은 필수다. 연애 한번 시작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주파수 달고 달려와 조언해대는 친구, 부모, 언니, 오빠의 말말말들. 이 사이에서 진짜 사랑 지켜내려면, 이런 눈먼 우직함이 필요하다. 언젠가 소중한 걸 지켜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수세에 몰려 당할 꼴 다 당하고서도 사랑을 쟁취해낸 이 순정남 배비장을 떠올려보자.
해학미 증발했지만, 무대-연기 뛰어난 작품
배비장의 이러한 순정 때문에 양반 풍자극 ‘배비장전’은 로맨틱 코미디가 되었다. 원작의 해학미는 온데간데없고, 갈등은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넘어간다. 코러스는 이렇게 노래할 따름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네. 이렇게 될 줄 알았네.” 한복의 곡선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군무, 소리부터 경쾌한 부채춤, 시종 따뜻하고 화사하게 떨어지는 무대 조명 속에서 배비장을 둘러싼 내기는 “이렇게 돼도” 즐기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다.
극중 재미 요소를 맡은 방자의 시종 재치 넘치고 익살맞은 대사와 몸짓은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특히 김성기가 연기하는, 이보다 방자다울 수 없는 방정스런 방자 캐릭터는 단연 압권이다. 여러 작품에서 감초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 방자지만, 극 중에서 방자는 여느 캐릭터보다 누구보다 존재감 있고 개성이 넘친다. 애랑 역의 김선영, 배비장 역의 홍광호는 안정된 연기, 뛰어난 기량으로 이름값을 해낸다.
근엄한 양반이 기생에게 홀려 망신을 당한다는 ‘배비장전’의 레퍼토리는 춘향전만큼이나 사랑받는 이야기였다. 1936년부터 판소리 창극으로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신상옥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으며, TV 드라마로도 방송된 바 있다.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3월 말일까지 CJ토월극장에서 상연된다. 봄나들이로 유채꽃이 활짝 핀 펼쳐진 예술의 전당 무대로 살짜기 가보는 것도 좋겠다. “살짜기~ 살짜기, 살짜기 옵서예”라고 귀에 쏙 감기는 메인 넘버를 봄 내내 흥얼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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